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이는 여려보이고 귀여워보이고 착해보였는데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나랑은 사직동에서 같이 하숙을 했지요. 같은 방을 썼습니다. 그 하숙집은 내수동 고개를 넘어서 시내로 가다보면 왼쪽에 파출소를 지나 좀 내리막길을 내려가 왼쪽으로 비탈길이 있었는데 그 비탈길을 올라 한참 골목으로 들어가다보면 막다른 길 우측집이었지요. 명구가 소개를 해주었던 집으로 하숙집은 교육자 집이었습니다. 사모님도 참 좋았지요. 맞은 편 집에는 기술을 가르치시던 민선생님이 하숙을 하고 계시기도 했습니다.
하숙집 한편은 비탈길이었는데 그 비탈길로 내려가면 의식이 하숙집이 있고, 정길이도 와서 있었고, 지금은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동창들이 몇몇이 하숙을 하고 있었지요.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였지만 술도 많이 마셨어요. 후배들 시켜 커다란 플라스틱 다라에 막걸리를 받아다가 파티도 여러번 했었지요.
기성이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였습니다. 나는 지금은 성당을 다니지만 당시에는 종교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놓고 기성이와 많이 싸웠어요. 미워서 말도 안하고 등돌리고 잔 적도 많았습니다.
큰길로 나가면 이발소가 있었어요. 한번은 이발소에 면도를 해주는 예쁜 아가씨가 있었지요. 우리는 머리 깍으러 가는 것이 커다란 즐거움이었지요. 머리를 깎고서는 서로 그 아가씨가 자신에게 더 관심이 있다고 우기기도 했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지만 그 때는 그것이 왜 그리 절실했던 감정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학을 가서는 나는 서울로 기성이는 부산으로 갔기에 졸업할 무렵에 다시 만났습니다. 영근이가 원효로에서 학원사업을 할 때 어두운 건물의 골목을 지나 강의실로 들어가면 있었던 작은 방에서 대학생이 되어서 다시 만났었지요. 그런데 기성이도 나도 같이 ROTC를 했습니다. 나는 16기고 기성이는 17기였지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였지만 기성이는 그 가냘퍼 보이고 순진무구한 얼굴로 무시무시한 교육대에서 교관을 했답니다.
기성이의 웃음은 정말로 티없이 맑았지요. 정말 그런 친구가 없어요. 기성이나 나나 세파에 시달리느라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청주에서 일이 있어 내려가면 반갑게 맞아주고는 했던 친구였지요. 세세한 것은 모르지만 기성이의 마음을 나는 알 것 같아요.
우리 아버지 어머니께서 증평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청주로 거주를 옮겼을 때 그곳은 율량동 동아아파트 였는데 기성이가 근처 신라연립에 살았었습니다. 혹시나 아버지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봐 여차하면 동아아파트 3동 303호에 네가 내 대신 먼저 달려가 달라고 부탁을 하면 언제나 걱정하지 말라고 나에게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언젠가 의식이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증평 장례식장에서 만나 문상을 하고 청주로 기성이와 기성이의 집사람과 같이 차를 타고 나왔지요. 짧지만 기성이와 했던 순간순간이 주마등 처럼 스쳐가는 밤입니다. 친구의 죽음이 슬픈 듯 비는 억수로 쏟아지고 있구요.
언제였던가요. 청주에서 만났는데 술에 잔뜩 취해 자기 집에를 가자고 하더라구요. 가서는 한잔 더하다가 호주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아들을 소개해주더라구요. 공부 열심히 하라고 100파운드를 쥐어주며 격려를 하던 기억이 나네요. 그 아들이 이번 장례때 슬픈 마음으로 애를 많이 썼겠지요. 연전에 서울로 근무지를 옮겼다고 전화가 왔었지만 이놈의 정치가 뭔지 차일피일 하다가 그 맑은 미소 짓는 얼굴도 못보고 이렇게 보내버렸네요.
낙중이 문자를 받았을 때 나는 해석을 잘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다시 보니 기성이의 죽음을 통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혹시하고 카페를 들어가보니 정말 기성이가 유명을 달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나를 조여온 것은 나의 짜여진 일정이었습니다. 조화를 보내고 응환이를 통해서 조의금은 보냈지만 결국은 나는 친구가 가는 길에 옆에 있지를 못했습니다. 한편 미안하고 한편 죄스럽습니다. 다리를 다쳐서 가동이 불편한 것도 있었지만 바쁜 핑계로 사람 구실 못하고 사는 삶이 갑갑하기도 하구요.
친구여! 정말 미안하다. 가는 길도 지켜보지 못한 나를 용서해주기 바란다. 부디 주님 곁에서 편안하고 늘 행복하고 아픔의 고통도 없고 마음의 혼란도 없는 삶을 누리기 바란다. 친구의 명복을 빌며 기성이와 내가 고 2때 하숙하면서 하숙방에서 같이 불렀던 노래를 한곡 띄우며 친구의 다정하고 해맑았던 웃음을 생각하며 눈물짓는다.
기성아! 정말 미안하다. 부디 주님 곁에서 편하게 살기 바란다. 나를 용서해라. 잘 가라.
|
'22-영등포 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식을 뛰어넘을 때, 감동은 오래 남는다. (0) | 2009.07.22 |
---|---|
버리는 훈련 (0) | 2009.07.14 |
그때 그 전선의 그 부하를 생각한다. 1. (0) | 2009.07.13 |
[스크랩] 영등포구 귀한동포 경로당 설립 1주년 행사 (0) | 2009.07.03 |
자녀의 성공공을 위한 20가지 습관 (0) | 2009.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