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크다고?]
사람이 살다가 보면 "이것은 아닌데..."하면서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쩌다가 한 번으로 끝나면 길을 걷다가보니 진흙탕을 밟았다고 생각이 되겠지만 그러한 황당함이 자꾸 반복이 되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그냥 속절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일이다.
자신의 삶 앞에서 하나씩 둘씩 지켜야 될 것이 무너지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현실을 황당해하고 당황하면서 대체적으로 세가지 정도의 반응이 나타날 것이다.
첫째, 끈질긴 극복을 위해 온몸으로 부딪히는 사람이다. 이것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상황에 대한 그 사람의 육신과 정신 속에 배어있는 반응의식이다. 끝도 없는 투쟁을 불러오며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간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해 오르는 이를 연상하게 된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은 뚜렷한 역사와 사회를 바라다 보는 의식을 갖는다. 이들은 진실에 기반한다. 그래서 한도 없고 속절없이 무너지지만 다가오는 미래에 반드시 승리를 한다. 지금의 삶에서 부귀영화가 보장되지도 않고 훗날 조국의 거름이 되고도 알지 못할 승리이겠지만 말이다.
둘째, 케세라세라하는 사람이다. 여기에는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여 삶과의 연을 끊는 사람도 간혹 있을 것이고 그저 흘러가는 세월에 육신을 맡기고 정신 편하게 사는 사람이지만 모든 단위의 조직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다수의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고상한 말로 표현하면 필부필부요 장삼이사이지만 세속적인 용어로는 개돼지라고 한다. 이들은 속절없는 절박함이 자신과는 상관없으니 관심있는 자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며 정치의 경우에 정치는 정치하는 놈들이 하는 일이니 자신은 알 바가 아니라고 애써 자위를 한다. 분명, 그러나 이들을 욕할 것까지는 없다고 본다.
셋째, 적당한 타협을 모색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타협은 사회생활의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선의와 타협을 하는 사람은 공동선을 위해 정열을 불태우겠지만 불의와 타협하는 사람은 일을 망치는 역할을 한다. 불의에 타협하는 사람은 사사로움에 발을 담그고 있거나 사회규범적으로 흠결이 있는 자들이다. 즉 타협이라는 반응을 통하여 속절없이 무너지는 자신을 지켜보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타협을 적당히 할만큼의 적당한 대가가 있어야하고 비굴과 배신이 동원된다.
안타깝지만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거대한 조직 안에서 위에 언급한 세가지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물론 어느 세상 어느 시절에 그러한 일이 없었을까마는 한 여인을 차갑고 비좁은 감옥에 가두어 놓고 벌어지는 작태에 나는 한 숨을 거둘 수가 없다.
그런데 인간세상은 다시 구분하여 아군이든 적군이든 불의에 타협한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아군의 불용은 그를 "집으로" 보낼 것이고 적군의 불용은 그를 "옥으로" 보낼 것이란 말이다. 지극히 식상한 말로 "토사구팽"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안타깝게 그에 휘말릴까?
그런데 그들이 지식을 배우고 지력을 쌓고 지혜를 구했던 곳이 높고 크다고?
새벽부터 뒤척이며 쓰고 지우고를 되풀이 하다 보니 동창이 환하다.
참으로 답답한 아침이 또 밝았다.
2017.10.21/흙은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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