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영등포의 삶

[스크랩] [연구실 정리]

영등포로터리 2017. 12. 9. 17:01

[연구실 정리]

최근에 작지만 연구실로 쓰고 있는 공간(空間)을 정리할 일이 생겼다. 오래된 자료를 선별하여 폐기한다든가, 이미 의미가 없어진 서류를 솎아내어 다시 분류를 하여 양을 축소시킨다든가, 해가 바뀌므로 인하여 발생되는 가지가지 자료와 비품들이라든가 등등 좀 더 슬림화된 공간으로의 변화를 위해서이다.

그렇게 캐비닛의 내용물을 정리, 정돈하다가 보니 지난해 말 무렵부터 올 봄까지 탄핵을 반대하면서 사용했던 태극기(太極旗)와 비품들이 약 20여 점 눈에 띄었다. 깃발을 펼쳐놓으니 집회의 초기에 사용했던 종이 태극기와 성조기(星條旗)가 그 당시 얼마나 흔들었던지 깃대 부분의 일정 구간이 찢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러한 단점을 보완해서 나오게 되는 중기 이후부터의 태극기는 헝겊의 재질로 조립이 견고하여 훼손되거나 파손된 것은 없었다. 그리고 머플러(muffler)라든가 모자(cap) 그리고 망토(manteau)까지 참으로 다양한 집회용품의 발전된 변모를 볼 수 있었다. 특히 집회가 야간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배터리가 달린 야광용 깃대를 보니 엄동설한에 추위를 이겨가며 목청 높이 외쳤던 탄핵반대의 외침에 대한 감회가 새롭기조차 했다.

하지만 이것은 패배(敗北)의 슬픈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듯이 현직 대통령에 대한 하야요구, 탄핵소추, 헌법재판소의 파면, 구속기소, 구속연장 등 일련의 사태가 마치 기계가 돌아가듯이 일사불란(一絲不亂)하고 천편일률(千篇一律)로 진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태극기를 들고 대한문 앞으로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은 시대의 흐름에서 암울(暗鬱)한 기운을 느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탄핵 이후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 것이라는 것을 감각적으로 느낀 것이고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나 역시 그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지 않지 아니하다.

태극기 집회는 1년이 지난 지금도 몇몇 주요 단체에 의하여 주도가 되고 있지만 가장 큰 규모로 군중이 운집을 한 것은 금년 3월 1일 집회였다. 각종 애국동지회가 기수단을 운용했는데 나 역시 한 단체의 기수로서 광화문 네거리에 만들어진 매우 높은 단상으로 올라가 광화문에서 우측으로는 남대문 방향으로, 전면으로는 동대문 방향으로 바라다 본 태극기 물결은 내가 세상에 나와 가장 거셌고 도도했으며 열정적이었다. 주최 측 추산으로 500만 명이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그 숫자는 한반도에 인간이 발을 디딘 이후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인원집결임을 부정할 길이 없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일 이후에 벌어진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우려에 대한 불안감을 저버리지 않고 패배의 회전(回戰)을 밀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신비에 가깝게 무엇엔가 조종당하는 기계가 움직이는 것 과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태극기 물결은 그 기계 앞에서 그렇게 무기력할 수가 없었다. 그 기계는 크고 작은 여러 종류의 톱니바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명칭은 듣기만 하여도 휘황찬란(輝煌燦爛)한 존재들이었고 그들은 아직도 점령군과 같은 합법을 가장한 횡포를 휘두르고 있고 그에 세뇌되다 못해 지친 국민은 하나 둘씩 “개·돼지”화되고 있으며 나라와 사회는 표류하는 듯하지만, 교묘히 짚어가는 삿대에 의하여 거짓말 같이 아래로 밑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1919년 3.1절 만세운동도 그랬을 것이다. 당시에 애국우국열사들과 민초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어나와 목 놓아 만세(萬歲)를 불렀지만 그들을 대변하고 힘을 실어주어야 할 사회적 기능과 조직(이들을 제도권 내의 세력이라 부르고자 함)들이 비겁하든 힘이 없든 그들을 인도하지 못했던 것이 우리에게 독립을 가져다주지도 못했고 독립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지도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부역과 배신이라는 거적때기를 쓰니 모든 고통은 이 땅의 무지렁이의 몫이 되었던 것이 아니란 말인가? 오늘의 패배도 그와 마찬가지의 궤적(軌跡) 위에 있는 것이다.

작금의 소위 보수(保守) 제도권 내의 세력은 스스로를 칭하여 웰빙(well-being)이라 하여 스스로를 향하여 폐족(廢族)임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적들과의 싸움에서 써야 할 칼로 오히려 자신들이 서야할 반석을 두 동강내어 버렸다. 아무리 많은 군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러도 그들이 딛고 있는 곳이 군중이 디딘 곳과 다르다면 하나 된 말과 행동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고 설사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 힘은 창대(昌大)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태극기를 들고 시위에 나오면 처벌한다는 내용의 법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라를 걱정하여 우국세력이라 하거늘 그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되레 사회의 부정적 존재로 전략되어 가는 것을 바라다보는 마음은 안타까움을 넘어서 쓰리고 구토(嘔吐)를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오늘 지난 동한(冬寒)의 시간 발을 동동 구르며 손에 들고 호호 불고 흔들었던 태극기와 그 도구들을 정리하고 희망의 불꽃이 되라고 까만 밤을 수놓았던 야광 깃대를 보니 자유의 함성(喊聲)과 민주의 열기가 머리에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다. 시세의 흘러감에 마음 졸이며 또한 무엇이 어떻게 어디로 흘러가는지 조차 모른 채 오늘도 웃으며 먹고 마시며 하루를 보내는 그러나 열심히 살고 있는 이 땅의 민초들을 보니 뜨거운 통한(痛恨)의 눈물이 가슴을 적신다. 그러나 언젠가는 참이 악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날은 올 것이다. 그날을 위해 고된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야 하고 그런 날이 올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행동하지 않으면 그것도 오지 않는다는 것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결국은 모두 함께 고뇌하고 행동하면 오늘 날 우리가 “기미(己未) 3.1 운동”의 의미를 되새기듯 먼 훗날 지난 3월 1일 외쳤던 함성의 의미가 부각되어 재조명될 것이다.

2017.12.09/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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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돌고도는 영등포 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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