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와 소크라테스]
아주 오래 전에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고향의 야산 기슭에서 땅 주인인 친구 분의 양해 아래 돼지막(豚舍)을 짓고 돼지를 키운 적이 있었다는 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불행히도 눈 내린 겨울날에 아버지는 밤길을 걷다가 낙상을 하여 다리가 부러져 입원을 한 사이에 돼지막에서 뒹구는 돼지들은 천덕꾸러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지나간 추억은 “돼지막”이라는 글에 자세히 반추되었지만 생각해보면 참으로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우리에게 교훈은 있다. 바로 돼지막을 그나마 수월하게 청소하는 방법이다. 즉, 돼지우리 하나를 완전히 비우기 위하여 우리 사이의 차단 문을 열고 돼지를 한 쪽 우리로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미련한 돼지들이 아무리 소리를 치고 빗자루로 내리쳐도 쉽게 다른 우리로 넘어가지 않는다. 이때 필요한 것이 구정물과 사료이다. 지금 같이 먹을 것이 흔한 시절이었다면 인가니 먹다버린 수박이나 참외껍데기와 복숭아씨 같은 영양가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먹이를 던져주었을 텐데 그리 보면 그 당시의 돼지들로 대한민국의 국민과 같이 낮은 GDP로 돈복지(豚福祉)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료에 구정물에 만족했던 것이다. 그래도 돼지는 인간에게 풍부한 삼겹살과 뼈다귀를 제공한 충직한 가축중의 하나이다.
나는 옆 칸 돼지우리의 먹이통에 사료를 넣어주고 구정물을 부어준다. 그리고 돼지들을 빗자루로 때려가면서 안내를 하면 그래도 수월하게 한 곳으로 돼지들을 몰아댈 수가 있었다. 한 줌의 먹거리에 혼비백산하며 옮겨가는 돼지들이 정말 고마웠다. 돼지가 다 옮겨가면 차단 문을 잠근다. 그 때부터 돼지들의 밀도가 높아져서 좁은 틈바구니에서 서로 부딪히며 자신이 더 많이 먹겠다고 울부짖고 꿀꿀대는 것은 돼지들의 문제이니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어서 빨리 분뇨 덩어리와 분뇨로 뒤범벅이 된 짚더미를 끄집어내고 물로 바닥을 닦아낸 다음 새로운 짚을 깔아준다. 쉽게 말해서 돼지들이 살던 세상을 천지개벽(天地開闢) 하듯이 확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바로 그 우리에 살던 돼지들에게 먹거리를 던져주므로 온통 신경을 다른 곳에 쓰도록 돼지들을 만족스럽고 웃게 만든 다음 내가 생각한대로 돼지들이 살아갈 보금자리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래도 나는 양심적이었다. 왜냐하면 돼지들이 살던 그 모습 그대로 해주었기 때문이다. 즉, 나는 그곳에 거드름을 피우는 수퇘지를 데려다 놓지도 않았고 바닥에 비단을 깔지도 쇠못을 뿌려놓지도 않았다.
갑자기 19세기를 풍미한 영국의 질적 공리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이 했다는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사람이 낫고, 만족한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라는 말이 떠올라 어느 자료를 찾아보니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다.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바보나 돼지가 다른 의견을 가진다면 이는 오로지 자기 입장으로만 문제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인간이나 소크라테스는 문제의 양쪽의 입장을 다 이해한다.(It is better to be a human dissatisfied than a pig satisfied; better to be Socrates dissatisfied than a fool satisfied. And if the fool, or the pig, are of a different opinion, it is because they only know their own side of the question. The other party to the comparison knows both sides.)”라고 소개가 되어있다. 우리는 이 말을 흔히들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스런 소크라테스가 되라”로 이해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합리적인 이성으로 늘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고 그래야 만이 보다 개선되고 발전된 역사 속에서 집단이 서식 가능하기 때문이다.
2017년 8월30일 세계일보 1면의 “뉴스분석”을 보면 “지출 늘리면서 ‘재정 건전성’ 지키겠다는 정부”라는 기사제목 하에 2018년의 국가예산이 429조원이라고 보도되어있다. 나는 확장 재정과 재정건전성에 대한 신문의 평은 언론의 수사(修辭) 같이 들린다. 그러면서 예산안의 현실성과 지속가능성이 문제라고 주장하며 1) 예산안의 총지출 증가율 7.1%, 9년 만에, 2) 보건·복지·노동 지출 증가율, 총지출 3분의 1 돌파(34.1%), 3) 사회간접자본(SOC) 예산 역대 최대구조조정(-20%)의 세 가지 특징을 기획재정부의 자료를 인용하여 보여준다. 사실 소모성 비용은 가급적 쓰지 않는 것이 돈을 버는 것이다. 동 신문은 2016년 세수가 전년도 대비 예측보다 20조가 더 징수되었다고도 보도를 하지만 우선 곡간에 쌀이 많다고 배부르게 먹다가 보면 흉년에 굶거나 굶어죽는 일이 발생한다는 말을 상기시켜야 할 대목이 상기 예산안의 특징 1)이기도 하다. 그리고 2018년에 예고되는 내용들을 생각나는 대로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시급의 대폭적인 인상, 장애인 연금 인상, 아동수당 지급, 기초연금의 증액지급, 건강보험의 보장률 제고 등등이 예산안의 특징 2)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들 ‘국민이 개돼지냐?’라고 반분하는 말을 듣는다. 이미 정치적으로는 개돼지가 되어버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흔히 들으니 차치하고 이러한 예산의 편성 및 운용이 국민을 개돼지로 만드는 일로 변질되지 않기를 절대적으로 희망한다. 이러한 급진저적인 예산의 성격 변화가 결과론적으로 돼지우리에 들어 있는 돼지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기 위한 엄청난 포벌리즘적 복지잔치가 아니기를 희망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예산의 성격 변화가 종국적으로 이쪽 우리를 치우기 위하여 저쪽 우리의 던져진 수박껍데기에 복숭아씨에, 사료 섞은 구정물의 역할로 추락한다면 그리하여 집중되어야할 소크라테스적인 합리적 이성을 마비시키고 온통 사회적 관심을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으로 돌리는 역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안타깝고 두려운 현실이지만 결코 일부나 적지 아니한 국민들이 우리 사회의 좌편향적인 선회나 친북적인 우회를 우려하고 있다. 우리 국민 모두가 어느 날 고개를 들어 맑고 드높고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허리를 펴서 조국의 산하를 돌아다 볼 때, 눈앞에 펼쳐진 조국, 대한민국의 모습이 우리가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그대로의 모습(the unique identity)일지 아니면 우리의 몸에 맞지 않는 정신적, 이념적 틀이 구성(the remodeled constitution)되어 있을지가 이 땅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운명이 될 것이니 말이다. 말 그대로 민소(民笑)냐 돈소(豚笑)냐 그것이 문제이다.
2017.08.31/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구하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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