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논조]
1년 전에 다친 팔꿈치를 진작 치료를 했어야 했음에도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가 분노의 함성을 외치다 보니 엄동설한과 삭풍의 봄을 지나 지금에 와서야 다시 치료를 시작했다. 그래도 나름대로는 긴 시간 동안 치료를 해도 가시지 않고 변화미세한 통증을 유발시키는 오묘하고 기묘한 팔꿈치 근육의 메카니즘에 사실 감탄을 한다.
그렇게 치료를 마치고 잠시 대기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한 잔 하며 보니 탁자 위에 D일보가 보이길래 세기의 재판이라 불리는 이재용 삼성 부회장에 대한 검찰의 구형에 대한 기레기의 논조가 어떤가를 보려고 사설 면을 들추었다. 그런데 그 논조는 잠시 뒤에 사무실로 돌아와 집어든 S일보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즉 검찰의 구형이 어떻든 법과 증거에 따라, 여론에 휘둘리지 말고 법리에 의거 판결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 달 25일에 법원의 판결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언젠가도 한 번 글을 써서 포스팅을 한 바가 있지만 과연 지금 공정한 재판을 할 만큼의 법관의 정의와 양심이 살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 이유는 다시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겠지만 대통령 탄핵의 가결, 대통령의 파면, 대통령의 구속, 대통령의 재판 과정을 보면서 이 부회장의 소환, 구속, 재판의 과정과 "재판 공동체"를 이루어왔으니 하는 말이다.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언론을 지칭하여 기레기라 부른다. 그것은 그들이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탄핵정국을 헤쳐나오면서 경험한 그들의 왜곡되고 편파적인 보도행태를 보면 기레기란 말도 과한 것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제도권 속의 언론인 신문과 방송을 외면하고 있다. 그들은 일인매체와 sns를 통하여 정보를 습득하고 그 정보로 세상을 바라다 본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의 취득절차와 소화과정은 건전한 사회를 건설하는데 치명적 독소가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자신과 동질 내지 유사 정체성 것만의 정보만 믿고 선호하며 결국은 편협된 세계관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원인은 공정하지 못한 언론이 만든 국민을 시대의 괴물체로 만들어 버린 곳에 있다.
각설하고, 오늘부터 판사들은 고민과 노동을 시작할 것이다. 온갖 법전에 쓰여있는 법리를 동원하고 판례를 끌어오고 시대의 흐름을 볼 것이다. 하지만 여론몰이에 의한 마녀사냥식 재판을 해서는 안된다. 바로 이점이 언론의 사설이 지적하는 논조이고 공정을 바라는 국민의 마음과 바람일 것이다. 나는 아직도 앞에서 본 두 신문의 논조를 반신반의 한다. 그 이유는 지난 엄동설한과 삭풍지춘의 황야에서 경험적으로 취득되어 버린 언론에 대한 불신이다.
하지만 그러한 언론의 교과서적 충언과 판사의 양심과 정의를 믿어보자. 재판과정을 생중계한다고 하지만 울타리 밖이나 광장에서 들려오는 군중의 함성소리를 판결에서 배제하고 법리와 공정을 딛고선 판결을 하기 바란다. 촛불에 휘둘려서 의사결정과 판결을 하니 작용과 반작용의 물리법칙에 따라 태극기 물결이 거리를 메우는 것이며 국민은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들의 앞에 한 여인이 저울을 들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당부한다.
시대의 지성과 양심이여~
기껏해야 죽기 뿐이 더 하겠는가?
2017.08.08/불로 붙이던 담배를 끊은 날
¤
'33-영등포의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인질과 희생] (0) | 2017.08.10 |
---|---|
[스크랩] 자본주의의 역사, 1500~2000, 미셸 보(Michel Beaud) 저/김윤자 역 제5장 대변혁/大變革(1914~1945)[2部 5章] - 2017.08.08(화) (0) | 2017.08.08 |
[스크랩] 자본주의의 역사, 1500~2000, 미셸 보(Michel Beaud) 저/김윤자 역 제2부 제국주의(帝國主義)에서 ‘세계화(世界化)’로[2부 4장] (0) | 2017.08.06 |
[스크랩] 자본주의의 역사, 1500~2000, 미셸 보(Michel Beaud) 저/김윤자 역 제1부 황금에서 자본으로 (0) | 2017.08.04 |
[스크랩] [부끄러운 자화상] (0) | 2017.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