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전선의 그 부하를 생각한다. 1.
지난 7월 7일 2해병 사단에서 전투감각이란 제목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서해 백령도와 연평도 및 해병 제2사단에 근무하는 장병들의 노고에 감사하고, 밤새워 전방을 응시하는 날카로운 눈매를 믿고 존경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이글을 서해 해병 장병에게 올립니다.
나는 1965년 ROTC 3기로 임관하여 1999년 5월 말 육군 중장으로 전역을 하기까지 35년간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1968년 중위 때 월남의 맹호부대에서 소총중대 소대장 시절 때 만난 내 소대의 선임하사관을 잊을 수가 없다.
* 전투 시 신임 소대장의 공포와 고충
나는 1968년 2월 파월하여 맹호부대의 소총중대 소대장으로 보직을 받았다.
처음 지역 내 수색정찰 임무를 받고 소대원과 회의를 할 때였다. 소대 선임하사를 포함한 대원들의 분위기가 “신임 소대장은 아무 것도 모르니 서두르면 죽는다.”는 식으로 겁을 주는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첫 수색정찰을 나가기 전날 밤, “내가 이제 전투를 하는구나. 사람을 총으로 쏴야 하는구나.”하는 생각에 가볍게 흥분이 되어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사실 죽는다는 것과 부상을 당한다는 걱정에 겁도 났고 무서웠다.
당시 소대장들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저격이었다. “땅” 총소리가 나면 십중팔구 소대장이 쓰러지기 마련이었다. 다음은 무전기를 메고 있는 통신병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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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경험이 없는 소대장을 위하는 것이니까 이해하고 그대로 따르라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귀대 후에 정찰결과를 보고해야 함으로 지도와 실제지형을 대조하면서 지형숙지를 해야 하는데 지도조차 꺼내보지를 못하게 하니 참으로 난처했다.
선임하사 문 중사는 대원들 앞에서 면박을 주면서 이런 말을 수시로 했다. “한번 이야기하면 알아듣고 잘 지켜야 합니다. 저는 제 소대장이 적탄에 맞아 죽은 시체를 치우기 싫습니다. 부상당하는 모습은 볼 수가 없습니다. 제발 말 좀 들으세요.” 이런 식으로 면박을 당했다.
어쩌다가 소대장 조가 앞장을 서면 지도판독을 잘못하여 전진방향을 잘못 잡을 때가 있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나를 몰아세웠다. “고려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독도법도 모릅니까? 공부 좀 하고 나오세요.” 참으로 분통이 터질 망신이었다.
그 때 나는 이런 생각까지 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그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저 자식 죽이기는 그렇고 다리라도 쏴버려야겠다.” 어떤 날은 분을 참지 못해 밤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참새도 텃세를 한다지만, 사람은 더 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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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의 신임 소대장 시절, 나는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선임하사인 문 중사 뒤만 많이 따라 다녔다. 무전교신 역시 음어와 적당히 우리끼리 만들어 쓰는 은어가 뒤섞여서 도무지 무슨 소리를 교신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대원들은 적과 교전이 벌어지면 소대장이 지휘를 제대로 할지 걱정스러워 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였다.
이런 숨이 막히는 분위기는 상당히 오래 갔다. 전투에 대한 감각도 없이 접전이 벌어지면 내가 마구 설쳐댈 것으로 미리 짐작하고 겁을 주어 보자는 분위기 같았다.
오락이나 별 다른 즐거움이 없는 무미건조한 거친 생활의 연속이라, 새로 온 신참내기 소대장을 골탕을 먹여 쩔쩔 매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 같아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신참내기 소대장 시절에 나는 겁이 많이 났다. 산속으로 들어가면 서부영화에서 본 인디안 같은 적이 도끼를 들고 튀어나올 것 같았고, 어디선가 나를 노려보는 놈이 내 가슴에 정조준을 하고 기다리는 것 같아 섬뜩 섬뜩했다.
나무의 덩굴은 부비튜렙(Booby Trap)인계철선 같고, 발을 내디딜 때마다 지뢰가 곧 터질 것 같았다. 들판에서는 독침이나 함정이 어디 있나 두리번거렸고, 숲을 보면 그 안에 적이 총을 쏘며 튀어나올 것 같았고, 민간인을 만나면 적이 아닌가 싶어 바싹 긴장을 했다.
* 소대원의 고향집에 편지를 보냈는데.
나는 소대원들과 더 친숙해지기 위해 대원들의 부모님에게 편지를 하기로 하고 매일 몇 장씩 써서 보냈다. “잘 있다가 건강한 모습으로 귀국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내용을 써서 보냈다. 답장이 많이 왔다. 부모가 직접 쓴 경우도 있고 형이나 동생 또는 시집을 안 간 누나나 여동생이 호기심을 갖고 정성스럽게 보내준 내용도 많이 있었다.
전쟁터에 자식을 보낸 부모들의 마음이 하루도 편한 날이 없던 차에 친필로 쓴 소대장의 소식은 고향의 부모님을 안심시키는데 충분했고, 소대원들의 마음을 끌어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결혼을 한 대원도 있어서 선임하사인 문 중사를 포함하여 아들과 딸 그리고 어린 동생들에게 이동 PX(Post Exchange: 생활용품을 파는 곳)에서 파는 연필과 지우개 노트 같은 간단한 학용품을 사서 보내주기도 했다.
답장이 오고 가면서 나는 소대원의 고향 부모형제와 정성스런 대화를 했다. 내 정성은 본국으로 갔다가 부모형제를 통하여 다시 대원들에게로 전달되었다.
내 나이 26살, 선임하사관인 문 중사는 34살이니 8살이 위였다. 그에게는 파월 시 근무를 하던 강원도에 아내와 두 딸이 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딸들에게 편지를 했다. 그의 아내에게 편지를 하자니 서먹서먹하여 딸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때 마다 나는 예쁜 볼펜, 색종이, 색색갈의 고무와 연필 들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온 동내에 서 경석 중위의 편지와 선물을 받았다는 자랑을 한다는 정성들인 편지를 여러 번 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원들과도 신뢰가 쌓여지고 처음 왔을 때 어리벙벙한 티도 많이 벗었다. 작전만 나가면 선임하사관인 문 중사 뒤만 따라다니던 신참내기 신세도 많이 면했다
* 편지로 맺은 정성과 우정이 나를 살려냈다.
어느 날 우리 중대는 차를 타고 마을평정 작전에 투입되었다. 첫 날은 마을의 주민과 적색분자를 분류하는데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게 보냈다. 마을은 비교적 부농이었고 집집마다 부처님을 모셔놓았으며 그 앞에는 바나나 잎에 싼 찹쌀 인절미가 많이 놓여 있었다. 떡과 인절미에 입이 익숙한 대원들은 월남 인절미를 자주 집어 먹었다.
다음 날 내부정밀 수색작전에 들어갔다. 바나나와 야자수가 우거진 지역을 지나는 도중 적의 기습사격을 받았다. 연발로 “다다다 딱”소리가 나면서 실탄이 바나나 나무 잎을 뚫고 내 주변에 박혔다. 나를 보고 쏘는 것이었다.
오싹하는 전율을 느끼면서 우측 전방에서 전진하는 문 중사를 부르기 위해 무전기의 키를 잡았다. 내가 그를 호출하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흘러나왔다.
무전병의 무전기 키를 내가 잡고 있는 것을 모르는 그는 내가 무전병인 것으로 착각하고 마구 소리를 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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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측방에서 즉각적인 조치를 하지 않았으면 적에게 노출되어 있던 우리는 많은 피해를 보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상황이 종료되고 나는 선임하사관과 마주 앉았다. 소대장이 잘못하면 다 죽는다는 것을 내세워 내게 자주 무안을 줄 때는 내심 기분 나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미울 때도 있었다. 그의 진심을 모르고 투박했던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민망하기만 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적이 소대장 쪽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을 안 순간, 고국의 딸 생각이 났다고 한다. 소대장이 다치거나 죽으면 내 자식들에게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소대장이 죽거나 다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무전기를 잡고 소대장이 고개를 들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 “제 아내와 딸들은 애비인 저 보다 소대장님을 더 좋아합니다.” 편지와 예쁜 연필과 색종이로 이어진 고향 딸들과의 정성이 문 중사와 나를 뜨거운 전우애와 신뢰로 깊게 맺어 주었다.
<그 때 그 전선의 부하를 생각한다. 2> 가 다음에 계속됩니다.
글쓴이 : 서 경석
1965년 고려대학교 졸업.육군중장전역(ROTC3기)
현재 고려대학교에서 손자병법과 지도자론을 강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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