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영등포의 삶

[스크랩] [기다림의 미학(美學)]

영등포로터리 2018. 1. 22. 08:38

[기다림의 미학(美學)]

기다린다는 것은 하염없는 마음이다. 사전적(辭典的)인 뜻을 찾아보면 “(사람이 무엇을) 보거나 그것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시간을 보내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경우의 기다림을 경험한다. 그리하여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화를 내기도 하고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신뢰성(信賴性)이 부족한 사람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보듯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시간을 보내다”라는 것은 간절한 마음도 동반(同伴)한다. 따라서 기다림은 간절하며 안타까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모든 것이다.

예전에 할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의 일이다. 서울로 유학(留學)을 가서 객지에서 결혼을 하여 자식을 두고 생활하는 우리가 주말이 되면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주말나들이를 할 때가 있다. 요즈음은 영상통화(映像通話)라는 전화기의 기능이 있어 그러한 마음을 조금은 상쇄(相殺)되어 있을지는 모르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문명의 기능이 없던 때라서 서울에서 출발을 하기 전에 이번 주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인 증평을 가겠노라고 부모님께 전화를 드린다. 그러면 이러한 아들의 귀향소식(歸鄕消息)을 부모님은 할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렸을 것이다. 서울에서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가서 준비를 한 다음 고속터미널이나 영등포역으로 나가 승차를 하고 두 시간 넘게 여행을 시작하고서 청주에 도착, 일반 버스터미널로 이동을 한 다음 증평 가는 차량을 이용하여 고향집을 가다가 보면 이미 날은 어두워져서 컴컴한 밤이 된다.

도착하는 자식들은 집 문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기다리는 할아버지를 보고 인사를 드리면 되는 것이지만, 생업(生業)에 바쁜 부모님의 말은 우리가 온다고 하여 말씀을 드렸더니 할아버지께서 아침을 드시고부터 문 앞에 의자를 하나 가져다가 놓고 앉아 우리를 기다리셨다는 것이다. 기나긴 여름날의 햇볕이 물러가고 땅거미가 밀려오는 시간에 우리가 도착하였으니 무려 하루 종일을 의자에 앉았다 일어섰다 집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와서 또 앉았다 일어 섰다를 할아버지는 토요일 내내 하셨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손자는 물론 손주 며느리와 증손자(曾孫子)를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마음 즉 기다림인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아버지, 어머니도 그만큼 연로(年老)해졌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할아버지가 지키던 그 의자는 이제 빈 의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자식들은 생각하였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아버지, 어머니가 현업(現業)에서 은퇴(隱退)를 해서 바쁜 생업이나 일상은 저 만치 물러갔지만 할아버지가 지키던 그 빈 의자에는 이제 아버지가 앉아 있는 것이다. 여전히 성장한 손자손녀들을 데리고 고향을 찾으면 아버지가 그 자리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니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안계시니 이제 그 의자에 네 아버지가 한 치도 틀림이 없이 너희들을 기다리시는구나!”라고 전해준다. 그러던 중에 부모님이 증평에서 청주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아파트는 시골집과 가옥구조(家屋構造)와 주변환경(周邊環境)이 다르니 아파트 입구에 의자를 놓고 앉아 기다릴 수가 없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파트 입구가 잘 보이는 베란다에 의자를 놓고 우리가 걸어 들어오는지 우리 번호의 차가 들어오는지를 할아버지와 똑 같이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아들, 며느리와 손자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종일토록 뚫어져라 입구를 보다가 정말로 아들이 운전(運轉)하는 차가 들어왔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세월이 흘러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그리고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가 앉아 있던 의자도 없어졌다.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기다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그에 맞추어 움직이는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나 역시 그에 맞추어 행동할 이유가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일요일 아침인지라 좀 늦게까지 누워 있다가 11시 반이 넘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병상(病床)의 어머니에게 미음이라도 떠 넣어 드려야지 하는 마음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는 정신이 약간 혼미(昏迷)해보였던 어머니가 오늘은 병실 문 앞에 내가 나타나자마자 옆에 앉아 있는 간병인(看病人)에게 “우리 아들이 왔다”고 비교적 명확하게 말을 한다. 나 역시 매우 반가워서 “맞어유!!! 아들이 왔어유~” 하며 보조의자를 놓고 앉아 어머니의 머리를 쓰다듬어 드린다. 곧 이어 나온 점심 식사를 어머니에게 모두 떠 넣어드리고 나니 시간은 오후 1시를 향해서 달려간다. 치매(癡呆) 약을 미음에 개서 약이라서 쓰니 꿀꺽 삼키라고 하면서 약을 드리고 쓰디쓴 입맛을 헹구는 의미에서 요구르트를 한 병 드리고 나니 나 역시 시장 끼를 느낀다.

“어머니! 나도 점심을 먹어야 되니까 밥 좀 먹고, 사무실을 가서 일을 해야 하니까 이제 푹 쉬시고 내일 봐유~”
어머니는 말이 없다. 그러나 말이 없는 이 순간은 말이 자유자재(自由自在)로 되지 않으니 말을 내뱉을 준비를 마음속에서 하는 것이다.
“왜유 가지말까 아니면 저녁에 다시 올까유”
어머니는 힘겹게 마음속에 있는 한 마디의 말을 내뱉는다.
“드러누워서 아들을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어!!!”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없어졌던 그 빈 의자가 없어진 것이 아니지 않은가
벌써 어머니의 병원생활이 3년 반이 되어 가는데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니 어머니 역시 아들며느리손자손녀가 언제 오려나하고 병원 휴게실에 나와 TV를 보면서 밀차를 밀고 복도를 오가며 기다려온 것이다. 그것은 빈 의자를 두고 앉을 곳이 없으니 그러한 형태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은 이제 보행기능(步行機能)을 상실하고서는 침대에 누워서 출입문을 바라보면서 아들이 오기를 기다려 온 것이다. 비록 말문이 막히고 걷지 못하여 누워있지만 어머니도 여전히 내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보니 기다림이란 간절하며 안타까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모든 것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 말대로 매우 힘든 일이다.

우리는 부모님을 보고 양친(兩親)이라고 한다. 이쯤 되니 왜 부모를 표현하는데 친자(親字)를 쓰는지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만 같다. 친(親)이란 글자를 파자(破字)해보면 동네 어귀인 저 멀리가 보이는 것보다 더 먼 곳으로부터 아들며느리손자손녀가 오는지를 높은 나무(木)에 올라서서(立) 그 발걸음을 떼는 모습을 보려고(見) 기다리는 분이 부모라는 뜻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 기다림은 간절하며 안타까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모든 것일 뿐만 아니라 모든 부모님의 말대로 매우 힘든 일이다.

기다림의 미학(美學)이라고나 할까

2018.01.21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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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돌고도는 영등포 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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