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영등포의 삶

[스크랩] [국립극장]

영등포로터리 2017. 8. 15. 14:51

[국립극장]

1974년 8월15일!!!
대학을 입학한 후에 첫 방학이라 그저 나는 고향집에 가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에 맞이한 광복절의 아침이다. 우리 가족은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하여 밥상 주변에 둘러 앉아 아버지께서 수저를 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인지 모를 무거운 분위기가 감도는 것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가 밥상 주변에 둘러앉은 우리를 보고 아주 어렵게 입을 여시는 것이었다.

“잘 들어라. 어제 엄마가 할머니를 모시고 증평 성당 메리놀 의원을 다녀왔는데 할머니가 암(癌)이라고 한다. ... 모두들 마음을 단단히 먹기 바란다.”
어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암이라는 병은 곧 불치(不治)의 병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의학이 발달한 요즈음도 생명을 한시적으로 연장하는 것이지 그 암은 여전히 불치의 병인 것은 변함이 없다. 침통한 얼굴의 아버지는 말없이 수저를 놓고 나가셨고 집안 분위기는 무겁게 내리 앉았다. 그렇게 1974년 8.15 광복절의 아침은 적막하게 흘러갔다.

그 이후 아버지께서는 어머니로 하여금 자궁암(子宮癌)의 진단을 받은 할머니를 모시고 청주에 있는 모 산부인과를 다녀왔지만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께서는 그래도 믿을 수 없다며 서울 을지로 6가에 있는 국립의료원으로 할머니를 다시 모셔보았지만 결과는 변함이 없었다. 내가 옆에서 보아도 아버지는 참 효자이셨다. 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하여 그해 겨울 방학 내내 나는 할머니와 같이 잠을 자면서 병관을 해드렸지만 할머니께서는 음력으로 다음해 2월28일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는 날이 양력으로 4월초였는데 꽃피고 좋은 계절이었지만 서울에서는 긴급조치 9호로 인하여 정국과 대학가가 참으로 을씨년스럽고 어수선하였다.

각설하고 시간을 다시 1974년 8월15일로 돌려 보자. 침통했던 집안의 분위기가 좀 가실만한 무렵에 12인치 흑백 TV로 서울의 국립극장에서 진행이 되고 있는 광복절 기념식을 보고 있었다. TV 화면 속에서 보는 기념식장은 엄숙했고 장엄했다. 왜냐하면 이해 8월15일은 일제의 압박과 설움에서 우리 한민족이 벗어난 29주년 광복의 날이기도 했지만 건국 26주년의 기념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식순에 의해 기념식이 진행되고 있었고 순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광복과 건국의 기념사를 하는 순간이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TV화면이 꺼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당시만 하더라도 총소리가 귀에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무슨 소리가 들리기는 한 것 같은데 화면이 꺼져서 나는 순간 정전을 의심했다. 하지만 방안을 밝히고 있었단 형광등은 그대로 켜져 있었다. 이것이 무슨 일이지 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다시 박대통령의 모습이 보이고 기념사를 마무리 짓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무엇인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고 이어지는 TV 화면으로부터 기념식장인 국립극장에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괴한의 총에 피격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육여사는 괴한의 흉탄에 의하여 유명을 달리했고 나라는 온통 분노와 슬픔에 잠기고 말았다. 그 후에 밝혀진 것들이지만 그 괴한은 ‘문세광’이라는 자였고 북의 지령에 의하여 움직인 자라는 것이 밝혀졌다.

일전에 자유총연맹을 갈 일이 있어 일을 마친 뒤에 맞은편에 있는 국립극장 앞을 가서 43년 전에 펼쳐졌던 역사의 한 단면이 서려있는 그 현장을 바라다보았다. 태양이 작열(灼熱)하는 정오쯤이었는데 그날도 8월의 뜨거운 하늘이 하루하루가 숨 가쁜 조국의 산하 위에 펼쳐졌으리라!!! 지금은 그런 것이 무엇이더냐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릴 한 장의 역사적 현장으로 받아드려질지는 모르지만 당시는 남과 북이 체제경쟁(體制競爭)을 하느라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한 것을 돌아다 볼 겨를이 없던 시대였다. 지금은 이미 사라진 제3세계라는 말과 함께 제국주의와 국가주의의 상징으로 세계를 반분하던 소련이 붕괴되고, 6.25 사변을 통하여 적의 위치로 자리매김했던 중국이 사회주의 노선을 벗어던지며 1992년 수교와 더불어 돌아와 개혁개방의 기치를 삼아 시장경제 체제로 점점 변모해가고 있다. 하여튼 세상은 바뀌었고 국립극장은 그날의 충격과 아픔을 기억하는지 못하는지 알 수 없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그 자태로 서있는 것이다. 이르기는 하지만 육여사의 명복을 신실한 마음으로 빌고 그 시대적 안타까움에 몸서리를 떨어본다.

돌이켜 보니 이날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날이기도 하다. 육여사의 서거로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시승하기로 계획되었던 이날의 행사는 무산이 되었지만 지하철 1호선의 개통은 예정대로 진행이 되었다. 지하철 1호선은 서울역과 청량리역을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철이었다. 지금이야 토목기술(土木技術)이 발전하여 지하에서 대규모 공사를 하는지 안하는지 구분도 안 되지만 그 때는 도로 가운데를 절개(切開)하여 흙을 퍼서 도로 옆에 쌓아놓고 광범위한 절개가 필요한 곳에는 복공판(覆工板)을 깔아놓고 그 속에 벽돌을 조적(組積)하고 콘크리트를 부어 구조물을 만든 다음 다시 되 덮고 되 메우기를 하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1호선의 구간은 청량리와 서울역이었지만 수도권의 철도가 전기로 움직이는 공사가 함께 진행되었던 것이니 인천과 수원에서 의정부로 연결되는 수도권 전철 시대를 열게 된 것이 지금의 거미줄 같은 수도권의 대중교통망이 현대화 되는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2학기 개강을 하여 서울에 와서 들은 이야기지만, 1974년 8월15일 지하철 1호선이 개통 된지 얼마 되지 않아 몇 명의 개구쟁이 친구들은 그 전철이 너무나도 신기하여 표를 한 장 끊어 가지고 서울역과 청량리를 수십 번 왕복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청량리역과 서울역의 역사만이 상하행선을 같이 타는 승강장 구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흔히 사람들에게 지하철 1호선과 다른 지하철 2,3,4,5,6,7,8호선과 크게 다른 점을 퀴즈로 물어본다. 하지만 그것을 맞추는 사람들은 거의 보지 못했다. 물론 전력 공급방식도 다르지만 그런 것은 지하철 4호선에서도 볼 수 있으니 정답은 아니다. 정답은 통행방식이다. 지하철 1호선은 국철과 연결이 되니 좌측통행을 한다. 예를 들어 4호선 같은 경우도 국철과 연결이 되지만 지하철 구간으로 접속되는 지점에서 좌우의 통행방식을 지하에서 변경한다. 1970년대의 토목기술과 예산이 지하철 1호선에서 그것까지 감안하기에는 역부족이 아니었나 싶다.

오늘은 광복 72주년과 건국 69주년이 되는 기쁨의 날이다. 많은 시간이 지나 세상은 판이하게 변해갔지만 여전히 육중한 자태로 버티고 있는 국립극장을 생각하며 지난 날의 격동하는 시대적 사건을 생각해보았지만 남과 북이 대치하였던 이념적 전쟁터에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음을 보고 있다. 오히려 언제나 국가안보에 위협적이던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하고 무장하여 그 때보다 더 육중하고 무시무시한 에너지로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혹자는 핵무기 앞에서 대화를 주장하지만 대화란 상호 간에 힘이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 가능한 교제의 방법이다. 힘의 균형이 깨지면 대화도 평화도 분명히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은 백성의 기본적인 삶을 희생하면서도 비대칭 전력(非對稱 戰力)을 키워온 것이다. 하지만 작금에 그에 더하여 걱정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내부에 꿈틀거리는 친북의 준동(蠢動)이다. 아니 친북의 준동이 아니라 그 단계를 넘어서서 70여 년 전에 세운 이 나라의 헌법적 가치를 손상시키려는 몸부림이 보인다. 지나 간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노력 그리고 희생으로 다져오고 세워온 이 땅의 가치를 훼손해서는 아니 될 일이건만 국민의 선택은 어딘지 모르게 개운치가 않았다.

과연 이 나라 역사의 물꼬가 어디로 틀어질 것인가?

2017.08.15/불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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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돌고도는 영등포 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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