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영등포의 삶

[스크랩] [TV문학관(文學館)과 토지(土地)]

영등포로터리 2017. 10. 24. 11:57

[TV문학관(文學館)과 토지(土地)]

나만의 생각일지는 모르겠으나 오래전의 이야기이지만 TV문학관을 보면서 느낀 것은 무엇인지 모를 또 어딘지 모를 안타까움, 메스꺼움, 안쓰러움, 속절없음, 비참함, 상실감, 박탈감 등과 같은 감정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것이 흑백(黑白, B/W) TV가 주는 독특한 향수(鄕愁) 같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컬러 TV가 나온 것이 1980년대 초로 기억이 되어 내가 본 TV 문학관(조선말기, 일제시대, 6.25사변 전후의 무지렁이 삶을 다룬 작품에 한하여 만들어진 작품들을 지칭함)이 그 이전인 70년대였던가 하고 생각하면서 그 기억은 내 삶의 시간축 상에서 혼란이 일었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니 1980년 12월18일 ‘김동리(金東里)’의 “을화(乙火)”가 첫 방영(放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에 컬러로 방영이 되었겠지만 흑백TV도 공용이 가능했으므로 내가 흑백TV로 TV문학관을 보았던 것일 게다.

그런데 지난 주말 밤에 2017년 11월의 개명천지(開明天地)와 같은 시대에 TV에서 ‘박경리(朴景利)’의 “토지(土地)”를 보았다. 이 영화가 언제 제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작품은 화려(華麗)한 컬러 영상이었고 고밀도(高密度, HD)의 디지털 영상이었기 때문에 내가 흑백으로 보았던 TV문학관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장편대하소설(長篇大河小說) “토지”는 ‘한말의 몰락으로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시대에 이르는 과정을 지주계층이었던 최씨 일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폭넓게 그려내고 있다. 지난 시대 한민족(韓民族)이 겪은 고난의 삶을 생생하게 형상화해 낸 점에서 <토지>는 역사소설의 규준에도 적응하는 것이지만, 근본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탐구로서 더 큰 성과를 얻고 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 느낌이 흑백으로 접했던 TV문학관에서 보면서 느꼈던 그 느낌 그대로였다. 즉, 무엇인지 모를 또 어딘지 모를 안타까움, 메스꺼움, 안쓰러움, 속절없음, 비참함, 상실감, 박탈감 등과 같은 감정이었다.

왜 그런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고 기이(奇異)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나에게 선뜻 와 닿는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잃어버린 잠이었기에 곰곰이 어두운 천정을 바라보면서 생각하여보니 우선 극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머슴과 종과 노비와 같은 하층민들로서 당시에 형성된 양반에 대한 신분적 충성심(忠誠心)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그에 편승하여 탐욕(貪慾)을 부리는 양아치 같은 주변인들과 비참(悲慘)하고 끝도 없이 착취(搾取)당하는 삶에 갈등(葛藤)하는 이 땅의 무지렁이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흑백의 향수로 바라다보든 고화질의 최첨단 컬러로 보든 그 느낌이 같은 것이었다는 말이 된다.

소설(小說)이든 드라마(drama)든 있는 이야기나 있던 이야기 그리고 있을 법한 이야기들을 주제로, 소재로 삼기 때문에 그러한 느낌을 주는 극의 시대적 배경이 대체적으로 일치(一致)하는 것이 있음을 본다. 주로 우리 근대문학의 배경이 조선말기, 일제시대, 6.25사변 전후라서 그럴 수뿐이 없는 정서(情緖)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도대체가 고즈넉한 시골의 풍경과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서정적인 삶보다는 끝도 없어 느껴지는 상실감과 박탈감은 무엇이고 가슴 저 밑에서 이글거리는 아픔과 분노는 무엇일까?

나는 매번 TV 문학관을 보면서 받아들여야 하는 그러한 느낌이 너무 애달파서 그 느낌을 소화(消化)시키기가 힘들다. 그러면서 또 그것을 보면 묘한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피학(被虐)에 의한 억지스러운 감정의 순화일 것이다. 슬픈 이야기이지만 이는 조선시대의 반상제도의 그리고 종모법에 의하여 이 땅에 넘쳐흘렀던 노비의 삶과 그들의 정서에 기인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관리를 대표하던 이 땅의 양반들과 그에 편승(便乘)한 양아치 무리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하층민들을 개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하면서 살아온 것인가? 일전에 문창극 총리후보자가 말한 “네 죄를 네가 알렸다”가 그것이라는 생각에 조금도 오차(誤差)가 없음을 확인한다.

우리의 근대문학(近代文學)에는 그러한 맥(脈)이 흐르는 것 같다. 아니 그 시대를 다룬 작품은 근대문학이든 현대문학이든 다 우리에게 부여하는 감성적인 고통은 마찬가지이다. 중학교를 다닐 때 읽었던 우리의 단편소설 모음집에 수록된 소설 대부분이 그런 감상을 나에게 주었다. 지금은 작품명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지만 평생 흙을 파먹거나 장돌뱅이로 돌아다니던 무지렁이의 피폐(疲弊)한 삶이 가져다 준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는 민족적 정서였다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사실 이 글은 박경리의 토지라는 작품에 대한 평은 아니다. 다만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만들어진 작품의 내면(內面)에는 우리만의 독특한 정서를 말함이라고나 할까? 조선시대의 양반(兩班)과 노비(奴婢)를 포함한 상민(常民)들과의 신분질서, 봉건가부장체제와 신분질서의 붕괴(崩壞), 경제학적으로 보아 자본, 노동과 함께 생산요소의 하나인 토지의 의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체제가 바뀌면서도 변함없이 가슴 속에 흐르는 껄적지근한 우리 민족의 정서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한(恨)일 것이다. 앞에서 말한 무엇인지 모를 또 어딘지 모를 안타까움, 메스꺼움, 안쓰러움, 속절없음, 비참함, 상실감, 박탈감 등과 같은 감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그 한이 아닐까한다. 그런데 그 한은 어디서 연유(緣由)되어 이 가슴에 흐르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흑백 화면이든 고화질 디지털 화면이든 TV화면에 비추어진 영상으로 보아 가난(艱難)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유래된 것이라 본다. 서평(書評)을 빌자면 작가는 “한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있는 정서가 아니라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근원적 모순에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한은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해 일어나는 슬픔이기도 하지만, 모순을 극복하려는 동기와 염원, 희구를 낳는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적 성격을 지닌다. 영원한 것은 추구하기 위해, 혹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이 풀어야 할 과제가 된다. 그러므로 이 한을 어떻게 승화시키는가 하는 문제는 작자에게 본질적 물음”이라고 말한다.

사실, 가난은 우리에게만 있는 독특한 사회현상(社會現象)은 아니다. 따라서 다른 나라에서도 가난에 의한 헝클어진 정서가 있을 것이니 우리의 이 한과 비슷한 것인지 거리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우리가 20세기 후반 들어 경제발전에 힘입어 세계 10위 정도의 무역 강대국이 되고 OECD에 가입된 G20 국가가 되어 상대적인 부국(富國)이 되었는데 그 한은 우리네 가슴 속에서 사라질 것인지도 궁금하다.

조금은 더럽지만 여기에 20세기 초에 이 땅을 덮쳤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에 의하여 나라는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나고 결국은 둘로 나뉘어 이별(離別)을 노래해왔고 그 노래는 지금도 지속되면서 온통 피 냄새 나는 싸움질과 갈등, 반목, 질시, 적의로 이어졌으며 그 끝이 어딘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북쪽에서 살아보지 못하여 알 수 없으나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이어지는 그들의 삶 역시 조선시대와 왜정시대를 겪으며 당해온 무지렁이의 삶과 다름없을 것이니 그곳도 여전히 마찬가지일 테고 반공(反共)과 산업화(産業化)로 무장한 대한민국(大韓民國) 역시 우리가 이룩한 세계 무역 강대국으로 부상하였지만 무엇인지 모를 또 어딘지 모를 안타까움, 메스꺼움, 안쓰러움, 속절없음, 비참함, 상실감, 박탈감 등과 같은 감정을 우리는 버릴 수 있을 것인가?

2017.10.24/불길이 타오르면 너무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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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돌고도는 영등포 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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