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영등포의 삶

[스크랩] [지식의 비굴함]

영등포로터리 2016. 11. 19. 05:17

[지식의 비굴함]

요즈음 대통령을 둘러싼 정국의 흐름을 보면 이는 가히 태풍의 수준이다. 김진태 의원 말마따나 그러한 태풍 앞에 밝혀 놓은 촛불은 과연 어찌될 것인가? 어느 때부터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대규모의 군중을 동원할 때 사람들로 하여금 촛불을 들게 한다. 촛불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촛불과 바람의 최고급인 태풍과의 함수관계는 무엇일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대체적으로 1년 전에 광화문 일대에서 폭력과 물대포로 상징되는 시위와 지난 11월12일 역시 광화문 일대에서 있었던 시위의 주체는 대체적으로 유사해 보이는 데 시위의 양상은 180도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에게 있어서 도대체 어느 것이 진정한 얼굴인가? 지난 이명박 정부 시절 있었던 광우병 시위난동 때도 그곳은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 예컨대 평화시위는 비폭력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야누스와 같은 양면성을 띠고 평화와 폭력을 번갈아 내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작금의 시위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이 극명하지도 쉽지도 않다. 다시 말해서 촛불을 들었다고 평화적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단지 시위목적상 명분을 얻기 위하여 모습을 달리했을 뿐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필요에 의해 어린 아이를 태운 유모차 부대의 출동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며 정치적 구호가 난무하는 그 현장에 민주주의 현장을 보여준다며 동행하는 어린이나 나이 어린 학생들의 뇌리에 결코 긍정적인 기억만을 각인시킨다는 것이 언어도단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모차 안에 앉아 그 현장을 목격한 유아들에게는 커다란 정신적 트라우마를 형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이들로봐서도 어른의 쟁투적 행태의 피해로부터 초래되는 불행인 것이다.

작금의 정치적 사태는 어제 오늘의 사안에 의하여 발생된 것이 결코 아니다. 소위 진보와 보수로 대변되는 양대 사회문화적 세력에 의한 힘겨루기라는 것이 그 원인이다. 우선은 먼 사회적 미래를 보고 지금은 힘들지만 미래를 개선하고자 벌이는 집권세력의 개혁의지와 지금도 충분히 힘들고 졸라맨 허리띠만으로도 몸이 두 동강날 처지라며 몸부림치는 저항의지의 충돌인 것이다. 다음으로는 정권탈취를 위한 정파적 이해관계의 쟁투가 원인이다. 즉 정치권이 명확한 역사관과 정체성을 갖고 사안의 본질을 파헤치고 그것들을 국가와 민족의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대입하려는 행동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대방의 실책과 비리를 꼬집어서 판을 흔들어 권력을 쟁취하려는 시도와 수성을 하려는 의지와의 충돌을 말함이다.

이러한 사회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충돌의 이면에 빠짐없이 나타나는 것이 대다수의 국민들로부터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국민들에게 바로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하기 위한 홍보활동이다. 하지만 세상사가 기능주의적으로 흘러가든 아니면 갈등이론에 적용을 받든 그 충돌 즉 자신들의 요구가 홍보활동에 의하여 평화적으로 해결이 되어 모두에게 수용이 된다면 몰라도 그 범주를 벗어나게 되면 충돌의 양상은 달라진다. 여기에 오늘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제를 선점한다거나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거나 혹은 어느 일방의 치부를 덮고 우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나타나는 것이 바로 선동이다. 선동은 사실에 근거하든 근거하지 않든 대중매체를 동원하여 상대방을 흠집을 내는 것이다. 그 선동에 의한 방어는 진실로 어려운 과제이며 극복하기 쉽지 않은 선동 메카니즘의 통제를 받는다. 다시 말해서 괴벨스의 말처럼 한 줄의 선동을 해명하고 극복하려면 몇 장의 해명이 요구된다. 더구나 작금의 사태 같이 언론이 중립의 위치가 아니고 어느 일방의 입장에 부화뇌동하여 선동의 중심에 설 때는 사태는 심각한 국면으로 유도되고 대다수의 선량한(때로는 우매한) 대중은 선동에 세뇌되어 버리는 엄중한 위치에서 안절부절하거 된다. 선동은 이들을 내버려두지 않고 더욱 더 잔인하게 흔들어서 대중의 입장을 어느 일방의 주장에 고착화시켜 버린다.

여기서 그 시대의 지식이 고민을 한다. 그 이유는 선량한(때로는 우매한) 대중에게 한 시대의 지식계층으로서 입장표명을 요구받게 되는 선동 메카니즘의 통제하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식은 종종 매우 교만하며 비겁하다. 그래서 충돌 양방의 적나라한(대부분 더럽고 추잡한) 도덕성을 점검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저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내지는 어찌 보든 말든 나는 나라며 점검을 마친 뒤에는 바로 그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급기야 사태의 본질에 관계 없이 자신들의 이익과 자신들이 내어놓을 입장을 놓고 사회의 안녕과 질서보다 개인과 소속집단의 그것들을 생각하며 저울질하기 시작한다. 혹자는 울분을 토하고 혹자는 핏대를 올린다. 그리고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가 주는 마음의 위안을 받으며 입장정리를 한다. 그러나 개인의 입장표명을 두려워하고 소속집단에 자신의 입장을 위탁하게 된다. 하여튼 이 저울질에 의하여 그 시대와 사회의 지식과 지성이 얼마나 도덕적이었나가 결정된다.

선동의 동력이 소진될까봐 십수년 전의 일까지도 끄집어내어 손을 보아 끝도 없이 불쏘시개를 불구덩이 속에 집어던지는 작금의 사태 속에서는 개인의 입장이 매카시즘의 시각이라고 비난을 받으면 어찌하나 아니면 그런 것이 지나치게 일반 대중에게 자신이 고리타분하거나 진부해 보이지 않을까를 두려워 한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비판적이지 못할 경우 받게 될 손가락질을 무서워한다. 결국은 지식의 선택이 미래사회의 안녕과 질서보다는 목소리가 커보이는 쪽을 택하는 비굴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지식도 괴벨스의 말대로 선동에 굴복당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12월 19일(토) 14시 부터 서울역과 광화문 앞에서 보수단체의 집회가 있고 저녁에는 반대진영의 시위가 있다. 두 집회 및 시위가 양쪽 모두에게 상처가 되를 안되기를 기원한다.

2016.11.19/흙을 딛고 일어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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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돌고도는 영등포 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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