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정치 & 사회

[스크랩] 나는 恨을 풀어드려야 한다

영등포로터리 2011. 12. 27. 08:50

오늘 2011년 12월 23일 새벽에 눈을 떴다.

영하 11도의 추운 날씨 덕에 방안의 공기가 차갑게 느껴지는 한기에 잠이 깨어 이리 저리 뒤척이며 지난 시간을

생각하니 모든 추억이 주마등 처럼 뇌리를 스친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술에 취하셔서 "내가 졸업장 한장 만 있었으면..."하고 한탄을 하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서 대의원을 뽑는 정치행위가 있었고 전국에서 뽑힌 대의원들은 장충체육관에서

모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 제도를 운영하였다.

이른바 "통일주최국민회의"가 그것이다.

이 제도가 갖는 민주적, 역사적 의미는 차치해두기로 하자.

충청북도 증평이라는 시골의 촌부에게는 그 대의원이 되는 것이 일생의 영광으로 비춰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대의원에 출마를 하려했더니 그 흔한 "졸업장"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일제의 압제 하에서 촌구석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배우지 못했음을 한탄하며 술취한 목소리로

신세한탄을 하시던 아버지의 넋두리를 나는 들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남긴 일기를 보면 아버지는 영등포에서 첫 직장을 시작한 분이셨다.

소위 소학교(국민학교) 과정을 가르친 사설 강습소를 졸업을 하고 무작정 상경하여 경부선 열차에서 몸을 내린

곳이 바로 영등포역이었다.

당시 나이가 열두세살 무렵이었으니 1940년대 초였으리라.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이 나라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져 있었던 때에 졸업장도 없는 학교를 졸업했으니

먹고 사는 방법을 배우고자 나선 생존의 절규였던 것이다.

그 어린 나이에 영등포역에서 내려 호객꾼의 손에 끌려 가서 취직한 곳이 방직회사였다고 한다.

그 회사의 이름이 "경성방직"이었던가?

그것은 확실치 않지만 하여튼 일이 너무 고되어 힘들어 하니까 같이 일하는 어른이 "너무 어려서 몸이 망가지니

도망을 가라"고 하여 야간에 몰래 공장을 빠져 나와서 다시 찾은 곳이 영등포 역이었다고 일기에는 쓰여있다. 

당시에 서울 사시던 친척의 도움으로 기차표를 사서 내린 곳은 조치원이었고 일본도를 차고 순시하던 왜군

헌병대의 눈을 피해 백리 길을 걸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한다.

그 후에 청년이 되어 다시 서울을 와서 기술을 배우며 정착했던 곳이 흑석동이었다.

북한괴뢰군의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자 끊어진 한강다리를 보고 군에 입대해서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결국

부상을 당한 후 대구에 있는 야전병원에서 치료후에 제대를 하였다. 

그리고는 서울 영등포에서 배운 기술로 다시 고향에 정착을 하게 된다. 

 

그런 아버지는 선거꾼이었다.

일제의 압제를 벗어나 치렀던 동족상잔의 6.25전쟁에 참전하여 사선을 넘나들다가 다시 고향에 정착해서  

4.19와 5.16을 맞는다.

공화당 청년당원으로 발탁이 되어 당원 교육을 받고 정치적인 청년운동을 하였다.

내 기억에 선거 때만 되면 가게문을 닫고 선거운동을 하러 다니셨기에 지금은 대림동에 계시는 어머니와

참 많이도 싸웠다.

그런 모습이 나의 기억에 있다.

아버지는 충북 괴산군의 국회의원으로 여러 명을 당선도 시키는 운동을 했고 또 낙선을 하는 운동도 했다.

아버지도 여건이 되면 "의원직"에 도전하고 싶어하셨던 것 같다.

그러나 여건이 되지 않았으니 그것은 한낱 꿈이려니...

그래서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늘 들었던 말이 있었다.

"나는 안되니 너는 나중에 한 번 도전을 해서 내 한을 풀어보라!!!"

 

인고의 세월이 흘렀다.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되었지만 아버지는 노인이 되었다.

내가 서울에 정착하여 부모님을 서울로 모셨지만 그러나 세월은 아버지를 앗아가 버렸다.

2005년 설명절이 지나고 얼마되지 않아 백년을 살 것 같으셨던 아버지는 갑자기 쓰러지셨다.

강남성심병원에 입원치료를 하였으나 아버지가 겪었던 인고의 세월은 아버지를 시름시름 앓게 하였다.

병상에 누어 당시 지방선거를 준비하던 나에게 하셨던 말이 이 새벽에 나를 울린다.

"내가 어서 일어나서 너를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래도 선거하면 이 애비 아니냐?"

아버지는 그렇게 안타까운 恨을 남기시고 2005년 7월 6일 세상을 떠나셨다.

 

그렇다.

선출직이 되는 것은 이런 아버지를 모셨던 연유로 늘 꿈꾸어 왔던 나의 생각이며 나의 바램이었다.

하지만 정치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

나는 정치학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우리 사회와 조국과 민족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그림을 그리고 끌고 나가는 것이 정치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위하여 이미 지난 13일 예비등록이 시작이 되었고 여야의 여러 후보들이 등록을

한 것으로 파악이 되어있다.

 

2011년 12월 23일, 금요일 새벽!!!

그 동안 여러 우여곡절을 겪어온 나의 정치적 편린들을 모아 결집을 시켜야 하는 날의 새벽이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었던, 지난 6-7년 간이 이 지역에서 보여주었던 정치적인 행위들의 의미를 이제 알 것

같다.

권력!!!

어찌보면 알량하기 짝이 없는 권력,

그 주변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민초들의 움직임과 그에 반하는 또 다른 민초들의 모습,

이것이 인간이 그려가는 삶일진대 결국은 모든 권력은 그 민초들에 의하여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법도 정치도 학문적으로는 잘 모르지만 "민주주의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오늘은 2012년 4월 11일의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위하여 예비후보 등록을 하러 가기로 한 날이다.

그래서 그런지 새벽에 깨어나 지난 날이 생각이 났고 이를 준비하느라 겪었던 정신적, 물질적 고통들이 나를

또 다시 힘들게 한다.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주여!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비록 지금 저의 이 모습이 아주 작은 몸부림일지언정

 모진 비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그 恨을 풀어드려야 한다.

 

출처 : "김영로"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한나라당 예비후보
글쓴이 : 김영로(素園)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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