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학/81-행정론

루즈벨트 대통령과 경제대공황 그리고 극복해법

영등포로터리 2008. 3. 23. 09:43
별칭은 F. D. R.
1882. 1. 30 미국 뉴욕 하이드파크~1945. 4. 12 조지아 웜스프링스.
미국의 제32대 대통령(1933~45).
 
개요
루스벨트 /루스벨트(1937)
미국 최초의 4선 대통령으로서, 오늘날 미국 행정부의 기능과 역할은 그의 통치방식에 힘입은 바 크다. 국내적으로는 1930년대의 대공황 타개를 위하여 뉴딜정책을 추진했고, 대외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연합국을 지도함으로써 이후 미국이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초년기와 정치가로서의 성장
하이드파크에서 제임스 델러노 루스벨트의 외아들로 태어난 프랭클린은 청빈하고 기품있는 평온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가정교사들에게서 교육을 받다가 14세가 되자 매사추세츠 주 그라튼 학교에 입학했으며 공동체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그리스도교적 실천을 교육받았다. 1900년 하버드대학교로 진학한 루스벨트에게 교내활동은 교과과정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었지만, 정통 자본주의의 자유방임적 본질에 얼마만큼의 국가규제를 용인하려는 수정자본주의적 경향에 깊은 영향을 받는 한편, 뛰어난 진보적 대통령이었던 친척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영향을 받아 정치에 매료되고 있었다(→ 루스벨트).
1905년 3월 17일 프랭클린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조카로 뉴욕 시에서 인보문제(隣保問題)를 담당하고 있던 엘러너 루스벨트와 결혼했다. 엘러너 루스벨트는 젊은 프랭클린이 비참한 슬럼가의 환경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컬럼비아대학교 법과대학으로 옮긴 루스벨트는 법률시험을 통과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지만 유명한 월가(街)의 카터레디어드밀번사(社)에 들어가 변호인 상담역으로 일하면서 몇 년을 보낸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권고로 정치에 입문하게 된 프랭클린은 1910년 뉴욕 주 더치스 군(郡) 민주당 지도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주 상원의원 선거에 나서게 되었고 공화당의 분열사태와 널리 알려진 이름 덕택에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루스벨트는 상원에서 북부지방 농민들의 옹호자가 되었고 이들을 위한 진보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1911년말 대통령후보지명 전당대회가 열렸을 때 뉴저지 주지사 윌슨을 지원한 루스벨트는 그 보상으로 1913년 3월 해군차관보에 임명되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20년의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부통령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는 대통령후보인 제임스 M. 콕스와 함께 국제연맹 가입을 공약으로 내걸고 선거에 임했지만 공화당의 하딩 후보에게 패하고 말았다.
1921년 8월 메릴랜드 주의 신용예금회사에서 부회장을 지내던 루스벨트에게 갑자기 척수성 소아마비 증세가 나타났다. 어머니는 그에게 은퇴하여 하이드파크로 돌아올 것을 권고했지만, 아내 엘러너는 오히려 정치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남편의 사기진작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고 프랭클린이 정치집회에 참석할 때면 그의 눈과 귀 역할을 했다. 엘러너는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 이러한 보살핌을 계속했으며, 장차 그녀가 활발한 정치·사회 활동을 펼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루스벨트는 웜스프링스에 머물면서 광천욕(鑛泉浴)으로 물리치료를 받은 뒤 2차례에 걸쳐 뉴욕 주지사를 지내게 된다. 첫 재임기의 루스벨트 정책은 후버 대통령과 대등한 수준의 좌익성향을 띠었으나, 불경기의 양상이 보다 현저해진 2번째 임기에는 뉴욕의 경제를 돕기 위해 주정부 조직들을 동원했으며, 1931년 가을이 되자 최초의 주단위 구제사업기구인 임시긴급구제국을 발족시켰다.
1930년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루스벨트는 1932년이 되자 가장 유력한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떠올랐다. 당시의 민주당 당헌에 따르면 전당대회에서 총투표의 2/3를 얻은 사람만이 후보자로 선정되도록 정하고 있었으므로 선두주자는 대개 애를 먹기 일쑤였는데, 텍사스 주 출신으로 하원의장에 오른 존 낸스 가너가 캘리포니아 주 예비선거에서 승리했을 때 루스벨트 측의 사정은 악화되었다. 루스벨트는 1932년 전당대회의 초반기에 과반수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가너와 선임 뉴욕 주지사였던 앨 스미스가 제휴하자 곤경에 빠졌다. 가너는 3차 투표에서 루스벨트를 지원하기로 결심했고 자신은 부통령후보로 지명되었다.

 
대통령 시절
1932년 대통령선거의 쟁점은 경제 대공황 문제였다. 루스벨트는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뉴딜'로 이름붙여진 경제부흥 및 개혁안의 윤곽을 자신있게 설명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유세에서 "민간기업의 활동은 사회적 책임을 수반한다"고 역설했다. 이와 같은 정책안은 호소력을 가졌고 그는 진보적인 서부지역 공화당원들의 지지까지 얻어냄으로써 마침내 후버를 물리칠 수 있었다. 민주당은 의회에서도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이무렵 은행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산업생산은 1929년의 56% 수준으로 하락해 있었으며, 1,300만 이상이 실직한 상태에서 농민들은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태해결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의회 지도자들은 루스벨트의 새로운 대안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취임연설에서 신속하고 과감한 조치를 약속하며 루스벨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굳은 의지를 밝혔다. "위대한 미국은 이미 과거에 그래왔던 것처럼, 역경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것이며 번영을 이룰 것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일 뿐입니다." 삽시간에 모든 정치세력들이 대통령의 동맹자가 되었고 루스벨트는 미국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평화시 법률제정 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폭넓은 일련의 조치들 가운데 루스벨트는 우선 경제복구에 힘쓰면서 경제파탄의 원인으로 생각되는 부작용들을 서서히 제거해나갔다. 내각의 조직은 컨센서스를 지향하여 이루어졌다. 지역적인 안배와 정치적인 균형을 감안하여 민주당 내 진보·보수세력을 모두 포함했으며 3명의 공화당원과 특히 프랜시스 퍼킨스를 노동장관으로 입각시킴으로써 최초의 여성각료를 탄생시켰다. 새로운 법률제정은 사업가와 은행가들에게 안정감을 심어주기 위하여 몇 가지 보수주의적 법안을 마련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고 3월에는 정부예산 규모를 과감하게 축소시킴으로써 선거공약을 실현시켰다. 때때로 루스벨트는 케인스 이론에 빠져 있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으나 사실은 긴축재정의 가치를 신봉하고 있었다. 한편, 초기 뉴딜 정책에 해당하는 법률초안들이 의회에 상정되었고 이에 따라 연방긴급구제국(FERA)과 미국민간자원보존단(CCC)이 설치되었다. FERA는 주단위의 직접적인 구제사업에 연방의 자금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고 CCC는 대통령 자신의 야심에 찬 계획으로서 한때 50만 명에 달하는 젊은이들을 재식림(再植林) 및 홍수조절사업에 투입했는데 뉴딜이 계속되는 동안 꾸준한 명성을 누리게 되었다.
뉴딜의 경제부흥조치는 농가의 수입을 보장하고 기업활동을 촉진시키려는 2가지 목적 아래 이루어졌다. 1933년의 농업조정국(AAA)은 농산품의 가격을 상승시키고 농민들에게 할당되는 국민소득 비율을 증대시키기 위한 임시 응급조치로서, 생산이 줄어들고 있는 7가지 기본 농산물에 가공세(加工稅)를 부과하여 이로부터 얻어진 수입을 정부 보조금의 형태로 지급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농업부흥 조치는 광범위한 농촌계획으로 이어졌는데, 척박한 지역의 농민들을 보다 비옥한 농경지대로 이주시키고 대도시의 실업인구를 농촌으로 유도한다는 내용이었다. 1935년 루스벨트는 이민정착국을 설치하여 가난한 소농들을 후원했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농가수익은 점차 늘어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1년에 들어서야 1929년 당시의 충분하지 못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1933년의 전국산업부흥법(NIRA)은 기업인들의 정국안정 요구와 노동자들의 주간 노동일수 단축 주장에 부응하여 마련되었다. 여기에는 대략 2가지 계획이 설정되었는데, 그 첫째는 33억 달러에 이르는 정부 지출금을 공공사업관리국(PWA)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신중한 계획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PWA는 뉴딜 말기에 가서야 효과를 내기 시작한다. 2번째 계획은 산업별 공정경쟁규약을 관리할 전국부흥국(NRA)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규약은 포괄성을 띠고 있었으나 사용자와 노동자 대표들의 협상과정에서 구체적인 기준들이 정립되었고 최저임금·최대노동시간·공정거래원칙 등으로 나타났다. 근로기준의 설정은 생산을 안정시키고 가격을 끌어올리며 노동자와 소비자를 함께 보호하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소비자들은 불충분한 보호를 받는 데 그쳤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임금과 노동시간 및 단체교섭권 등이 보장되었다. 1933년 여름 이러한 기준에 따라 제조업자들이 고가의 상품들을 내놓았을 때 경제부흥계획은 갑작스런 성공을 거두는 듯했지만 가을이 되자 가격상승속도가 구매력을 능가함으로써 모처럼의 호황세도 쇠미해졌다. NRA는 연방 임금·시간 법령, 단체교섭권의 보장, 주간(州間) 교역에 있어서의 유년노동의 금지 등 주요개혁들을 추진했다. 1933년 가을 루스벨트는 관리통화제도를 실시했다. 달러화의 금 함유량은 삭감되었고 은 가격이 3배 가량 뛰어올랐다. 가계소득은 약간밖에 늘지 못했으나 달러 화가 평가절하됨으로써 미국은 대외무역 측면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관리통화제도는 경제회복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미국 경제정책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1934년 가을까지의 뉴딜 정책이 한정된 효과 이상을 도출해내지 못하자 주로 기업인들을 포함하는 보수주의 세력들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통령의 계획이 위헌성(違憲性)을 갖고 있으며 산업에 불확실성을 던져줌으로써 경제회복을 오히려 어렵게 만들었고 달러 화의 평가절하로 말미암아 연방채권 소유자들은 적정한 보상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직 곤경에 처해 있던 빈민층에서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뉴딜이 충분한 만큼 진행되지는 못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빈민층은 1934년의 중간선거에서 민주당 의원들에게 지지를 보냈지만 점차 좌익선동가들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1936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루스벨트는 좌파 제3당 후보의 등장을 경계해야 했으며 1935년의 1월 연두교서에서 강력한 개혁의지를 천명했다. 이제 제2기에 접어든 뉴딜은 오랫동안 계획해왔던 대로 일련의 본격적인 개혁조치들을 입안하게 되었다.
1933년 테네시 강 유역을 개발하고 홍수조절 및 경제적인 수력발전을 목적으로 테네시 계곡 개발공사(TVA)가 설립되었으며, 이어서 투자가들의 보호를 목적으로 증권거래위원회법 등 제반 법령들이 제정되었다. 1935년에 추가로 제정된 법안들은 좌익 선동가들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는데, 특히 사회보장법의 내용 속에는 실업보험과 양로연금보험이 포함되어 있었다. 의회는 실업자들을 구제하여 그들의 기술을 활용하고 자신감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공공사업진흥국(WPA)을 발족시켰다. WPA는 1935~41년 사이에 평균 210만 명 정도를 취업시키고 수십 억 달러를 투자함으로써 1935년에 이미 유력한 경제회복 조치의 하나로 부각되었다. 같은 해 제정된 전국노동관계법(와그너법)은 노동자들의 단체교섭권을 보장한 것으로 노사분쟁을 심사하는 전국노동관계위원회(NLRB)를 규정하고 있었으며, 공익사업지주회사법(公益事業持株會社法)은 공익사업회사에 대한 지주회사의 지배를 규제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한편 새로운 세법안도 마련되었는데, 고소득자와 대기업들에 대하여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일부에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국민소득 재분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좌익 반대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들은 보수주의자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루스벨트에 대한 우파 보수주의자들의 비난은 1936년의 대통령선거에서 농민·노동자·빈민들로 하여금 루스벨트를 확고히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중도온건파인 공화당의 앨프레드 모스만 랜던은 이러한 대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뉴딜 정책을 방해하기 위하여 보수주의자들이 의지할 곳은 이제 연방대법원뿐이었다. 1936년 연방대법원은 '쉑터 판결'에 의거하여 AAA의 가공세를 무효화시켰고 사회보장법과 와그너 법에 연루된 사건들이 계류중에 있었다. 뉴딜 조치들이 헌법에 잘 부합되며 대법원 판사들의 심리는 구태의연한 오류라고 믿고 있던 루스벨트는 판사 6명의 교체를 포함하는 사법부 개편계획을 제안했다. 격렬한 논쟁이 일었고 일부 대통령의 측근들은 반대의사를 표시하며 등을 돌렸으나 1937년 봄에 이르러 계류중에 있던 두 법은 대법원의 승인을 받게 되었다. 행정부는 거의 무제한적인 경제통제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되었지만 루스벨트 자신은 정치적인 타격을 크게 입었다.
1937년 여름 강철·자동차 등 중공업 부문 노동조합들이 와그너 법의 비호 아래 파업을 일삼고 폭력사태를 빚어내자 대통령의 위신은 실추되었다. 루스벨트는 공정기준법(1938)에서 임금과 노동시간을 보장하는 등 무마책을 폈다. 조합원의 수는 1941년까지 950만 명에 육박했고 대부분의 중산층 시민들이 공화당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1938년부터는 보수적인 남부 민주당 의원들이 공개적으로 뉴딜을 비판하고 나섰다. 예비선거에서 이들을 패배시키는 데 실패한 루스벨트는 숙청을 주도하려는 독재자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2번째 임기를 통하여 이루어진 개혁조치들은 기존의 법안들을 개선하거나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시킨 것들인데, 농토보존, 주택공급, 슬럼 철거, 공공시설물 건축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사회보장, 농업부흥계획, 테네시 계곡 개발공사, 증권거래위원회 등으로 대표되는 뉴딜의 혁신적 조치들은 연방정부 기능의 일부로 정착되어갔다.
1939년이 되자 외교문제가 경제문제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집권 초기부터 대공황과 연관된 외교에 깊이 개입해왔던 루스벨트는 1933년 초여름 런던 세계경제회의에서 국제통화안정안을 반대했으나 이듬해에는 달러 화를 안정시키고 프랑스와 영국이 독재국가들의 횡포로부터 자국의 화폐를 지킬 수 있도록 협조했다. 또한 무역신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고 소련 정부를 승인하기도 했다. 첫번째 취임연설에서 천명된 '선린정책'은 1935년부터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와의 무역협정 형태로 전개되었고 유럽에서 전쟁이 임박해옴에 따라 상호방위조약 내지 집단안전보장체제로 발전되었다. 초기 뉴딜 기간중에 보호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했던 루스벨트는 전쟁개입을 회피하여 중립법(1935. 8)을 채택했으나, 일본군이 중국 북부를 위협하기 시작하자 평화를 애호하는 세계의 국가들은 침략자들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다함께 힘을 모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를 소집했고 교전국들에게 무기판매를 허용하는 중립법 개정에 착수했다. 히틀러의 공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1940년 초여름 프랑스가 함락되자 미국은 전쟁준비를 시작했으며 유럽에서의 전쟁을 단축시키기 위하여 영국군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루스벨트는 서반구에 있는 8군데의 군사기지를 획득하는 조건으로 영국 해군에 구축함 50척을 제공했다. 국익 차원에서 영국을 지원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전쟁개입을 우려하는 고립주의자들과 열띤 논쟁을 벌였다.
1940년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웬들 L. 윌키는 루스벨트의 외교노선에 동의하고 전쟁개입금지를 역설했으나, 고립주의자들은 프랭클린보다 웬들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전보다 표차가 줄기는 했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헌정사상 최초로 3선 대통령이 되었다.
1941년 3월 연합군을 지원하기 위한 무기대여법이 마련된 뒤 유럽으로 향하는 수송선단들이 독일 잠수함의 무제한 공격을 받는 사례가 늘자 잠수함에 대항할 해군의 호위체계가 강화되었다. 8월에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와 만난 루스벨트는 민족자결주의, 경제적 기회균등, 공포와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공해(公海)의 항행권보장, 군비축소 등에 의견 일치를 이루어 대서양헌장을 공표했다.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 함께 이른바 '추축국'의 일원으로서 동아시아를 무대로 세력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미국정부는 일본에 대한 군수품 보급을 거부한 채 1941년 내내 협상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11월말경 일본 함대와 수송선단은 태평양으로 발진했고 교전이 임박했다. 필리핀을 공격목표로 추측하고 있던 군사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1941년 12월 7일 일본 해군은 하와이의 진주만에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이튿날 대통령의 요구로 개최된 의회는 4시간 만에 참전을 결의했고 12월 11일에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해왔다. 전시상황에서 루스벨트는 보수주의자들과 화해할 수밖에 없었고 몇몇 뉴딜 기관이 폐쇄되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뉴딜 정책이 전쟁기간 동안에만 유보될 뿐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진주만 기습 이후의 관건은 신속히 대량생산 체제로 돌입하는 것이었으나 이미 1939년부터 다양한 전시경제가 시도되었던 결과 1944년 무렵의 전시생산고는 추축국 전체생산의 2배에 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루스벨트는 전쟁기간 동안 전략과 연합국과의 협상 및 전후 평화계획 수립에 몰두했다. 전쟁 초기에 대두된 쟁점은 주로 프랑스 상륙작전에 관해서였다. 영국은 작전개시일을 계속 늦추었고 1944년 6월에 가서야 노르망디 침공이 이루어졌다. 루스벨트는 1943년 1월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처칠과 충분한 논의를 거친 뒤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 원칙을 선언했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을 종결짓는 1918년 휴전협상 당시 협상국들이 겪어야 했던 의견차이와 독일의 오해 등을 우려한 대안으로서, 일각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항복의 원칙이 전쟁을 지연시켰다는 명백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소련 문제는 루스벨트를 곤경에 빠뜨렸다. 소련은 막대한 양의 전쟁물자를 대여받으면서도 좀처럼 작전계획을 제시하지 않았고 연합군과 공동보조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전후의 국제정세가 소련과의 관계 여하에 직결되어 있다고 판단한 루스벨트는 요시프 스탈린의 신임을 얻고자 했는데 테헤란에서 스탈린을 처음 만났을 때는 장래의 평화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 테헤란 회담) 1945년 2월 3거두(三巨頭)가 크림 반도의 얄타에서 회동할 즈음 유럽의 전쟁양상은 종결단계에 와 있었으나, 미국은 일본군의 마지막 저항을 제압하는데 18개월 남짓한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예측했다.(→ 얄타 회담) 전쟁을 단축할 목적으로 개발되고 있던 원자폭탄은 파괴력 면에서 현저히 과소평가되고 있었으므로 루스벨트는 소련군이 대일작전에 참여해주기를 바랬으며, 그 대가로 극동에서 소련의 우위를 인정할 것을 처칠과 합의했다. 동유럽 지역에 관해서는 개전 초기의 결정들이 재확인되었고 민주정부 수립계획이 정립되었다. 그러나 소련측의 해석은 완전히 달랐다. 3월 중순 소련이 미국의 정책을 규탄하고 나섰을 때 루스벨트는 날카로운 외교전문을 발송했다.
루스벨트는 효율적인 국제기구, 즉 국제연합(UN)이 전후 평화유지에 기여해주기를 희망했다. 그는 헌장의 채택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1944년 1월 이후 건강이 악화일로에 있었다. 1944년 대통령선거의 공화당 후보는 뉴욕 주지사인 토머스 E. 듀이였다.
루스벨트의 정적들은 그의 용태를 문제삼을 태세였지만 이미 3차례에 걸쳐 대통령을 지낸 프랭클린을 끌어내릴 수는 없었다. 얄타에서 돌아온 루스벨트는 앉은 채로 의회연설을 마쳤고 1945년 4월 12일 휴양차 머물던 웜스프링스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평가
공인으로서의 루스벨트에 대한 평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사랑을 받았던 인물인 동시에 혐오의 대상이기도 했다. 루스벨트의 정적들은 그의 무능력과 얄팍하고 교활한 정략, 그리고 독재적인 야심들을 꼬집었으며, 지지자들은 경제공황의 구원자이고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민주주의를 수호한 위대한 지도자로서 그를 부각시켰다. 국민의 지지를 유도하고 행정부 내에 다양한 정견을 가진 관료들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루스벨트를 능가할 인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정치분석가들은 루스벨트 정부가 때때로 역할분담이 명확하지 않아 혼선을 빚어내기도 했지만 유례없이 효율적인 행정능력을 발휘했다고 설명한다. 1932년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는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대통령직이란 고도의 윤리성이 요청되는 책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