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증평]
교중미사가 끝날 무렵인데 신길동 권오희 회장으로부터 전국노래자랑을 증평에서 하고 있으니 TV를 보라는 문자가 들어왔다. 부리나케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와 TV를 트니 신나게 추석연휴에 노래축제를 즐기는 고향사람들이 보인다.
그 장면을 보니 새삼 고향생각에 어렸을 적 추억이 떠오른다. 설치된 무대를 보니 그 장소가 국민학교 다닐 때 동무들과 미역 감고 뛰어놀던 보강천 둔치이다. 그곳에는 우리 논과 밭이 있었고 그러기에 봄에 모를 심고 여름이 되면 보리타작하고 옥수수 거두며 가을이 되면 깨를 털고 벼 타작을 하던 곳이다.
그리운 내 고향!!! 증평~^^
2013.09.22/해
☆
내 고향 증평은 물 맑고 들이 좋은 곳이다. 지금은 산업화가 많이 진행되고 도시화되어 공장과 주택지가 많이 들어섰지만 예전에는 하천을 끼고 넓지는 않지만 곡창지대가 펼쳐졌었다. 사리쪽 에서 내려오는 보강천은 청안으로부터 내려오는 문방천과 도안 쪽에서 합류하여 다시 흘러 내려가, 좌구산이 있는 남차리로부터 내려오는 삼기천과 음바리다리(미암교) 부근에서 만난다. 이 보강천은 증평을 가로 질러 미호천에 합하여져 금강으로 가서 서해로 빠져나간다. 34번 도로를 경계로 하여 대체적으로 남쪽으로는 이 도로를 따라 주택지가 형성되어 있었고 북쪽으로는 논밭이 펼쳐진 들판이었다. 우리 집에서 북쪽으로 연해 있는 두타산(두타산)을 바라보며 왼쪽으로부터 초중리. 연탄리, 송산리, 미암리, 도안면이 오른 쪽으로 자리를 잡고 다시 천을 따라 다시 남쪽으로 사곡리, 용강리, 남하리, 죽리 등이 그 들판 위에 있다. 청주 땅이라 불리던 초중리를 통하여 북이면을 넘어 내수, 청주로 가며, 연탄리를 지나 초평저수지와 진천을 가게 되고, 도안으로 가는 길에 괴산과 음성으로 연결된다.
그저 막연히 증평이란 지역을 비롯하여 진천 그리고 음성 지역은 고래로부터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의 각축장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우리의 역사 중에 삼국시대가 중원인 이 지역을 고리로 하여 사람과 문물 그리고 군사가 교류하고 충돌하던 곳이었을 것이라 추측을 해본다. 어찌 보면 이러한 지정학적이고 지리적인 여건이 이 지역을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의 관습과 사고를 규정짓고 그것은 DNA에 용해되어 지금의 우리에게도 전달이 되고 있을 것이다.
증평군청의 홈페이지를 가서 보면 내 고향 증평에 대하여 다름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고구려
. 475년 금물노군(今勿奴郡) 도서현(道西縣)
- 통일신라
. 757년 도서현(道西縣)을 도서현(都西縣)으로 개칭(신라
경덕왕 16년) 청연현(淸淵縣(또는 청당현 淸塘縣)) 설치,
흑양군(진천의 옛 이름) 영현
- 고려
. 940년 도서현(都西縣) 도안현(道安縣)으로 개칭(고려태조
23년)
. 현종9년(1018) 청주목의 속현으로 됨
- 조선시대
. 1405년 청연현(淸淵縣(또는 청당현 淸塘縣))과 도안현
(道安縣)을 청안현(淸安縣)으로 합병 (조선 태종5년)
감무를 둠
. 태종 13년 현감을 두고 청주진 관할하에 둠
. 1895. 5. 26 청안현(淸安縣)을 청안군(淸安郡)으로 하고
그 밑에 읍내면(邑內面), 동면(東面), 서면(西面), 근서면
(近西面), 남면(南面), 북면(北面) 등 6면을 둠 (고종32)
- 일제강점기
. 1914. 3. 1 청안군(淸安郡)이 괴산군(槐山郡)에 흡수
합병됨
. 1914. 4. 1 읍내면(邑內面)과 동면(東面)은 청안면(淸安
面), 북면(北面)은 도안면(道安面), 근서면(近西面)과
남면(南面)은 증평면(曾坪面)으로 됨
- 대한민국
. 1949. 8. 13 증평면(曾坪面)이 증평읍(曾坪邑)으로 승격
. 1966. 1. 1 교동(校洞), 중동(中洞), 대동(大洞)을 증평리
(曾坪里)에서 법정리로 분리
. 1973. 7. 1 청원군 북이면 초중리 편입
. 1990. 12. 31 충청북도 증평출장소 설치
. 2002. 1. 2 장동리, 증천리, 신동리, 창동리, 내성리를
증평리에서 법정리로 분리
. 2003. 8. 30 증평군(曾坪郡) 개청
- 군화(郡花, Flower) : 백목련 Magnolla
봄소식을 일찍 전하는 탐스러운 꽃으로 순결하고 화합하며
온화함을 나타내며 희망에 찬 주민과 자연적인 사랑, 번영
을 상징
- 군목(郡木, Tree) : 은행나무 Ginkgo Tree
암수 딴 몸으로 열매를 맺어, 분별 있고 예절바른 고장과
어떤 환경에도 오염되지 않고 생동감 있는 지역 상징
- 군조(郡鳥, Bird) : 백로 Snowy Heron
공해 없는 맑은 물과 푸른 산이 있는 곳을 찾고 풍년을
예고하는 새로써 청아한 지역으로 번영을 상징
- 증평군 인구 현황
. 남(19,446명) / 여(18,337명) / 총 37,783명
. 총 세대수16,694가구
. 증평읍 인구현황 : 인구수 2,118명, 가구수 1,023가구
. 도안면 인구현황 : 인구수 35,665명, 가구수 15,671가구
(2017.12.31 현재)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내 고향 증평은 아버지가 6살이 되던 1935년에 괴산에서 나와 정착하였던 곳이고, 10리 떨어진 청안으로부터 6.25가 끝난 1954년에 어머니가 시집을 와서 가정을 꾸리고 슬하에 4남매를 두며 만들었던 보금자리이다. 나는 비록 13살 어린 나이에 청주로 유학을 떠나 지금까지 세월이 흘렀지만 증평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1995년에 청주로 이사를 할 때까지 집안에 대소사의 일이 있고 명절이 되면 버스나 기차가 터져나가든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든 찾아 가던 육신과 영혼의 안식처인 고향인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2005년에 본의 아니게 갑작스런 아버지 의 건강상 변고로 청주를 떠나 서울로 이사를 하여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아직 고향 증평에는 외삼촌이 자리를 지키고 계시고 선배, 동창, 후배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삶을 꾸리고 있다. 그런데 고향을 찾는다는 것이 내가 난 곳도 난 곳이지만 부모님에 계시는 곳이 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부모님이 청주에 계실 때는 모든 역량이 청주로 집중이 되고 누가 고향을 물으면 “청주”라고 대답을 했다.
부모님이 서울로 오신 후에는 그 모든 것이 서울로 향해만 갔는데 이제 병환의 어머니가 대림동을 떠나 신길7동으로 가셨다. 그것은 나의 집에서 “국이 식지 않는 거리”의 인거형(隣居型)으로 어머니를 모시다가 2014년 7월에 치매 진단 후에 어머니를 신길7동에 있는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신길 7동의 유지들을 만나면 “저의 어머니께서 신길7동 주민이 되었으니 잘 부탁한다.”고 당부를 한다. 나로서는 사실 진지한 부탁인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서 신길7동을 보면 대방동 성당의 첨탑이 보일 듯 말 듯 한데 나는 그곳을 바라보면 “어머니 편히 주무셨나요?”하고 아침 문안인사를 올린다. 이제 나의 고향은 영등포구인 것이다.
하지만 고향의 의미에는 잊혀 지지 않는 어릴 적 동무들과의 추억과 많은 주변인들과의 사이에 맺어진 사연들이 있다. 삶을 위하여 수없이 공간적 이동을 하듯이 사람은 많은 지리적 공간과의 인연으로 살아간다. 나에게 있어서 청주도, 영등포구도 이제 고향이지만 영원한 마음속의 고향 그리고 육신이 썩어져 돌아갈 그곳 고향은 증평인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내 고향 증평, 그곳에는 티 없이 맑게 뛰어 놀던 동심이 있고 어릴 적 동무들이 있으며 파란 하늘이 있고 하얀 구름이 흐르며 우물 속에 한 소년이 비치듯이 마음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그렇게 이제 나는 언젠가는 스러질 어머니를 그곳으로 모실 준비를 하는데 또 언젠가 내가 이 땅에서 스러져갈 때 내 아들 명섭이는 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썩을 육신을 고향으로 보내주려나 모르겠다.
2018.01.11/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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