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과 경조사비]
천고마비의 좋은 계절이 되니 지난 봄에 못지 않게 청첩이 날아든다. 그런가 하면 더운 여름을 버티지 못하고 연로하신 어른들이 유명을 달리했다고 부고 또한 즐비하다.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이에 대응하려고 하다가 보면 그 경조사비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느낄 것이다. 혹자는 월 백만원이 넘는 경조사비를 지출할 때가 있어 종종 허리가 휜다고 한다.
내 어렸을 때는 "가정의례준칙"이라는 것이 있었다. 어렸을 때였으니 당시 어른들의 경제적 실상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짐작컨데 지금 같이 혼례나 장례시 사적으로 부조하는 것이 벅차게 느껴지고 공적이나 사적인 행사에 행사장 입구에 늘어서는 화환을 보며 이것은 미풍양속의 범주를 벗어난 허례허식이라고 하여 일종의 사적이든 공적이든 지출을 줄이고 그것을 이용하여 저축을 유도하고 그 힘을 국가재건의 원동력으로 삼고자했던 시대적 지혜가 아니었나 생각이 된다.
진실로 생각컨데 이러한 소비의 관행을 법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우니 법률이 아닌 준칙으로 약간은 느슨한 구속력을 갖고 무분별한 소비관행을 적정한 선으로 조절하려고 했던 것이었다고 본다. 굳이 전자공학적으로 해석을 하자면 밴드패스필터(BPF, Band Pass Filter)로서 하부적으로 특정대역 이상부터 상부적으로 특정대역까지만 통과시켜 다음 단계로 신호를 전달하는 방식의 정책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 생각해보니 궁핍했던 시기에 푼돈을 저축이라는 댐을 이용하여 큰 자금으로 만들고 홍수 같이 넘쳐나는 부적절한 소비관행을 역시 그 댐으로 막아 필요할 경우에 수문을 열어 방류하므로서 예측불허의 재난을 막아내는 지도층의 혜안이 경제적 봇물관리에 동원되었던 것이었다고 본다. 그 당시가 1970년대로 기억이 되는데 고도의 경제성장이 진행되던 때였는지라 벌어지는 빈부의 격차에 정책적 제동을 거는 제어장치였다고 본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연평균 10~20%의 고도성장을 하던 시기였지만 빈부의 격차가 있기는 했어도 지금 같이 무차별적이고 잔인한 양극화 현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때는 예식장을 가면은 하객들에게 답례품이라는 것이 있었다. 있는 집에서야 커다란 호텔을 빌려 혼례를 치르고 답례품을 나누어 주는 것이 어렵지 않았겠지만 하객들의 축의금을 이용하여 행사를 치러야하는 일반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그 답례품을 준비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서민의 입장을 반영하여 그 준칙은 답례품 제공을 금지시켰다. 차마 체면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돈을 써야했던 혼주는 깊은 한 숨을 돌렸던 것이다.
지금은 그 흔한 화환도 생화를 쓰면 비싸니 종이로 만든 화환으로 대체하였다. 당시 꽃을 갖고 화환을 만들던 업자는 생화환 대신에 종이화환을 제작하는 식으로 화환제작 방식을 변경해서 그에 대처를 했으면 꽃을 생산하는 화훼농가를 위해서 당시 정부는 꽃을 해외로 수출하는 작업에 모든 정책적 수단을 강구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이는 국가경제가 어려웠던 시기에 난마를 풀어헤치며 좁은 땅덩어리를 꽉 채운 수천만의 국민을 이끌고 나가던 지도자들의 직관적 혜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우리는 풍요라는 21세기적 시대를 맞아 "헬 조선"을 외치는 희안한 삶을 살고 있다.
절대빈곤이야 당연히 국가와 사회가 구제를 해야하겠지만 아무리 풍요로워도 피할 수 없는 상대적 박탈감은 법률에 의한 정책적 통제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온 국민이 알아야 한다.
일전에 김영란 법이 시행되면서 어느 여선생께서 꽃으로 만든 카네이션은 동법을 위반한 것이고 종이로 만든 카네이션은 위반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교육자로서 비참함을 느끼는 듯 세상을 개탄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것을 보았다. 진정코 나는 그 선생의 개탄에 개탄을 금치 못한다. 그것이 그렇게도 억울하고 속이 상했을까?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진실로 자정능력을 상실한 집단임에 틀림 없다.
이는 법에 의한 잣대를 눈치볼 것이 아니고 주는 입장보다 받는 입장에서 먼저 마음의 정리를 하여 공표를 해야한다.
시국사건임나면 앞다투어 성명을 내고 기자회견을 자청하는 지성이라는 집단은 지금 몇 푼의 코묻은 돈부터 짭짤한 금전 앞에서 세속적으로 침묵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혹자는 불평불만을 하고 구차한 반발을 하고 있다.
오늘도 토요일인지라 경향각지에서 혼사가 있고 고향에는 친구부친의 초상이 났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절제를 하자.
상부상조를 해야하는 가족친지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친구든 손님이든 만나면 6천원 정도의 식사를 하고 3천원의 소주를 한 잔 하자. 그래야 골목이 살아난다. 과도한 선물도 주고 받지 말자. 촌지라는 봉투도 서로 체면 운운하며 건네지 말자. 그래야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에서 온 국민이 벗어날 수 있다. 더구나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5만원을 넘는 부조금을 건네지 말자. 아니 더 가진 자는 오히려 자꾸 내어놓고 베풀며 그렇게 베풀고 봉사하는 사람에게는 사회적 포상을 수여하자.
하지만 이는 그냥 될 일이 아니다. 지극히 교과서적인 이야기지만 모두가 도덕심을 회복하기 전에는 정말 힘든 일이다.
그 일을 정녕코 누가 어디서 어떻게 먼저 시작해야할 것인가?!
2016.10.15/흙을 밟고 달밤에 체조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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