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영등포의 삶

[스크랩] [기적소리만]

영등포로터리 2018. 1. 17. 17:23

[기적소리만]

철도 위에서 운행되는 기관차 중에는 크게 보아 세 종류가 있어 왔다. 철도의 역사를 보면 최초에 증기기관차가 운행이 되었고 이 기관차는 산업혁명과 함께하는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에서부터 시작되어 디젤 기관차가 발명되기 전까지 기관차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 우리나라에 기차가 처음 들어왔을 때도 수증기를 내뿜고 처량한 기적소리를 울리며 증기기관차가 철마(鐵馬)라는 이름으로 궤도를 달렸다. 이때는 나라의 이권을 서구를 비롯한 일본에 빼앗기는 상황이었으므로 그 기적소리가 우리네들 귀에는 더욱 더 처량하게 들렸을 것 같다. 이 증기기관차는 그렇게 민족의 설움을 안고 왜정 35년 간 삼천리금수강산을 서울을 교차점으로 하여 X자 형태로 달려왔다. 어디 그뿐이랴~!!! 민족의 또 다른 상처로 남아있는 동족상잔의 6.25사변은 남북분단으로 철로의 허리를 끊고 전쟁의 포화로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외마디 비명과 절규를 남긴 채 그의 질주를 세워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임진각 등지에 가면 멈춘 채 녹슬어버린 철마, 증기기관차가 그때 모습 그대로 서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기찻길도 그대로 녹이 슬었다.

증기기관차는 내가 어렸을 적에 증평역에 자주 정차를 하였고 물을 공급받기 위해서 수조탑(水槽塔) 아래에서 기적을 울리며 하얀 수증기를 무서우리만치 내뿜고는 하였다. 그런가 하면 중학교 다닐 때에 청주역에서 서청주로 가는 고갯길에서 힘이 달려 오르지를 못하고 뒤로 밀려 난 다음 가속하여 수차례 허덕거리다 넘어가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6.25사변으로 군수물자의 이동이 필요해서 그리고 피난민의 수송을 위해서 힘과 속도를 개선시키기 위해서 UN에서는 우리나라에 디젤기관차를 보내주기로 했다. 연료비도 적게 들고 힘이 좋아 전쟁을 수행하고 승객을 실어 나르는데 매우 효율적인 운송수단이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보면 기관차에 대한 경험은 증기기관차보다는 디젤의 그것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나라에 전기기관차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71년 중앙선에 전철이 도입되면서이지만 우리의 실생활에서 피부에 와 닿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1974년 8월15일 지하철 1호선의 개통이 아닐까 한다. 지금은 그러한 전기기관차가 KTX라 하여 고속전철로 진화하여 예전에 하루 이틀 걸려가던 서울 부산 사이를 지금은 3시간이면 도착이 가능해졌다. 격세지감이요 상전벽해이며 천지개벽 같은 일이 불과 한 세기 남짓한 시간 내에 모두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의 추억과 가슴 속에 들어 있는 기적소리는 디젤기관차의 “뿌우~”하는 기적소리보다는 긴 시간 동안 이 땅의 설움을 안고 달리던 증기기관차의 “뽀~~옥”하고 길게 여운을 남기는 기적소리가 대세였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그 추억의 소리도 변해 감을 느낀다. 그 이유는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증기기관차가 우리네 실생활에서 보이지도 않지만 그 기관차가 들려주던 그 애절한 기적소리도 더 이상은 우리의 귀에 익숙하지 않고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삶의 저편으로 자꾸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는 아주 낯설던 디젤기관차의 기적소리가 이제는 지극히 추억스럽게 들린다. 하기사 어차피 그 디젤기관차도 서글픈 시절을 함께했고 국민의 설움과 애환을 싣고 달려왔던 것을 부정할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기차통학을 생활화했던 것이 1968년이니까 멀리서 울려오는 기관차의 기적소리를 기다렸던 것이 벌써 반백년 전의 추억이 되었다. 우리 통학생들은 저녁이 되어 땅거미가 몰려오기 시작하면 학교 운동장을 출발하여 걸어서 청주역까지 갔다. 청주역에서 일하는 2~3명의 역무원들이 개찰시간을 기다리며 개찰표시를 해주는 펀치를 손안에 쥐고 덜그럭거리며 개찰 펀칭연습을 한다. 개찰시간이 되면 개찰구가 열리면 기차표를 구입한 일반승객들은 표를 건네주고 역무원은 펀치를 이용하여 개찰하였음을 증빙하는 흔적을 기차표의 한 끝에 남긴다. 우리는 1개월용 패스(pass)를 보여주고 플랫폼(platform)으로 내달린다. 플랫폼 저쪽에서 전조등을 켜고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들어온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수를 쓰든 먼저 올라타야 자리를 잡을 수 있기에 열차가 정차할 경우에 정해지는 출입구를 선점하기 위해 몸싸움을 하고 어떤 친구는 서지 않은 열차에 기술을 뽐내며 올라탄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열차가 좀처럼 오지 않을 경우가 있다. 소위 열차가 연착을 하다가보면 마냥 대합실이나 플랫폼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는 웅성웅성하면서 왜 열차가 오지 않느냐고 서로 묻고는 했다. 그러면 누군가가 아주 촌스럽게 대답을 한다.
“기차가 오다가 바쿠에 빵꾸가 났댜~”
우리는 그렇게 웃으면서 여전히 열차를 기다리다 지쳐 늘어진 몸으로 뒤늦은 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예정보다 늦게 증평역에 도착하면 대합실에 많은 아버지, 어머니들이 나와서 우리를 반겨주고는 했다. 지금 같으면 아마도 “열차표를 환불해 달라”느니 “역장놈 나오라”느니 난리를 죽일 것인데 그때는 그 열차가 아니면 집을 돌아갈 방법이 거의 없었던 시절이니 지금 같이 대체 교통편이 많이 확보된 것은 이 시대와 지금 세대의 축복인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나라인가?

우리가 이 당시에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며 부르던 노래가 있었다. 그것은 박재홍의 “유정천리(有情千里, 1959년)”였다. 적당한 먹거리가 없던 그 시절, 기차를 기다리며 배가 많이 고파 불렀던 노래이다.

“기차를 원망하랴, 기관사를 원망하랴.
청주역장 김털털아, 학생심정 알아다오.
연착해도 나는 좋아, 선착해도 나는 좋아.
눈물 어린 책가방에, 빈 벤또만 달각달각~”

“기적소리”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배성이 부른 “기적소리만(1970년)”이다. 이 노래는 기적이 잠이 들었다고 울부짖으며 이별의 슬픔을 삭이려 사나이의 눈물을 삼킨다. 역시 낭만에 치를 떠는 멋진 유행가이다.

“기적도 잠이 들은 적막한 정거장,
정든 그 사람을 멀리 보내고 나 홀로 섰네.
사랑을 하면서도 보내야 하는 사나이 이 가슴을 알겠냐마는
기적소리만 기적소리만은 내 마음 알고 갔겠지~”

2018.01.17/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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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돌고도는 영등포 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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