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의 가로수]
가을의 서울거리를 걷거나 운전을 하고 지나치다가 보면 매우 낭만적(浪漫的)인 그러나 애절(哀切)한 노래가 하나 떠오른다. 그것은 청아(淸雅)한 목소리로 젊은이들의 심금(心琴)을 울렸던 왕년(往年)의 가수 박인희(朴麟姬, 1945년 ~ )가 부른 “끝이 없는 길”이다. 1970년대 대표적 통기타 가수 중 하나였던 그녀의 차분하고 영롱한 음색의 이 음악을 듣다가 보면 머릿속에는 이제까지 삶의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보아온 ‘가로수가 늘어진’ 여러 모습의 길이 밤거리에 외롭게 서있는 주마등(走馬燈)처럼 나의 뇌리(腦裏)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녀의 음악은 비단 이 노래뿐만 아니라 〈목마와 숙녀〉, 〈모닥불〉, <방랑자>, <세월이 가면> 등 모두가 세파에 파묻혀 잠들어 있는 우리의 애달픈 감성을 끄집어내어 모두의 가슴 앞에 펼쳐준다. 그러면 나는 그것을 이 가을날 가뭄에 메말라 부우연 먼지가 이는 아스팔트 위에 내팽개친다.
“길가에 가로수 옷을 벗으면
떨어지는 잎 새 위에 어리는 얼굴
그 모습 보려고 가까이 가면
나를 두고 저 만큼 또 멀어지네~
아~ 이 길은 끝이 없는 길,
계절이 다 가도록 걸어가는 길
잊혀 진 얼굴이 되살아나는
저만큼 의 거리는 얼마쯤일까
바람이 불어와 볼에 스치면
다시 한 번 그 시절로 가고 싶어라
아~ 이 길은 끝이 없는 길,
계절이 다 가도록 걸어가는 길”
내가 1974년이 되어 대학에 입학하면서 시작되었던 자취생활이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형이 군에 입대를 하면서 나 홀로 자취방에 남게 되었고 그 방은 모든 사람들의 정거장(停車場)이 되어버렸다. 비록 냉골의 방이었지만 당시에 “서울살이”가 힘겨웠던 나와 형의 친구들에게는 그나마 편안한 안식처였다. 하지만 그 삶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 될 수뿐이 없었다. 담배연기 찌든 방에는 담뱃재와 냄새 나는 빨랫감이 구르고 추운 겨울에 때라고 사놓은 연탄 무더기는 귀찮다는 이유로 쓰지도 않고 냉방에서 한 겨울을 나는데도 하나둘씩 없어져서 바닥이 나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속이 상해서 자취방을 정리하여 당시의 서울 시내에 있었던 단 하나의 혈육이었던 이모에게 나를 맡기면서 마치 여관방 같던 방 2개를 용두동에 전세로 마련해주었다. 그때가 1976년이었는데 아마도 내 기억에 창신동이 재개발을 위하여 철거가 되면서, 많은 이주민들이 생겼고 이들이 방 하나를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을 따는 일 같이 어려웠었다.
그렇듯 이모의 삶 역시 나로 인하여 편히 몸을 누일 거처를 마련했다는 것 외에 팍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모부는 지하철 1호선의 공사가 다 마무리되어 실업자가 되어 인근에 있던 목재 제재소에 일용직으로 나가 일을 했고 이모는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있는 큰 딸과 둘째 딸인 간난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두 분이 금슬이 그리도 좋았는지 그 후로도 네 딸을 더 낳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모와 이모부는 정말로 나라에서 상을 내려야 할 애국자이다. 그런데 당시의 전세주인은 전기세를 어떻게 관리했는지는 내가 책을 본다고 밤늦도록 전등을 켜고 있으면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전기차단기(일명 두꺼비집)를 내려버리고는 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이모부는 화가 나서 학생이 공부를 못하게 전기를 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주인에게 항의를 했다가 우리는 주인에게 괘씸죄에 걸려 방을 내놓고 나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이는 무지막지한 횡포로서 “집주인의 갑질”이지만 당시에는 아야 소리도 못하고 봄날이 막 익어갈 무렵 우리 다섯 식구는 길거리로 쫓겨나고 말았다.
나야 아침에 이모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학교에 가면 눈에 보이지 않아 그만이지만 이모는 핏덩이를 등에 업고 통지된 날 이전에 새로운 방을 구하느라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나는 이 당시에 이러한 테두리에서 삶을 어거지로 꾸려가던 이모와 집안 아저씨, 집안 형, 동생들을 즉 피붙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참으로 없는 이들의 설움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기에 이 시대에 헬조선이나 무엇이니 하는 말들이 나는 가슴에 와 닿지를 않으며 내 양심상 그들의 불평불만에 동의할 수가 없다. 당시의 나는 시골에 계신 부모님의 지원이 있었기에 그러한 삶에 익숙하지가 않았다. 하여튼 이모는 한정된 전세 반환금을 갖고 방이 두 개 있는 전셋집을 구하려고 했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철거민들의 증가로 전세 보증금이 치솟아 방 두 개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니 힘겹게 방 하나를 구했고 우리는 모두 그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은 마당이 있고 마당 한가운데 공동수도꼭지가 하나, 삽짝 옆에 공동화장실이 하나 있었다.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방이 5~6개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리고 약간 신기하기는 하였지만 1976년도의 서울시내 한 복판에 우리가 들어간 방의 지붕은 초가지붕이었다. 이모부는 25도짜리 소주를 한 병 사오면 공기 두 개에 나누어 따르고 깡소주로 나와 같이 한 숨에 다 들이키는 것을 좋아했다. 그냥 그러한 것이 당시에 가진 것 없는 서민의 삶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그러한 삶을 내가 소화시키기에 너무 힘들어서 책상에 걸터앉아 고개를 파묻고 나는 울고 있었다. 아마도 그 삶이 힘들어서 내가 불평을 했는데 그렇다고 무엇을 어찌 할 수 없는 이모는 나에게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라는 의미에서 나를 질책하였던 일로만 기억이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나이 22살의 어린 아이였다. 나는 얼굴에 눈물이 범벅이 되어 울면서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나는 당시의 삶이 끝이 없는 것 같이 느껴졌었다. 나도 모르게 흐느끼면서 부른 노래가 바로 박인희의 “끝이 없는 길”이었다. 나의 그런 뒷모습을 보고 이모는 ‘에이구~ 철딱서니 없는 놈!!!’하고 말을 했지만 그런 조카를 바라보는 이모도 지친 세월만큼이나 만고풍상(萬古風霜)으로 깎여나간 마음으로 아마 울고 있었을 것이다.
끝이 없을 것 같은 “길가의 가로수”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추억의 길이 있다. 그곳은 내 고향 증평에 있는 길이다. 지금은 도로가 왕복 4차선 이상으로 확장이 되고 교통량이 치솟아 지난날의 낭만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곳은 우리가 흔히 “청주땅”이라고 불렀던 곳의 도로이다. 증평에서 청주 쪽으로 가기 위하여 도심을 벗어날 무렵부터 북이로 넘어가는 고개가 시작되는 지점까지의 길이다. 이 길은 내 기억으로 1972년경에 아스팔트 포장이 되었다. 길가의 양쪽으로 식수를 언제 했는지는 모르지만 전형적인 신작로(新作路)의 모습이었다. 2차선 비포장도로 양쪽에 생각만 하여도 시원하고 훤칠한 포플러 나무가 1킬로미터 정도 직선으로 서있었다. 그래서 길이 시작되는 이쪽 끝에서 보면 저쪽 끝이 하나의 초점이 되는 대각선 구도(對角線 構圖)의 교과서 같은 길이었다. 그 도로 위로 버스 한 대가 달려가면서 뽀오얀 먼지를 일으킨다. 그리고 그 먼지 속에서 치마저고리를 입은 한 여인이 아이를 등에 업고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그 흙먼지가 가시고 다시 맹꽁이 트럭이 지나면서 먼지를 일으킨다. 여인은 땀으로 온몸을 적시고 아이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땀으로 적셔진 엄마의 저고리에 코를 박고 잠을 잔다. “갈 때에도 십리길, 올 때에도 십리길”이라는 배호의 노래가 웅변하듯이 어머니의 터덜거리는 발길 리듬에 맞추어 아이는 잠을 잔다. 어머니는 버스가 오지 않나하고 자꾸 뒤를 돌아보지만 지나가는 것은 군인을 잔뜩 실은 군용트럭이다. 그리고 그 흙먼지는 다시 어머니와 아이를 덮어버린다. 생각해보면 정말 가슴 저미는 “끝이 없는 길”이다. 길가의 가로수는 나를 두고 저만큼 또 멀어질 뿐이다. 엄마의 터덜거림 속에서 잠을 자는 아이는 “나”고 나를 업은 어머니는 결핵(結核)으로 관절염(關節炎)을 앓는 해서 네 살이 되도록 걷지를 못하는 아이의 다리를 고치기 위해 청주에 있는 외과의원을 가다가 아이의 다리 X-ray 필름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깜빡하여 버스를 타고 나가다가 다시 버스에서 내려 필름을 가지러 집으로 걸어오고 있는 중인 것이다.
최근에 출근을 하다가 보면 구로동으로 가는 디지털로 대림동 구간에서 가로수 교체 작업이 한창이다. 대림1동 구간은 은행나무로 가로수가 식수 되어 계절이 조금 더 가면 노란 은행잎이 만발한 거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대림2동 구간은 플라타너스 나무가 식수되어 있어 전반적으로 거리가 어둡고 봄에 날리는 솜털 같은 꽃가루가 주민들의 건강에 좋지 않고 가을에 지는 낙엽은 더 이상 오밀조밀한 도시의 낭만이 되지 못한다. 교체된 가로수 덕에 도로 전체가 밝고 전선이나 간판을 가리지 않아 도시미관에도 좋아 보인다. 지금부터 약 10년 전에 내가 공직에 있을 때, 이 지역의 가로수를 교체하려고 예산을 확보하였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 모 지역의 가로수를 소나무로 모두 교체하는 바람에 재선충의 피해도 염려가 되고 소나무가 가로수로 적절한 수종인지에 대한 갑론을박(甲論乙駁)이 일어 왜 멀쩡한 가로수를 베어내느냐는 여론에 의하여 예산이 가로수 교체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지역 녹화환경을 조성하는 용도로 전용된 적이 있었다. 이제는 그러한 이견과 여론이 조정되고 조성이 되었는지 가로수가 모두 교체되고 있음을 본다. 어떠한 일이든 주민들이 모두 찬성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사업이 진행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이제 모두가 좋아하는 쾌적한 가로수 그늘 아래에서 마냥 즐거운 일만 있기를 바라며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를 보면서 더 이상은 끝이 없어 보이는 가로수 아래에서 가슴 저미고 서글픈 이야기가 우리에게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https://youtu.be/bXcZJjG6Zsk
2017.09.17/해가 맑은 날의 디지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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