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례(主禮)]
주례(主禮)라 함은 “결혼식(結婚式)을 주재하여 진행함. 또는 그 사람”이라고 국어사전(國語辭典)에 정의(定義)되어 있다. 말하자면 주례는 사회자(司會者)와 호흡(呼吸)을 맞추어 신랑신부(新郞新婦)가 들어오면 그들을 맞아 예식 자체의 진행을 해나가면서 새로 출발하는 신랑신부에게 삶의 기반이 되는 모범(模範)의 말을 전해주며 그들의 앞길을 축원(祝願)하여 주는 역할(役割)을 하는 존재이다. 간혹 젊은 사회자가 “주례”를 “주례사”라고 호칭(呼稱)하여 ‘주례사님의 고매하고 훌륭한 말씀을 듣겠습니다!!!’라고 진행 멘트를 날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국어생활(國語生活)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사회자로서 매우 조심하여야 할 일이다.
그런가 하면 요사이는 주례를 별도(別途)로 세우지 않고 신랑의 아버지가 아니면 두 아버지들이 번갈아 삶의 자양분(滋養分)이 되는 자신의 경험(經驗)을 들려주는 형식(形式)도 종종 보여 진다. 흔히들 결혼식을 거행(擧行)하는데 있어서 신랑신부의 어머니들은 예식 전에 나가서 촛불에 점화(點火)하는 화촉(華燭)을 밝히는 일을 하고 신부의 아버지는 신부 입장 때에 딸의 손을 잡고 웨딩마치(wedding march)에 맞추어 걸어 들어가 사위에게 딸을 인수인계(引受引繼)하는 역할이라도 있지만 신랑의 아버지는 결혼식에서 전혀 할 일이 없다고 하여 아마도 나름대로 역할을 만들어준 것일 게다. 하지만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형식은 역시 인격이 고매하고 사회적인 지위(地位)가 있는 어른으로 하여금 그 역할을 정중하게 요청(要請) 드리는 것이다.
주례의 사회적인 지위는 우리나라 사람들 같이 체면(體面)과 명분(名分)을 중시하는 의식구조(意識構造) 내에서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인(政治人), 교수(敎授), 은사(恩師) 등 사회적인 명망(名望)이 있거나 신랑신부가 존경하는 분들에게 그 역할을 의뢰(依賴)한다. 나 자신도 내 고향의, 즉 아버지와 정치적 동지(同志)로서 같이 오랜 기간을 함께 해온 정치인으로 다선 국회의원(國會議員)을 지낸 ‘안동준’ 의원님을 주례로 모셨다. 물론 아버지의 당연한 강추(强推)였다. 그런가 하면 내가 사회자로 역할을 했던 친구 ‘박남기’의 결혼식에서는 대학 은사인 ‘박한규’ 교수님을 주례로 모셨고 이제 나이가 들다보니 형제(兄弟)들도 대학교수가 되어 형은 형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자신들이 가르친 제자(弟子)들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보는 것을 목격(目擊)한 바가 있다. 어디 그뿐이랴!!! 교수가 된 나의 친구들도 자신들의 제자들을 위하여 주례의 역할을 열심히 하고 있음을 본다. 물론 나 역시 내 딸의 결혼식 주례로 서울특별시의회 제7대 의장(議長)을 역임한 ‘김기성’ 의장님을 주례로 모셨다. 이는 아마도 삶의 반석(盤石)이 되고 지표(指標)가 될 주례사를 인품이 고상(高尙)하고 사회적인 높은 지위의 인물이 해주는 것을 마땅하다고 느끼며 자손들의 행복(幸福)한 삶을 기원하는 부모(父母)의 애틋한 마음이 반증(反證)된 결과라 할 것이다.
나에게도 주례를 설 수 있는 기회(機會)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선출직(選出職)으로서 공직(公職)에 근무할 때에 지역구 주민(地域區 住民)의 부탁을 받았던 기회인데 나는 주례를 선다는 마음에 가슴이 부풀고 설레었던 기억(記憶)을 갖고 있다. 그때만 해도 여러 차례의 주례를 서본 경험이 있는 동생에게서 주례사(主禮辭)의 원고(原稿)를 받아 연습도 하면서 마치 예비고사(豫備考査)를 보러 시험장(試驗場)에 들어가는 고등학교 3학년생 같은 긴장감(緊張感)도 가져보았다. 하지만 설렘에 내가 선출직이라는 사실을 망각(忘却)하고 있었다. 순간 ‘아차~ 이게 아니구나!!!’ 싶어서 나는 관할 선거관리위원회(管轄 選擧管理委員會)에 정식으로 질의(質疑)를 하였고 그에 대한 답변을 받았는데 답변의 내용인즉 지금의 기억으로 “해당 지역구 주민으로부터 선출직으로서의 사전선거운동의 민원(民願)이 제기되는 경우에 그것이 아님을 입증(立證)할 것”이었던 같다. 하지만 해당 지역구 주민이므로 정치적인 성향(性向)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민원제기가 있다면 아니 될 것 같다는 주변인(周邊人)들의 조언에 따라 주례 직분을 사양(辭讓)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 그것이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얼추 10년이 흘렀다. 지금은 공직은 떠났지만 그 사이에 나이도 들어 세상에 나와 한 바퀴를 돌고 돌아 이제 제법 어른인가 하는 마음도 들고, 만학(晩學)의 길이었지만 학업을 지속(持續)한 덕에 소위 박사(博士)라는 칭호(稱號)도 얻었고 지금은 대학의 강단(講壇)에 서서 젊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敎育者)의 길을 걷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 세월 동안에 나는 공교롭게도 내가 젊은 한 쌍의 부부를 위하여 주례의 자리에 서기 위한 나름대로의 기준을 설정(設定)해 놓고 있었다. 그 기준은 외적인 것이 아니고 다분히 내적인 것에 의하며 나의 양심(良心)에 관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약 1주일 쯤 전에 신랑이 될 젊은 지인으로부터 그 부탁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나의 기준에 의하여 그 직분을 고사(固辭)하고 말았다. 사실 기준이라고 하는 것도 시류(時流)를 생각하면 변화하는 것이고 양심이라고 하는 것도 상황(狀況)에 따라 유동적(流動的)일 수 있는 것인데 순간 망설였던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젊은 신랑신부는 지난 1년 동안 나에게 신선한 충격(衝擊)을 주었고 대통령 탄핵(大統領 彈劾)의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차고 축축한 아스팔트(asphalt) 위에서 같이 희망(希望)과 감동(感動)과 열망(熱望) 그리고 분노(憤怒)와 회한(悔恨)을 안고 많고 많은 군중(群衆) 속에서 기쁨과 슬픔의 눈물을 흘렸던 동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음은 그들이 서있던 단상(壇上)의 앞에서 앞날의 행복을 빌고 있었는데 몸은 태극기(太極旗)를 들고 차고 매섭던 칼바람을 이기고 구란(狗亂)에 맞섰던 동지들과 원탁(圓卓)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그들이 원했던 역할을 내가 수행(遂行)해주지는 못했지만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나는 그들의 행복과 발전을 기도(祈禱)하고 있으며 그것은 나의 진심(眞心)이기도 하다.
간단하게 말해서 나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인생의 새 출발을 위하여 첫발을 내딛는 그들을 위하여 모범(模範)이 될 만한 삶을 살았다는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리 엄격(嚴格)한 기준도 아니지만 달리 보면 내가 살아오면서 지켰어야 할 첨예(尖銳)한 나만의 가치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살아오면서 세상을 공포(恐怖)로 보았고 늘 확신(確信)이 없었으며 우유부단(優柔不斷)하여왔고 인생의 그늘을 벗어나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지만 아직도 그늘 속에 있다는 나만의 판단에 의한 것이다. 물론 그 기준을 벗어나 멋있고 근사(近似)한 주례사로 포장(包裝)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그러한 시도(試圖)를 하지 않고도 그 역할을 해줄 훌륭한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는 아직 그 기준 속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것을 내 양심에 관한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나의 양심선언(良心宣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즈음 날이 선선하니 다시 우울(憂鬱) 속으로 내가 들어간다.
아니라고 애써 웃음 짓고 술 한 모금 입에 담고 자신을 합리화(合理化) 시키느라 나 자신에게 처절하리만큼 저항(抵抗)을 해보지만 역시 나는 내가 세운 그 기준 안에 아직 있을 뿐이다.
그저 이것이 나의 주례에 대한 변(辯)이라고나 할까?
https://youtu.be/v7qn6lMuATI
2017.10.23/달이 자꾸 바뀌다보면 나도 바뀌겠지...
¤
'33-영등포의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부러진 헤드폰] (0) | 2017.10.24 |
---|---|
[스크랩] [TV문학관(文學館)과 토지(土地)] (0) | 2017.10.24 |
[스크랩] [아이스크림/Ice Cream] (0) | 2017.10.22 |
[스크랩] 유브 갓 메일(You`ve got mail)~!!! (0) | 2017.10.22 |
[스크랩] [짜빠게티] (0) | 2017.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