[당구(撞球)와 몸치(~癡)]
어느 날 우연히 지인(知人) 넷이 만나 식사를 하는데 모두가 스스로를 몸치라 자부한다. 몸치라 함은 사전적으로 “노력을 해도 춤이나 율동(律動) 등이 맞지 않고 어설픈 사람”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음치가 노래를 하는데 있어서 고저장단(高低長短)의 음을 맞추지 못하는 것처럼 제반 동작을 몸으로 표현하는데 있어서 어설픈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렷다. 가만히 보아하니 내가 오래 전부터 익히 모두를 알고 있던 터라 그간의 모습들을 생각해보니 어느 정도 이해도 될 법 하다.
지인1은 언젠가 같이 야유회(野遊會)를 간 적이 있었는데 내가 가장 싫어하는 운동 중의 하나인 족구(足球)를 하는데 공을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그에 있어서는 나와 유사한 정도라고 보였지만 그래도 여타의 운동을 하는 것으로 보아 나보다는 덜 몸치라고 판단이 된다.
지인2는 대체적으로 “엉덩이가 무겁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엉덩이가 무거운 것으로 치자면 나도 어느 누구에 못지않으니 갑자기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연을 지인2로부터 느낀다.
지인3은 스스로 몸치라고 우기니 그런가보다 하지만 한 때는 우리 사회에 유행(流行)하였던 상당히 고급스럽고 멋진 운동을 수준급으로 했다는 자신의 말을 들었던 터라 사실 몸치라는 것이 믿어지지는 않는다.
지인4는 나 자신(自信)으로서 이는 누가 보아도 몸치가 확실하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뛰는 운동부터 뒤뚱거리며 하다가 보니 움직이면서 공을 가지고 그것을 다루며 하는 운동도 물론 제대로 하는 것이 없기 하나도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몸치의 극치는 춤이다. 그것이 스킨십이 있는 종목의 춤이든 나 홀로 하는 춤이든 무엇을 하더라도 율동에도 맞지 않고 보기도 불편하며 스스로도 짜증이 나는 그러한 몸짓의 경우를 말함이다. 그러니 언제나 그러한 자리에서는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구석에 앉아 남이 하는 것을 바라다보다가 주변의 강권(强勸)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무대(舞臺)에 서면 정말 어색하고 서투르기 짝이 없다. 글쎄다. 몸치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축구를 하다가 우연히 골대 앞에서 알짱거리는데 남이 질러준 공이 자신에게 날아와 맞게 되는 절호의 찬스에서 회심(會心)의 한 방을 날렸지만 헛발질을 하여 공은 엔드라인으로 벗어나고 자신은 운동장에 나둥그러져서 흙먼지를 한 잎 물게 되는 것이라고나 할까 하여튼 몸치는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끼치는 민폐(民弊)이다.
일이 있어 지인 하나는 일찍 집으로 돌아가고 남게 된 지인 셋이 오랜 만에 당구장을 들어갔다. 한 지인은 게임 돌이를 보고 두 지인은 지난 시절을 생각하며 큐를 들었다. 글쎄 큐를 들고 당구대 위에 있는 당구알 네 개를 바라다보니 이것이 정녕 얼마만인가!!! 당구에 나름대로 재미를 붙여서 열심히 당구장을 드나든 것은 아마도 학창시절보다는 취업을 한 1980년대 초중반 정도 되었을 테니 실로 얼추 35년 만이다. 솔직히 말해서 학창시절에는 돈이 없어서 당구를 치러 다니는 것에 많은 제약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저 신촌 창천동의 아파트 전세금 30만원을 반환 받아서 주철 형과 밤새도록 그 돈의 10분의 1을 썼던 것이 가장 크게 투자를 한 것이니 당구 실력이라고 할 것도 없는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래도 하다못해 주머니에 붉은 지전 몇 장 넣고 다니면서 당구장을 전전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스스로 돈을 벌던 직장인으로서였다. 물론 그 사이에도 당구장을 전혀 출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미친 듯이 아니면 목숨을 걸고 큐대로 당구알을 사정없이 후려쳐본 적은 내 기억에 없다.
하여튼 지인 셋은 그렇게 재미있게 한 시간여의 시간을 보냈다. 이날의 전적은 나로서 삼판양승으로 1승 2패 세트스코어 패배였다. 그러나 승패에 관계없이 지인 셋은 웃고 즐기며 재미있는 시간을 당구를 통하여 보냈다. 그렇게 생각을 해보니 요즈음은 초로(初老)의 나이에 있는 세대가 당구장에서 시간을 자주 그리고 많이 보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차라리 술을 마시고 정신이 혼미(昏迷)해지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이 된다. 오히려 당구를 통하여 음주량을 줄이고 운동량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발로 걷고 몸을 굽히고 뒤틀며 두뇌운동(頭腦運動)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게다가 당구장 주인이나 직원이 가져다주는 커피를 마시고 가끔 소주도 마셔가면서 게걸거리는 재미도 있고 특히 중국 음식점에서 시켜먹는 짜장면의 맛은 아마도 일품일 것이다.
두뇌운동이라고 하니 사각의 당구대에 놓은 두 개의 빨간 공과 하나의 노란 공과 또 하나의 하얀 공을 본다. 노란 공과 하얀 공이 부딪히면 벌금을 내야 하므로 그것을 피해 빨간 공 두 개를 반드시 맞추어야 주판(珠板) 같은 점수대의 알이 친 만큼 아래로 내려간다. 하여튼 당구는 두뇌싸움이 맞다. 왜냐하면 쿠션을 걸치던 직접 겨냥을 하던 자신의 공이 빨간 공을 연속하여 타격(打擊)해야 하니 각도(角度)와 회전(回轉)을 큐대로 공에 가하는 물리적인 계산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안타까운 것이 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각도와 회전과 쿠션을 맞고 튕겨 나오는 반사각을 디자인해도 문제는 큐대로 공을 타격하는 순간의 감각이 결과를 좌우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바로 몸치의 감각은 큐대로 공을 때리는 순간이 정교(精巧)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몸치의 설움이 초록의 당구 판에 쏟아져 넘쳐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은 어느 정도의 수준을 넘어가면 아무리 고민(苦悶)을 하고 생각을 하여 공이 가는 길을 잘 보아도 타격을 가하는 순간의 무딘 몸치감각은 절대로 극복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러한 수준의 당구수가 나의 당구라는 운동에 대한 흥미(興味)를 꺾어버린다. 이것이 당구는 물론 모든 운동에 있어서 보여주는 나의 한계(限界)이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장점(長點)과 특징(特徵)에 있어서 각자가 다른 면을 갖고 있고 그에 만족하고 그것을 즐긴다. 그것을 보면 하느님은 참으로 공평(公平)하다. 내가 비록 몸치라서 춤을 추는 일에 서툴고 공을 갖고 놀거나 그것을 다루는 일에 어색하지만 그래도 나에게도 내가 하면 즐거운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무대에서 마이크를 들고 반주(伴奏)에 맞추어 나의 목소리에 바이브레이션(vibration)을 넣고 흐르는 리듬을 타고 저음(低音)의 배호 노래를 부르고 100점이라는 결과에 시퍼런 배추 이파리를 모니터에 침을 잔뜩 발라 붙이는 것이 그것인데 그러한 취미가 나에게는 맞다. 그러나 이것도 이제 나이가 드니 그 흥미가 예전 만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을 어이하랴~
그런데 당구장에서 쓰는 용어는 아직도 일본말이 대세이니 그 무슨 언어의 유희(遊戱)인가 가락꾸, 히끼, 빠킹, 기리까시, 히까끼, 오시 네죠마우시, 다마, 마쎄이, 시네루 등등...
2018.03.21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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