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Alexander), 帝國의 눈물]
제임스 롬(James Romm) 지음/정영목 옮김
책을 읽고 정리를 하고나서...
책을 한 권 쓰더라도 수많은 역사적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그에 합당한 참고문헌을 기반으로 하여 방대한 책을 쓴다는 것에 대하여 저자의 지식과 지성에 감탄을 하며 이를 번역하는 이 역시 그에 버금가는 노력과 지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고 생각이 됨, 통상적으로 이 시대의 이야기를 고등학교 다닐 때에 한 학년의 세계사라는 책으로 배웠겠지만 알렉산드로스(우리는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배웠음)에 대하여 현존하는 기억은 마케도니아인으로서 아시아 대륙까지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었다는 것이 모두임에 이 책을 통하여 그를 둘러싼 절친했던 친구, 친지, 선후배 제현들에 의하여 오히려 그의 가족과 아르가이 가문이 滅門之禍를 입는 黑歷史를 보고 인간사의 잔인함, 허무함, 비겁함에 경악하며 그러한 경악이 이어져 인간의 역사가 지속된다는 것을 생각하니 사람 사는 세상이 참 공허하다는 것을 느낌을 지울 수가 없음, 이러한 기원전의 패권이 로마제국, 징기스칸, 나폴레옹, 대영제국, 히틀러와 무솔리니로 대변되는 세계대전,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공산주의의 확산, 중국의 崛起, 미국의 팍스아메리카(Pax America)로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이 지구상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될 것이라고 보여 지며 그러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노력은 정체성을 같이하는 한 집단이나 민족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여 진다. 따라서 이 책이 주는 의미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한반도의 한민족에게 시사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며 이러한 시사점은 어느 국가나 민족에게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지 어는 국가와 민족이 새롭게 다가올 시대에 그러한 패권을 차지할 것이냐 하는 것은 자신들이 이룩하고 노력하는 결과물의 합산에 의할 것이라는 것이며 그것을 이룩하는 길에는 혜안을 갖춘 지도자가 있어야 한 다는 것이며 집안싸움만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머나먼 이야기일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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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무덤의 비밀을 열다.
- 1977년 11월 8일 오후, 그리스 북부 베르기나라는 마을 외곽에서 이루어진 발굴로 안드로코스가 25년째 작업을 해옴, 도기유물로 보아 BC350~315년의 무덤으로 안드로코스는 필리포스 2세라고 주장, 또 하나는 알렉산드로스의 무덤으로 보임, 30년 넘게 풀리지 않음.
- 제1무덤은 필리포스2세 및 알렉산드로스, 제2의 무덤은 젊은 시절의 그들과 시종들, 제3의 무덤은 왕자의 무덤, 그리고 그림과 상아조각상으로 묘사된 알렉산드로스의 친구들, 알렉산드로스의 배다른 형과 조카들의 마른 화장 유골(살이 썩은 뒤에 한 화장의 결과물)
- 모든 유골이 이 시대의 가장 격렬하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간직하고 알렉산드로스의 명성에 가려져 있음 - 정복과 제국 건립, 몰락으로 찢기는 과정, 정치적 질서가 붕괴되는 과정, 400년 왕조의 사멸하는 과정을 지켜본 그들임.
- 지금부터 마케도니아인 알렉산도르와 그들의 이야기가 펼쳐짐
1. 왕의 죽음, 바빌론(BC323년 5월31일~6월11일)
- 죽을 것 같지 않던 알렉산드로스가 죽을 수 있을 것으로 보임, 근위대라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군사원정의 지도자들이 둘러싸고 임종을 지켜보고 있음, 알렉산드로스에게 임종 때 누구에게 권력을 넘겨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가장 강한 자에게”라고 대답했다는 설이 있음, 엄청난 권력투쟁을 예고란 것으로 아드리아 해에서 인더스 강까지 5,000Km에 이르는 지배권의 쟁탈전이었음
- 죽음의 리허설 : 바빌론의 정복으로 동방의 경이를 맛본 그들은 인도에서 동방의 공포를 봄, 인도의 한 반란도시를 공격하다가 허파에 화살을 맞았으며 몸을 회복하며 군대를 축소하여 다시 바빌론으로 돌아감
- 왕의 친구들, 친위대 : 친위대(프톨레마이오스, 페르디카스, 레오나토스, 네아르코스, 에우메네스와 멋진 신세계를 이룰 아라비아 원정계획을 꾸밈,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죽어가고 있었음, 그가 죽으면 기뻐할 사람은 많았음, 독살설과 열병설이 있으나 알 수 없음.
- 유럽과 아시아의 융합을 꿈꾼 왕 : 박트리아(현재의 우즈베키스탄) 적장의 딸 록사네를 아내로 맞이하여 동맹을 맺음, 페르시아의 마지막 딸들과 결혼, 아시아 엘리트와 융합시키고 제국을 다스릴 혼혈지배계급을 만드는 노력, 근위대도 페르시스와 박트리아 귀족가문과 결혼시킴.
- 왕의 군인들, 근위대 : 정예의 방패부대 창설, 동서의 혼맥을 통한 융합은 받아드려졌지만 병사의 단합은 어려움, 반대자를 즉결처형을 하고 두둑한 연봉을 지급하여 수습.
- 대왕 알렉산드로스가 죽다 : 그의 죽음이 가까워짐, 고열과 싸움, 유언비어의 유포로 불신이 다시 떠오름, 6월11일 왕이 죽음.
2. 제2의 알렉산드로스는 누구인가 : 바빌론, BC323년 6월11일~여름
-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병으로 인해 생긴 권력의 공백에 대처하기 위해 군과 제국을 감독할 권한을 페르디카스에게 주었음, 기병대 지휘권은 그리스인 에우메네스에게 넘어감.
- 첫 시험대에 오른 페르디카스 : 그는 왕족의 혈통이었음, 알렉산드로스가 인도에서 화살에 맞아 위기에 몰렸을 때, 謁見실에서 회의를 주재하면서 왕의 사후 계승자 문제를 거론함, 결국은 록사네가 출산을 하면 그 아이가 왕이 되는 것으로 결정, 따라서 네 명(페르디카스, 레오나토스, 크라테로스, 안티파트로스)의 섭정체제로 됨, 알현실에 있던 이 4인 위원회에 충성을 맹세했으나 궁 밖에서는 아니었음.
- 균열의 서막 : 보병들은 기병에 비해 무시와 소외를 당함, 보병들은 알렉산드로스에 대해서 존경은 하지만 전과 달라짐, 보병 최고장교 멜레아그로스 역시 알렉산드로스의 국제화에 비판함, 보병들은 후계자를 지명하는데 있어서 태어나지도 않은 록사네의 자식보다 아리다이오스를 후계자로 밀어댐, 보병은 폭동을 일으킴, 그러나 힘이 밀리는 것을 안 페르디카스와 부하들은 전술적 후퇴를 함, 멜레아그로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손에 넣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함, 에우메네스만 남고 모두 사라짐, 여러 지방과 피지배민족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죽었는지조차 모름, 아리다이오스가 필리포스가 됨.
- 죽음의 시합 : 멜레아그로스에게 페르디카스의 체포를 요구했으나 실패하므로 멜레아그로스에 대한 비난이 고조됨, 기병대의 반격이 시작되고 페르디카스는 협상을 요구, 에우메네스가 화해를 촉구, 결국 록사네의 자식이 아들이면 제2의 왕으로 삼기로 하고 화해, 그러나 두 사람의 싸움은 지속됨, 페르디카스가 멜레아그로스를 처형.
- 아기 알렉산드로스의 탄생 : 페르디카스는 제2의 숙청을 준비했고 그의 협력자는 록사네였음, 그들은 페르시아의 공주 즉, 알렉산드로스의 나머지 또 다른 후계자가 나올 것을 염려하여 두 미망인을 제거함, 록사네는 아들을 출산하여 알렉산드로스 4세, 필리포스 3세로 부름, 페르디카스는 친위대에게 바빌론을 떠나서 속주의 총독(사트랍, satrap)이 되는 새로운 임부를 부여하나 보잘 것 없는 주를 주어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좋은 지방을 주어 허세를 부리거나 하는 균형에 결국은 실패함, 이렇게 바빌론의 장군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을 조각내어 차지함, 페르디카스는 바빌론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금고를 차지하고 공동으로 관리를 함, 새로 왕관을 쓴 필리포스(아리다이오스)는 이러한 분할구도를 무조건 승인함.
3. 빼앗긴 아테네에 봄은 오는가?
-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이 그리스로 전해지는데 몇 주가 걸렸을 것임, 아테네의 배후 항구는 피레에프스이며 민주적이고 군사적인 강력한 도시임, 마케도니아 권력을 내키지 않지만 받아들이다가 새로운 관계설정을 요구함, 아테네는 다시 위험한 상태로 진입하고 두 지도자(리쿠르고스는 죽고 데모스테네스는 추방상태)를 상실함,
- 황금의 혀, 데모스테네스(칼라우레이아, BC323년 7월) : 아테네는 북방의 마케도니아와 전쟁을 하였으나 필리포스에게 패함, 필리포스의 관용으로 민주주의는 지켰으나 외교권이 없었음, 알렉산드로스가 죽어 기회가 왔지만 부패혐의로 추방상태임, 데모스테네스가 군사적 행동에 나설 것을 아테네 사람들로부터 요구받았을 것임, 추방을 해제해달라고 네 통의 편지(감언이설, 격분, 독설, 냉정)로 동포를 설득함 - 나를 다시 불러주시오.
- 老獪한 정치가 포키온(아테네, BC323년 7월) : 서두는 아테네인을 진정시킨 포키온, 너무 신중하여 환영받지 못했던 사람, BC335년에 알렉산드로스가 죽었다는 잘못된 정보롤 테베에서 폭동이 났을 때 자제를 촉구하였으나 이에 화가 난 알렉산드로스는 테베를 완전 유린함, 포키온의 행동은 정당한 것인가? 알렉산드로스가 선동가 10명을 놓고 문책을 할 때 포키온이 등장함, 포키온은 인육의 잔치를 벌이라고 조언함, 데모스테네스가 반대 주장을 폄, 민회는 곤경에 빠짐, 포키온의 말대로 결정됨, 포키온은 늙었고 명예로운 무덤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모든 것이 변함.
- 아테네의 이방인 아리스토텔레스(아테네, BC323년 7월) :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커도니아를 떠나 17살에 아테네로 와서 철학연구소에 들어 감, 아테네의 마케도니아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자신과 같이 자란 사람들이 욕을 먹고 플라톤이 죽자 서부 그리스 아타르네오스로 옮김, 그곳의 집권자 헤르미아스와 우정이 싹트고 그이 양녀인 피티아스와 결혼을 하며 더욱 강해짐, 장인이 필리포스를 지원하기로 하였다가 페르시아인들에게 고문을 당하고 죽음, 이에 감동과 용기를 갖고 마케도니아로 돌아가서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 됨, 그는 리케이온에서 12년 간 강의(생물학, 지리학, 정치학 수사학, 물리학, 인간영혼의 과학), 알렉산드로스의 보호를 받았지만 그가 죽으므로 위험해짐, 민회에서 음해하는 목소리가 나옴, 그는 “이민자가 아테네에 사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라는 편지를 안티파트로스에게 남김.
- 야망의 히페리데스(아테네, BC323년 7월) : 도시의 지도부가 바뀌자 반마케도니아 지도자로 남게 됨, 아테네 사람들이 특별한 노력을 한 것이 없음에도 기회가 주어진 것은 알렉산드로스가 인도 땅에서 부하들의 항명으로 발을 멈추고 돌아오는 때부터 시작됨.
. 뜨거운 감자, 하르팔로스 : 알렉산드로스가 인도를 쳐들어갔을 때 사트랩 가운데 일부는 배신을 때리고 있었으며 그가 돌아와서 기분이 상했음, 그중에 마케도니아의 귀족 하르팔로스가 있었음, 하르팔로스는 여자를 좋아하여 방탕함, 알렉산드로스가 돌아오자 아테네롤 탈출하나 아테네는 아테네를 지나가도록 결정하여 하르팔로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타에나론을 향하여 출발, 그러나 그곳에 입항을 주장한 매파였던 히페리데스가 희망을 걸 만한 인물이 존재함.
. 반알렉산드로스 용병 레오스테네스 : 타에나론에는 일자리를 잃은 그리스 용병이 많았으므로 지도자 레오스테네스가 출현, 아테네 칙령(올림픽 경기에서 발표하려던 것) 문제로 마케도니아와 일전을 불사할 준비를 함.
. ‘망명자 칙령’과 하르팔로스의 복귀 : 올림픽의 칙령은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의 목소리로 그리스 세계 전체를 통치하려던 것임, 망명자들이 2만 명이 들으러 옴, 히페리데스는 이로 인하여 반마케도니아로서 썰물을 탔으나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으로 다시 세상은 변하였음.
. 아테네의 뇌물 스캔들 : 하르팔로스는 경계망을 뚫고 아테네를 빠져나감, 하르팔로스가 알렉산드로스의 금고에서 훔친 700달란트 중 반이 없어진 것임, 도시 전체가 고소 맞고소함, 반마케도니아의 태도를 바꾼 것은 뇌물 탓, 6개월의 조사 후 데모스테네스, 데마데스가 유죄평결을 받음, 감옥에 갇혔으나 친구들이 그를 감옥에서 빼내 망명을 시킴(뇌물을 썼을 것이라 추정함),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으로 간 아테네 특사의 청원을 거부했으나 세달 후 알렉산드로스가 죽음.
- 전쟁발발(아테네와 그리스 북부, BC323년 가을) :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음, 호전적인 히페리데스와 신중론자인 포키온의 설전, 그래서 히페리데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서 훔친 350달란트를 이용하여 타에나론의 용병대장 레오스테네스를 민회로 데려와 마케도니아 항쟁에 이용함, 그래도 포키온은 단기전은 몰라도 장기전에 약하다고 신중함, 그러나 군선의 동력공급원인 노잡이들을 동원하고 포키온에게 국토방위군을 맡기어 서로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마케도니아에의 전쟁을 준비함.
- 아리스토텔레스 죽이기(아테네, BC323년 가을) : 알렉산드로스가 죽었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철학적이 아닌 개인적, 종교적으로 공격함, 그의 장인과 처를 빗대어 친마케도니아로 몰아붙임, 아리스토텔레스가 장을 기리는 시를 쓴 적이 있는데 이를 근거로 그를 불경죄로 기소함, 그는 결국 가족을 모아 아테네를 떠나 유보이아 섬으로 감, 왜 환영받을 마케도니아로 가지 않았는지는 불명함, 그의 12년간의 연구 성과를 식물학자 테오프라스토스에게 넘기고 아테네의 광풍을 피해 살아남기를 희망했음.
- 그리스 전쟁의 재림(그리스 북부, BC323년 가을) : 레오스테네스의 1차 목표는 테르모필레의 고개였으며 이곳은 150여 년 전에 스파르타군 300명과 도시 동맹군 1,100명이 전멸할 때까지 싸운 곳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임, 이 전쟁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그리스 전쟁이라고 부름, 마케도니아에 이긴다면 테베가 재건될 것이었음, 결국 전쟁을 하였으나 마케도니아의 안티파트로스는 난공불락의 라미아 요새로 들어갔고 레오스테네스는 보급로를 차단하는 장기전에 돌입함.
- 돌아온 데모스테네스(그리스 남부와 아테네, BC323년 겨울) : 안티파트로스는 움찔했고 레오스테네스는 기고만장했지만 포키온은 레오스테네스를 회의적으로 보았음, 장기적인 소모전이 지속되었기에 아테네 사람들은 펠로폰네소스 사람들에게 사절단을 보낸다는 것을 추방당해 있던 데모스테네스가 알고 과거의 적이었던 그들을 끌어안고 아테네로 돌아갈 길을 확보함, 아테네 사람들은 그에게 부과하였던 벌금을 해결해주고 뜨겁게 환영함.
4. 저항과 반역, 재정복 : 아시아와 북아프리카(BC323년 여름~BC322년 여름)
-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은 빠른 속도로 바빌론에서부터 퍼져나갔음, 페르시아 왕족(처가)이 살고 있었음, 그들은 전쟁에 패했으므로 노예가 되었다가 정략적 동서혼인으로 인하여 다시 왕가가 되었으니 다시 망가짐, 자신의 가문에 대한 숙청으로 남자가 없었음, 수사와는 달리 다른 대도시에서는 침략자였지만 당시의 왕이었던 그의 축음에 국상을 준비함, 그러나 장례의 목적지가 문제였으며 그를 묻는 사람에게 토제의 수단이 주어지므로 그를 머나먼 북아프리카로 보낼 필요가 없었음, 죽음의 소식이 전 제국에 퍼지고 그에 의하여 임명된 많은 권좌에 있는자들의 충성심이 시험대에 오름.
- 변방의 고수, 안티고노스(프리기아, BC323년 여름) : 안티고노스는 필리포스를 도와 攻城戰을 치르다가 한 쪽 눈을 잃은 매우 포악한 장군이었음,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늙어서인지 권력을 달갑지 않게 생가해서인지 동방으로 가는 길에 함께하지 않고 프리기아(터키 부근)의 사트랍으로 남게 됨, 그러나 바빌론에 새로 수립된 정부로부터 명령이 내려오기 시작하며 이를 거부하게 됨, 젊은 사람의 승리를 위하여 자신의 특권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음.
- 박트리아의 그리스군 폭동(아프가니스탄 북부,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BC323년 여름) : 안티고노스의 궁에서 동쪽으로 3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박트리아(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 떠나고 싶은 그리스인 주둔군이 바빌론에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림,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으로 그곳을 떠날 기회가 옴, 이들은 문학과 학문이 부족한 마케도니아인 지도자 알렉산드로스의 그리스 식 아시아 통치를 제공할 터였음, 그래서 알렉산드로스는 이 광야에 그리스 군대를 흩뿌려놓음, 그러나 이들의 임무는 힘들고 부족민들의 매복공격을 당함, 이들은 이 황량한 산악지대에서 서쪽으로 탈출하여 그리스로 돌아가는 배를 징발할 목적으로 서쪽으로 출발했으며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이 이들의 가는 길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음.
- 기로에 선 백전노장 크라테로스(실리시아[터키 남동부], BC323년 여름~겨울) : 알렉산드로스는 크라테로스를 마케도니아로 보내 안티파토로스를 밀어내라고 명을 받았음, 크라테로스는 바빌론의 군대는 혼혈이 많았으므로 노병과 아시아인 부인과 혼혈아를 데리고 가면 유럽의 충격이 클 것을 고려하여 돌아가는 길을 지연시킴, 그런데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으로 이 임무를 실행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테네의 반란으로 안티파토로스의 지원요청이 옴, 그는 망설였음, 동쪽으로 갈까?, 서쪽으로 갈까? 바빌론으로 갈까? 펠라로 갈까? 지금 같이 아마스리스와 살면 아시아를 지배하고 필라를 선택하면 유럽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되는 것이었음을 생각함(여자의 지참금이 대륙임), 그는 실리시아에서 움직이지 않음.
- 페르디카스의 청혼과 전쟁(바빌론, BC323년 가을) : 바빌론의 페르디카스도 안티파토로스의 사위(안티파로로스의 딸 니카이아를 요구했고 동의를 받음)가 되고자 했음, 동쪽(박트리아 그리스인 군대), 서쪽(애꾸 안티고노스)에서 반란, 페르카디스는 페이톤을 부유한 속주인 메디아의 사트랍으로 임명하고 군대를 주어 박트리아 반란군을 부대 전체를 없애고 약할 권리를 주어 페이톤과 박트리아의 연합을 경계하며 니카이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음.
- 이집트의 새 군주 프톨레마이오스(이집트, BC323년 가을~ 322년 여름) : 프톨레마이오스도 안티파트로스의 막내딸 에우리디케와 결혼을 원함, 페르디카스와 전쟁을 염두에 둠, 프톨레마이오스는 아테네 창부 타이스와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혼혈인 귀족 아르타카마라는 부인과 살고 있었음, 그는 카리스마는 없었지만 합리적이고 공정했음, 이집트를 억압한 클레오메네스가 알렉산드로스는 못마땅했지만 바빌론 협약에서 페르디카스는 그를 프톨레마이오스의 부관으로 둔다는 조건으로 이집트를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맡겼음(프톨레마이오스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클레오메네스를 부임하자 구실을 잡아 처형함, 페르디카스에 독립 선언을 한 것임, 또 하나의 골칫거리 티브론을 오펠라스 장군을 기용하여 물리침, 알렉산드로스가 돈에서 권력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응용하여 통치, 주화에 알렉산드로스가 인도에서 경험한 코끼리와의 전투에서 물리친 코끼리 머리 가죽을 쓴 것으로 새겨서 계몽된 합리적 헬레니즘과 괴물 같은 것이 섞일 수 있음을 형상화하여 알렉산드로스에게 동방의 힘을 부여함.
- 찬드라굽타와 차나키야의 인도 탈환(간다라/인도, BC323~318년) :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이 다른 곳보다 세 주 늦게 전해진 곳은 인도임, 당시 난다인의 지배세력과 마케도니아인을 내쫒아 보내려고 하는 움직임이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와 차나키야(별명 카우틸랴)가 등장함, 알렉산드로스가 허파에 화살을 맞고 죽었는지 알았지만 다시 살아나고 필리포스라는 새로운 주인을 만남, 인더스 강 유역의 민족들은 독립전쟁을 지속함,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의 수를 줄이기는 했지만 그들의 당당한 정신을 부수지 못함, 다섯 강이 흐르는 땅 간다라 지역은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에서 벗어남, 마케도니아인은 코끼리 500마리를 더 받고 권한을 완전히 양도함, 이 코끼리는 내전에 사용됨.
- 박트리아 폭동의 종말(BC 322년 여름) :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지 1년 만에 페이톤이 박트리아에 도착함, 페이톤의 군대는 그리스 반군과 전투 없이 교전을 끝내기로 타협함, 그러나 전리품 대열이 수중에 들어오자 페이톤은 페르디카스의 명령을 수행함.
5. 아테네인의 마지막 저항
- 히페리데스의 봄날은 간다(아테네, BC323년 늦가을) : 반마케도니아주의자 레오스테네스가 그리스 부대와의 공성 경계선에서 어이없이 돌에 맞아 죽음, 그럼에도 히페리데스는 여전히 허세를 부림,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이올라오스에게 국가훈장을 주자고 제안하기도 하며 아테네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그는 엄청난 보복을 당할 일을 함.
- 황제의 어머니 올림피아스의 모색(에피루스, BC323년 가을) :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독살을 의심하여 안티파트로스를 경멸하고 있었음, 그녀는 에피루스 지역(현재의 알바니아 남부 정도)에 사는 몰로시아인의 공주로 태어나서 필리포스와 결혼,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올림피아스는 남성 보호자가 필요했으나 그런 대상이 없어 아들의 막강한 군대를 장악하던 장군과 동맹이 필요했음, 그래서 딸 클레오파트라를 이용하는 것인데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몇 달 뒤 레오나토스에게 결혼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냄, 그런데 그리스 전쟁이 터져서 레오나토스가 돌아온다고 해도 마케도니아 권력이 잔존할지 불분명해짐.
- 레오나토스의 새옹지마(아나톨리아 북서부, BC322년 초 겨울) : 레오나토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올림피아스만은 아니었고 지루한 공성전에 지친 안티파트로스 역시 그에게 손짓을 했음, 레오나토스는 에우메네스와 함께 하자고 하였으나 에우메네스가 주춤거림, 레오나토스는 에우메네스에게 유럽을 장악하겠다는 고백을 하였으나 에우메네스는 몰래 야밤에 바빌론으로 향함, 이에 페르디카스와 정면 대결을 하게 되었으니 올림피아스와 클레오파트라가 기다리는 유럽으로 돌아감.
-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언(칼키스, BC322년) : 그는 죽으면서 유언장의 집행을 안티파트로스에게 위임함, 그러나 안티파토로스도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장군이 돌아와 구해주기 전에는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음.
- 장군 레오나토스의 낙마(마케도니아의 남쪽 곶들, BC322년 늦봄) : 레오나토스는 동방원정에 나선 이후 처음으로 고향에 돌아온 장군임, 그러나 동방에서의 삶을 생각하면 마케도니아의 왕좌가 초라해보였기에 안티파트로스를 만나러 남쪽 그리스로 향하다가 그리스 편인 테살리아 군에게 창에 찔려 죽음, 그는 결혼식이 아니라 국장을 치렀음, 동방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지만 알렉산드로스와 같이 총명한 머리가 없었기에 가장 먼저 죽는 장군이 됨.
- 히페리데스의 마지막 웅변(아테네, BC322년 늦봄) : 히페리데스는 아테네의 성벽 밖에 있는 묘지에서 관습에 따라 죽은 자의 용기를 기리는 연설을 함, 히페리데스는 레오나토스를 영웅으로 만드는 연설을 함, 죽은 병사들의 가족을 위로함, 그리고 자신이 데려온 레오나토스가 없으므로 일이 안 풀릴지도 모른다는 암시한 듯함.
- 바다로 간 전쟁(헬레스폰트 지역, BC322년 봄~여름) : 아테네가 안티파트로스를 제압하기 위해서 또 안티피트로스가 승리하기 위해서 헬레스폰트 해협으로 전쟁이 옮아감, 여기서 아테네가 완패함, 많은 함선이 피레에프스 항구에 있었으나 노와 키를 잡을 군사가 없었으니 육해전을 동시에 치를 수 없었던 것이 원인임.
- 그리스의 자멸(BC322년 여름) : 크라테로스는 실리시아에서 군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미래의 장인 안티파트로스를 만나러 감, 안티파트로스는 크라테로스와 레오나토스 부대를 흡수하여 그리스 군에게 보여주고 아테네와 전쟁을 준비함, 그리스 군은 기병대로서는 이겼지만 보병에 밀림, 아테네의 창병에 놀란 것으로 결국 그리스의 패배로 전쟁은 끝이 남.
- 전쟁의 후폭풍(테베, BC322년 여름) : 안티파토로스는 항복 조건을 협의하는 동안 테살리아의 작은 도시를 습격하여 아테네와 연을 끊고 아테네 공격을 준비함, 아테네 성벽 안에서는 민회가 다시 공황에 빠짐, 안티파트로스의 조치로 돈 많은 자들은 도시를 떠났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남아 시민권이 박탈된 채 힘들게 살아감, 그 중에 그들의 원한을 산 사람이 있었으니 플라톤의 제자 포키온으로 안티파트로스의 꼭두각시로 보이는 선행자였음.
- 도망자 히페리데스(아이이나와 코린토스, BC322년 9월말~10월초) : 히페리데스와 데모스테네스는 안티파토로스를 피하여 아이이나 섬으로 도망을 갔음, 현상금 사냥꾼들이 추적을 해옴, 히페리데스는 그곳에 남아 운명을 기다리고 데모스테네스는 신성불가침 지역인 칼레우레이라로 피신, 마케도니아를 반대하던 히페리데스의 혀가 잘려 나감, 한 그리스 의사가 그를 고향 땅, 아테네에 묻어줌.
- 데모스테네스의 비극(칼레우레이아, BC322년 10월 중순) : 수색대는 칼레우레이아로 와서 포세이돈의 성소 앞에서 데모스테네스를 불러냄, 그는 자신의 가족에게 편지를 쓰게 해달라고 하고 펜촉에 감추었던 독을 마심, 조카 데모카레스가 수십 년에 걸쳐 삼촌의 명예를 회복하여 기념상을 아테네 시장광장에 세움(고개를 숙인 매우 초췌한 모습임), 그 상의 기단에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음, “데모스테네스여, 그대의 힘이 그대의 판단력만큼 강했더라면, 그리스는 결코 마케도니아 아레스의 지배를 받지 않았으리라”, [역시 힘은 軍隊에서 나온다는 진리].
6. 프톨레마이오스와 페르디카스(아시아 서부와 이집트, BC322년 여름~321년 여름)
- 알렉산드로스의 주검은 방부처리되어 1년간 바빌론에 있었음, 영구차를 만들어 아이가이로 보낼 계획이었으나 결국 가지 못했음.
- 클레오파트라의 구애여행(사르디스, BC322년) : 레오나토스가 전사하는 바람에 클레오파트라는 장군들 중의 하나를 잡기 위하여 아시아로 감, 그중에 페르디카스가 있었으니 사르디스에 도착을 했으나 그곳을 벗어나지 못할 운명임.
- 두 신부 딜레마에 빠진 페르디카스(서아시아, BC322년 가을) : 페르디카스에게는 클레오파트라와 니카이아가 같은 시기에 오므로 묘한 정치적 파장을 일어남, 권력이 군대만큼이나 칭호와 홀에서도 나온다고 보는 군주제주의자인 에우메네스는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동생 알케타스는 친선과 일치로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여 니카이아의 결혼을 권고함, 페르디카스의 경정은 니카이와와 결혼을 하면서도 클레오파트라에게 에무메네스를 보내 새 신부를 거부하고 그녀와 결혼할 것이라고 은밀히 메시지를 전하여 시간을 벌고자 함.
- 마케도니아의 새 왕비, 아디아(서아시아, BC322년 가을) : 왕종의 하나인 키나네도 딸 아이아를 이용하여 권력을 추구하느라 장군이 아닌 왕과 결혼을 시키려함, 페르디카스는 아디아가 필리포스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으면 록사네 아들보다 우위에 있으므로 권력의 균형이 깨진다고 판단함, 그는 동생 알케타스로 하여금 부대를 이끌고 키나네 신부 호송대를 저지하여 키나네를 살해함,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마케도니아군이 반발하여 페르디카스는 아디아를 필리포스와 결혼은 시킴, 아디아는 에우리디케가 됨, 알렉산드로스의 최고위 장군들과 싸우는 여전사가 됨.
- 안티고노스와 안티파트로스의 바빌론 고립작전(그리소 북부/서아시아, BC322년 말 겨울) : 페르디카스의 행동을 안티파트로스는 주시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바빌론과 틀어졌으니 페르디카스는 이 문제를 정리하고자 안티고노스를 소환했음, 결국 안티고노스는 안티파트로스의 사위 크라테로스와 함께 페르디카스를 공격하겠다고 결심, 공격을 위하여 마케도니아를 단속하고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를 다독임, 즉 유럽과 아프리카가 단합하여 아시아에 대항함을 분명히 해둠.
- 알렉산드로스 주검 도난 사건(바빌론과 남쪽 여러 지점, BC321년 봄) : 바빌론의 한 장인이 금으로 장식한 영구차를 제작함, 시신을 운송하는 도중에 이집트의 프롤레마이오스에게 영구차를 강탈당함, 이것은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것이었음.
- 퇴짜 맞은 페르디카스(서아시아, BC321년 봄) : 이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와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공격해오고 있는 안티파트로스와 동시에 전쟁을 해야 함, 그래서 동시 2개 전선에서 전쟁을 벌이기로 하며 클레오파트라에게 청혼을 하였으나 퇴짜를 맞음, 가운데서 줄을 타는 것이 위험한 것이었을 계산을 해보았는지도 모름, 그는 올림피아스와 안티파트로스와 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했지만 우유부단함으로 둘 다 소원해졌음,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따질 겨를도 없이 군대를 모아 남쪽 이집트로 향했음.
- 그리스인 에우메네스를 견제하라(아나톨리아 북부, BC321년 여름) : 에우메네스는 동맹자이어야할 네오프톨레모스가 적과 공모하는 것을 알았음, 결국 둘이 싸우고 보병에서는 네오프톨레모스가 이겼지만 기병대에서는 에우메네스가 이겼음, 그러나 적들은 그의 승리에 코웃음 침, 이들은 다시 에우메네스와 싸울 준비를 하고 페르디카스에 대항하며 아시아를 바빌론 정권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육지와 바다에서 행동에 들어감.
- 전설 크라테로스의 몰락(아나톨리아 북부, BC321년) : 크라테로스 부대가 에우메네스를 공격함, 전투 중에 크라테로스는 전사함, 네오프톨레모스와 에우메네스가 서로 격돌함, 둘다 낙마했지만 에우메네스가 일어나 네오프톨레모스의 뒷다리를 그리고 목을 칼로 찌름, 이어서 팔랑크스의 항복을 받음, 에우메네스는 전사자들을 매장을 하고 크라테로스의 주검을 화장하는 의식을 거행함, 에우메네스는 자신의 한계를 알았기에 매우 겸손했음.
- 죽음의 나일강(이집트, BC321년 여름) : 이 사이에 페르디카스 군대는 나일 강 삼각주로 전진함, 삼각형의 정점에 멤피스가 있었고 그곳에 주검이지만 알렉산드로스도 있었음, 삼각주는 수백 년 동안 적의 침략을 무찔러오고 페르디카스의 통제력도 줄어듬, 페르디카스 군대는 강을 건넜지만 반쯤 도하 중에 프톨레마이오스 군대의 움직임을 발견함, 코끼리를 앞세워 요새를 점령하려고 밀어 붙였으나 포기함, 연달아 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도강을 중단함, 병력의 1/3이 사라지고 작전에 실패하였음, 페이톤 등 추종자 100여명이 페르디카스 침실로 가서 그를 찔러 죽임, 대륙들의 균형과 통일을 위하여 그가 만든 바빌론에 만든 타협정부는 박살이 나고 장군들은 서아시아 전체를 전장으로 만듬, 폭력은 유럽으로 번져 아테네, 그릿, 마케도니아까지 삼키게 됨.
7. 풍운아 에우메네스(이집트, 서아시아, 마케도니아, BC321년 여름~319년 봄)
- 제국은 다 흩어짐, 바빌론의 필라에도 중심이 없어짐, 제국의 진짜 수도는 공동 왕등리 머무는 곳, 나일강 동쪽 강변의 황량한 땅임.
- 실용주의자 프톨레마이오스(이집트, BC321년 여름) : 프톨레마이오스는 페이톤과 연락하여 손을 잡고 공동왕들으 후견인 자리를 아리다이오스에게 밀러줌,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는 에우메네스와 일전을 준비함, 그러나 크라테로스가 전사하자 군대는 복수를 요구함, 페르디카스의 군대는 예전의 장군들에게 복수를 하러 아시아로 돌아감,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죽고서 바빌론을 평정하지 못했음, 이들이 아시아로 돌아가면 제국은 찢어지겠지만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를 지킬 수 있었음, 그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감, 부인을 타이스, 에우리디케, 베레니케 셋을 얻음, 베레니케의 자식들이 이집트를 300년 통치하며 이들의 9대 손녀 클레오파트라 9세는 훗날 시저, 안토니우스의 사랑을 동시에 얻었으며 결국 코브라 이빨을 이용하여 자살하게 됨.
- 왕비 아디아의 권력 투쟁(이집트와 북부 여러 곳, BC321년 가을) : 록사네의 자식은 어려서 공동 통치자인 그의 삼촌 필리포스와 장군들이 형식적인 승인을 받아 일을 처리했지만 필리포스의 새 부인인 아디아는 그렇지가 않음, 전장에서도 돈이 큰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병영에서 큰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병사들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모든 불만이 그녀를 싸고돌았음, 페이톤과 아리다오스는 그녀에게 입을 다물 것을 요구했지만 모든 것이 속수무책임을 알았음.
- 트리파라데이소스 담판(BC321년 말 겨울) : 아디아가 여전히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고 있을 때 안티파트로스의 군대가 다가옴, 아디아는 페이톤과 아리다오스와 권력의 서열을 다툼, 군대는 안티파트로스에게 와서 상황을 통제하라고 요구함, 군대는 안티파트로스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함, 그는 반란군의 포로가 됨, 안티고노스가 그를 탈출시킴, 어머니로부터 단련된 호전성의 아디아는 쿠데타에 성공할 뻔했음, 이로 인하여 아시아 유럽이라는 새로운 불균형에 처했음, 즉, 새로운 제국은 자기보다 몇 배 더 큰 아시아를 속국으로 둔 유럽인가 아니면 유럽은 제국의 아시아에 딸린 부속물인가? 트리파라데이소스에서 안티파트로스와 안티고노스라는 두 건축가에 의하여 분명한 답이 없이 헬레스폰트 해협에 걸쳐있는 구조물을 설계했던 것임, 따라서 그 자식들이 20년 전쟁을 하고 BC301년에 입소스 전투에서 같은 문제를 놓고 싸움.
- 사면초가에 빠진 에우메네스(카파도키아, BC320년 봄) : 에우메네스는 사면초가가 되었음, 페르디카스는 이집트에서 죽었고 왕군이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으며 애꾸 안티고노스가 자신을 추적함을 알게 됨, 그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떠날 사람은 떠나라고 하였으나 부하들은 모두가 왕군과 싸울 것을 재촉함, 어차피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할 처지이니 적이 오기를 기다림.
- 소문, 진실, 선전(제국 전체) : 알렉산드로스가 독살을 당했다고 비난하므로 장군들을 간접적으로 견제, 가장 혐의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안티파트로스였음, 그가 독살 혐의를 벗고 가족에게 드리울 소문을 없애기 위해 “왕의 일지”를 날조했을 가능성 이 있음, 혹자는 페르디카스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데 관심을 가짐, 페르디카스가 고압적이고 잔인했던 “학살의 사나이”로 매도함.
- 신랑감 찾기에 실패한 클레오파트라(사르디스, BC320년 봄) : 강한 장군을 만나 후계자를 생산하려던 클레오파트라는 30대 중반이라 시간이 별로 없었음, 필리포스와 결혼한 아디아는 그 가능성이 높은데 기대주 레오나토스와 페르디카스가 죽었으니 남은 것은 격이 떨어지지만 에우메네스이나 그녀는 그와 한 패가 되는 것을 꺼려함, 여자들 때문에 왕의 가문이 무너지고 있다는 안티파트로스의 말에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음, 아마도 안티파트로스가 그녀를 달랬을 가능성이 있음, 그녀는 친구도 남편도 없이 홀로 그 자리에 남았음.
- 프톨레마이오스의 유대인 정복(시리아와 예루살렘, BC320년 여름) : 프톨레마이오스는 옛 전우들이 싸운 것을 이집트에 앉아서 구경함, 그가 노리는 땅은 예루살렘, 안식일을 이용하여 프톨레마이오스는 예루살렘에 무혈입성, 예루살렘 외부에서 알렉산드리아는 유대인의 중심지가 되어 유대인은 멍청하게 유럽사의 무대에 등장함.
- 분열과 결별(아나톨리아, BC320년 말 겨울) : 추방자 에우메네스와 그를 쫒는 애꾸 안티고노스와 안티파트로스는 다가올 전쟁의 조건을 이해함, 안티고노스는 엄청난 노획물로 부자임, 가난한 무법자 에우메네스는 부자들에게서 훔칠 수 있었음, 서로의 전쟁은 오히려 합동부대를 만들었으나 진영 내부에서 합의가 안되어 서로 분열하고 결별하게 됨.
- 아시아의 왕족, 유럽에 오다(아나톨리아, BC320년 말 겨울) : 아나톨리아의 먼 북쪽에서는 에무메네스의 적들, 공동 왕의 새로운 후견인들도 불화와 이반으로 괴로움을 겪음, 분열과 결별로 길어진 전쟁의 피로감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함, 더구나 코끼리라는 전쟁기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안티파트로스와 군대는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가므로 유럽과 아시아의 두 대륙을 지배하는 군주제의 실험이 끝이 남.
- 바위산 꼭대기의 600전사들(아나톨리아, BC319년 봄) :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의 배신자 아폴로니데스를 이용하여 기만극으로 에우메네스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켜 타격을 줌, 에우메네스는 전장을 빠져나가 안티고노스를 따돌림, 그러나 안티고노스가 추격을 해와 고립됨, 유럽의 사절이 와서 서로 협상을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에우메네스는 충분한 식량과 연료를 가지고 바위산 4에이커에서 다음 주사위를 기다리며 버티기로 함.
8. 고향 마케도니아로 밀려온 전쟁(그리스, 마케도니아, 서아시아, BC319년 봄~318년 봄)
- 아테네 시민들의 빈민층은 시민권을 잃음, 옛 민주정치에 참여했던 9,000명의 수가 반으로 줄어 과두정치가 시작됨, 모두 두 번의 스파르타와 싸운 전쟁의 압력 때문임, 이들이 물러나고 민주정치가 회복되었으나 그리스 전쟁 되에 다시 마케도니아 군이 억압되고 도시는 분열됨, 특권을 누리는 9천명의 다수는 과두정치에 만족하고 있었음.
- 데마데스와 포키온의 새로운 숙제(아테네) : 가난하게 자란 데마데스는 부유한 정치꾼이 되어 뇌물을 밥 먹듯 받음, 포키온은 시민권에 대한 제한을 받아들임, 포키온은 데마데스와 같이 이득의 기회는 많았지만 절제함, 두 사람의 아들들은 모두 엉망임, 조시 빈민은 투표권은 없었지만 마케도니아 주둔군에 대한 증오라는 유산계급과 대의를 공유함, 포키온과 데마데스는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이 엇갈림, 이 문제를 위해 안티파트로스에게 사절을 보내기로 하였으나 포키온은 불참하고 데마데스는 아시아로 돌아오고 있던 안티파트로스에게 가난 마지막 여행이 됨.
-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펠라, BC319년 봄) : 아시아 원정에서 돌아온 안티파트로스는 고향에 돌아와 병이 듬, 데마데스는 펠라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되어 카산드로스가 그들을 죽임, 카산드로스는 아버지의 죽음 뒤를 준비함, 아버지의 죽음 뒤에 아테네의 반란을 우려해 장례식을 끝내고 시골로 가서 반란 지지세력을 규합함, 그는 새로 손에 넣은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에게 동맹을 제의하고 헬레스폰트 해협을 확보했으며 아시아로 가서 안티고노스와 연합하여 아프리카와 같이 유럽을 공격하려 함, 해외 정복지에서 불붙은 내전이 마케도니아 본토로 뚫고 들어왔으며 이제 분열의 중심이 될 아테네에 늙은 포키온이 지키는 꼴이 됨.
- 최강자로 떠오른 안티고노스(아나톨리아 남부 피시디아, BC319년 여름) : 안티파트로스가 죽자 안티고노스가 최강자가 됨, 그는 코끼리를 가지고 있음, 안티파트로스의 죽음은 안티고노스에게 많은 숙제를 남김, 그는 에우메네스에게 조언을 구함, 많은 전리품을 줄 테니 에우메네스에게 자신의 보좌관이 되어달라고 요청함.
- 권력의 판을 다시 짜라(마케도니아와 에피루스, BC319년 가을) : 안티파트로스가 죽어가면서 경고한 것은 여자의 통치를 금하라는 것으로 올림피아스를 의식한 것임, 이를 알고 폴리페르콘은 올림피아스에게 손을 내밈, 그러나 편지가 도달하기도 전에 카산드로스가 안티고노스에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음, 폴리페르콘은 아시아로부터 닥쳐올 두려움을 느낌, 그의 전령들은 유럽을 떠나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에우메네스에게로 감, 그리고 안티고노스가 중제자로 선택한 카르디아의 히에로니무스가 이미 그 길을 가고 있었으니 갑자기 바위산이 세계 전체의 미래를 좌우할 중심으로 떠오름.
- 에우메네스에게 쏟아지는 러브콜(노라 요새, BC318년 겨울~봄) : 에우메네스는 바위에서 600명의 지지자들과 사기를 유지하고 있었음, 그러나 세상은 이 고립된 자를 제국이 가장 모시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음, 히에로니무스가 안티고노스의 서약서를 가져왔지만 에우메네스는 공동왕과 올림피아스를 안티고노스보다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서약서를 수정하여 카파도키아의 사트랍으로 돌아가서 다시 군사를 규합, 안티고노스는 서약서를 수정했다난 사실에 분노하여 체포대를 보내지만 에우메네스는 그 전에 도피함, 올림피아스가 은방패부대의 지휘권을 맡기므로 에우메네스는 변두리에서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 다시 안티고노스와 맞서는 전쟁이 시작됨.
- 포키온의 위험한 여생(아테네, BC318년 겨울~봄) : 안티파트로스의 죽음이 에우메네스를 살려주었고 폴리페르콘의 자유 포고는 포키온에게 잔인한 배신으로 다가옴, 포키온은 폴리페르콘과 카산드로스 사이에 벌어질 전쟁을 이용하여 자신의 경력을 마무리 지으려 했음, 늘 아테네와 마케도니아 사이에서 중도를 걸으며 두 나라의 평화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그 폭이 좁아짐, 카산드로스와 폴리페르콘의 싸움이 시작됨, 포키온은 여생을 보낼 피난처를 구할 뿐이었음.
- 왕의 유령과 에우메네스(실리시아, BC318년 여름) : 은방패부대의 지휘관이 된 에우메네스는 수하 장교들을 지휘하기 위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왕좌를 만들어 복원된 권위로 통솔하여 아래 장교들의 불화를 없앰, 그는 빈틈없는 심리적 통찰로 부지휘관들과 고참 용사들을 하나로 묶음.
- 심판대에 선 아테네 과두정치(포키스, BC318년 봄) : 포키온이 살 자리를 찾아 가는 동안 아테네 사람들은 과두정치 지도자들에게 복수를 원했고 그리스의 도시들은 민주화할 준비를 하고 있었음, 포키온은 명예로운 봉사에도 불구하고 이리 떼에게 던져지게 됨.
- 포키온이 마신 독배(아테네, BC318년 봄) : 포키온과 그 일행은 덮개 없는 수레에 태워져 아테네로 호송됨, 그들은 극장 안으로 끌려가서 재판을 받고 판결을 표결에 붙여 사형을 언도받음, 독배를 받음, 급진적 민주주의자들은 그의 죽음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으나 오래지 않아 그는 복권이 되고 추모조각상을 세우고 공공매장됨, 유럽의 위대한 노인 포키온과 안티파트로스가 죽자 대륙의 정치질서는 붕괴됨, 민주정치파와 과두정치파의 대립하는 두 인물 폴리페르콘과 카산드로스를 옹호자로 불러들이고 마케도니아에 의하여 파괴당하지 않은 그리스 세력의 아테네는 둘로 갈라져 폭발 직전의 혼돈으로 변함.
- 아테네 항구를 장악한 카산드로스(아테네, BC318년 여름) : 포키온이 죽은 직후 카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의 지원으로 피레에프스 항구를 통제함, 폴리페르콘은 막강한 군대를 갖고 있지만 식량을 축내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었음, 항구를 잃은 것임,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까지 행군을 해감, 이제 카산드로스는 유럽에서 작은 발판을 마련한 것임.
9. 생사의 결투(유럽과 아시아, BC318년 여름~317년 늦겨울)
- 알렉산드로스는 부하들을 잘 교육했음, 그는 부하들이 지휘와 정복에 끝없는 욕망을 갖도록 부추겼음, 그가 죽은 뒤에도 장군들은 충실하게 가르침을 실행함, 무대를 떠난 자리에 새로운 경쟁자들이 나타남, 유럽의 폴리페르콘과 카산드로스, 아시아의 에우메네스, 안티고노스 그리고 안티고노스와 앞으로 20년 간을 싸울 운명의 셀레우코스가 그들임.
- 아디아의 계산(그리스, BC318년 여름) : 아디아는 왕비로서 필리포스와 3년을 지냈음에도 애가 없었음, 그녀의 변화무쌍한 주변상황이 위험도 했지만 기회도 제공함, 아디아는 남편을 폴리페르콘의 세력권에서 빼내어 마케도니아로 보냈음, 남편의 대리인으로 일하면서 피레에프스 항구에서 웅크리고 있는 반역자 카산드로스와 손잡을 계획을 짬, 아들을 못 나을지도 모르니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이 최고 권력에 이르는 길이 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것임.
- 폴리페르콘의 코끼리(펠로폰네소스 반도, BC318년 여름) : 폴리페르콘은 정통성과 2만명의 군대와 인도코끼리를 갖고 있었음, 그들은 폴리페르콘을 따라 그리스 남부로 들어감, 코끼리가 처음으로 유럽으로 들어감, 그리스 정치판을 싹쓸이 하고자 했으나 카산드로스만은 예외였음, 코끼리를 이용하여 카산드로스를 공격하지만 그러나 바닥에 못을 박은 판자를 깔고 흙을 덮은 위장전술에 속아 코끼리가 자신의 군대를 짓 밞음, 그 이후 그리스인의 충성은 카산드로스 쪽으로 돌아감.
- 폴리페르콘 지원에 실패한 에우메네스(페니키아, BC318년 가을) : 아시아에서 마케도니아의 왕가를 지키는 임무를 맡은 에우메네스는 유럽에 있는 폴리페르콘과 연합해야 위험한 안티노고스에 대항할 수 잇을 것이라고 판단함, 에우메네스는 배를 건조하고 페니키아인들을 고용해서 노를 젓게 했으나 헬레스폰트 해협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안티노고스와 맞부딪힘, 늘 승자에게 넘어가는 페니키아인들은 에우메네스를 배신하고 안티노고스에게 넘어가므로 에우메네스의 계획은 박살이 남.
- 반으로 쪼개진 왕가(그리스, 에피루스, 마케도니아, BC318년 여름) : 카산드로스는 이제 작은 항구를 벗어나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을 접수했음, 그는 아버지가 아테네에 강요했던 과두제를 회복하고 아테네 사람들을 다시 숙청하기 시작함, 카산드로스는 군제제의 반쪽을 자신의 진영에 놓고 나머지는 폴리페르콘을 지지함, 올림피아스도 중립을 버리고 폴리페르콘의 편에 서므로 왕가의 균열이 분명해짐, 다섯 살 난 알렉산드로스가 이 운명을 알았을까?
- 에우메네스와 은방패 부대장 안티게네스(바빌로니아와 동부 여러 곳, BC318년 가을) : 에우메네스는 은방패부대가 있었지만 군대를 정비하고자 동부로 갔음, 그러나 에우메네스를 범법자이자 외지인이라 하여 협조가 되지 않음, 은방패부대 내에서 반란이 공모되었으나 부대장 안티게네스는 그에 동조 하지 않음, 안티게네스는 그리스인 지휘관(에우메네스)을 떠나지 않고 애꾸(안티고노스)와의 대결이 가져올 결과를 지켜보게 됨.
- 두 왕비의 전투(마케도니아, BC318년 가을) : 에피루스와 마케도니아 사이에 산악지대에는 두 왕비의 군대가 있었으니 하나는 올림피아스(손자 알렉산드로스와 폴리페르콘이 함께함)이며 다른 하나는 아디아(카산드로스가 없었음)임. 결국 아디아가 체포되고 찢긴 나라를 장악하기 위해 올림피아스 폴리페르콘, 알렉산드로스는 펠라로 진군함, 올림피아스는 마침내 권력을 잡음,그녀는 필리포스와 아디아를 처형함,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고 생각하는 안티파트로스 가문에 복수를 시작함, 카산드로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었으므로 그녀의 손이 닿지 않았으니 그의 일파를 100명을 처형함.
- 에우메네스와 동부 연합군의 불안한 동맹(수시아나, BC317년 봄) : 에우메네스는 올림피아스의 승리를 모르고 동부로 더 깊이 들어감, 그러나 마케도니아인 부대와 그리스인의 부대가 타협이 불가했음, 다시 에우메네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유령을 이용하여 다시 갈등을 해소함, 병력의 보수도 많이 주었지만 변덕스러운 동맹자에게는 거액을 줘야했음.
- 기습당한 기습의 달인 안티고노스(수시아나의 코프라테스 강, BC317년 여름) : 안티고노스는 동쪽으로 향했음, 그는 낯선 땅에서 에우메네스의 위치를 모르고 움직였음, 코프라테스 강에 도달했는데 에우메네스는 그보다 더 큰 10Km 건너 파시티그리스 강 건너에 위치함, 에우메네스는 안티고노스의 병력이 반 정도 강을 건넜을 때 공격하여 안티고노스에 치명타를 입힘, 이에 안티고노스는 북쪽으로 돌아 메디아로 감, 그러나 사트랍들이 서방 진군을 꺼려 에우메네스는 동방에서 싸우기로 함.
- 도망간 왕족을 포위하라(마케도니아) : 올림피아스는 정치적 지도력은 있었으나 군대 지배권은 따르지 않았음, 그녀는 군사적 지원이 줄어들자 은퇴한 아리스토누스에게 정권방어를 맡기고 피드나로 감, 그녀는 운명의 왕족 인질들을 데리고 감, 왕족들을 외부와 완전 차단함
- 대연회와 위조 편지의 리더십 대결(페르세폴리스, BC317년 가을) : 에우메네스 군대는 동쪽 페르시스로 감, 그곳은 페우케스타스의 본거지로 그는 페르세폴리스에서 에우메네스 군대를 대환영을 함, 이 의미는 페우케스타스가 군 지휘권을 놓고 자신과 경쟁을 하겠다는 뜻으로 에우메네스는 매우 곤란하여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스를 오가는 편지가 시일이 많이 걸린다는 점을 이용하여 편지를 조작함, 그 내용은 에우메네스 동맹자들이 전쟁에 이겨서 안티고노스와 싸우는 에우메네스를 위하여 동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이었음, 동시에 에우메네스는 자신의 인기가 오르면 사트랍들이 싫어 한다는 것을 알고 배신을 대비한 돈을 마련함, 안티고노스 진영에서 도망친 병사로부터 안티고노스가 메디아를 떠나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고 에우메네스는 안티고노스를 북쪽에서 맞기로 결정함, 파라이타케네에서의 결전의 시간이 다가옴.
- 파라이타케네 전투(BC317년 가을) : 유럽의 장군들은 이렇게 큰 전투를 경험한 일이 없었을 정도로 군사가 많고 코끼리가 양 진영에서 다 동원이 되었음, 그러나 에우메네스는 병이 들었음, 안티고노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몇 킬로미터를 500미터를 사이에 두고 에우메네스 군대와 대치함, 심리전과 회유로 상대방의 전선을 혼란시키며 에우메네스의 대오를 따라 잡음, 안티노고스의 좌익 페이톤이 먼저 공격을 함, 그러나 전투는 숫자보다 담력의 문제로서 은방패부대가 안티노고스 진영 깊숙이 전진함, 전투가 끝없이 진행되다가 모두 굶주리고 지쳐 양측이 합의하여 교전을 끝냄, 누가 이긴 것일까? 에우메네스는 군대에게 진을 치라고 명했지만 군사들이 거부하므로 에우메네스도 물러섬, 안티고노스가 전사자를 많이 차지한 쪽이 전투의 승자임을 선언하자 에우메네스는 자기편 전사자를 화장을 해버림, 안티고노스는 말로는 이겼지만 실제로 패한 것으로 느끼며 부하들이 다시 싸우는 것을 원치 않자 그 지역을 떠나기로 함, 그렇게 빠져나가는 안티고노스를 군사들이 지침에 에우메네스도 추격하지 않았고 다음 대결을 준비함, 에우메네스는 올림피아스와 어린 알렉산드로스의 지지를 받고 있으나 안티노고스는 아무도 섬기지를 않음, 안티노고스가 이길 경우 제국의 운영 계획은 어떨지 몰라도 박트리아인의 피가 반이 흐르는 7살짜리 소년의 명령을 받는 것이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분명했음, 대결의 결말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낌.
10. 무덤을 닫다(BC316년~308년)
- 알렉산드로스는 죽은지 6년이 지나도록 세계를 움켜쥐고 있었음, 그 뒤에는 은방패 부대의 충성심이 있었고 에우메네스는 알렉산드로스에 못 미친다는 평을 들으면서 이들에게 아부를 하여서까지도 이들을 통제해왔음, 그러나 그러한 방법은 어딘지 취약했음.
- 가베네 전투와 은방패 부대의 배신(BC316년 초 겨울) : 안티노고스는 은방패 부대에 겁을 먹었음, 에우메네스는 넓은 광야와 추운 겨울을 감안하여 전투가 일어나기 쉽지 않다고 판단을 하여 150Km의 전선에 병력을 배치함, 이를 첩자를 통하여 알게 된 안티노고스는 나무통과 군량을 준비하여 기습적으로 황무지로 들어감, 추위를 이기지 못한 병사들이 모닥불을 피우므로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여 부대를 모으고 식량을 준비하면서 메마른 황무지에서 대전을 준비함, 전투가 시작되어 벌판에 서로 다가감, 은방패부대장 안티게네스는 말로 안티노고스 부하들의 마음을 흔듬, 이에 고무된 에우메네스가 기병대를 이끌고 전진하고 안티노고스도 이를 맞이하러 나옴, 전투가 벌어짐, 그러나 은방패 부대원은 모두가 늙은 고참이었고 60~70세의 노인들이었음, 전쟁으로 가족과 재산을 잃은 이제 그들은 에우메네스의 가짜 알렉산드로스의 꾐에 빠진 것을 알고 그 간의 유대에 금이 감, 은방패 부대의 부지휘관은 테우타모스는 안티노고스와 거래를 하기로 하며 안티게네스와도 상의를 하지 않음, 그 거래내용은 보급부대와 에우메네스와의 교환이었고 에우메네스의 운명은 그날 밤에 결정되었음.
- 이단아 에우메네스의 최후(가베네, BC316년 초 겨울) : 에우메네스는 체포됨, 에우메네스는 자결할 기회를 달라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이제는 에우메네스의 출신이 증오의 대상이 됨, 그는 케르소네소스 출신으로 마케도니아인의 권력구조를 파고든 외국인이었음,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의 석방이나 처형을 결정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냄, 목력적인 방법이 아닌 굶어죽을 것을 유도했으나 죽지않자 사람을 보내 목을 졸라 죽임, 그의 유해를 화장하여 부인에게 보내줌, 은방패 부대장 안티게네스 역시 산채로 구덩이에서 태워서 죽임, 부대를 해체하고 부대원들을 아시아 전역의 외딴 주둔지로 보내버림, 안티노고스는 가장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게 됨.
- 올림피아스, 카산드로스의 덫에 걸리다(피드나와 펠라, BC316년 초 겨울) : 올림피아스는 에우게네스의 죽음을 바로 몰랐으나 구원의 손길을 요원했고 왕가는 굶기 시작했음, 구조함대가 오는지 바다를 내다보던 아직 7살이 채 안된 어린 알렉산드로스는 낟알을 배급받아 간신히 생명을 유지함, 결국 굶주림, 절망, 고립이 올림피아스의 오만한 의지를 꺾어 버림, 카산드로스에게 협상을 요청함, 올림피아스는 사형선고를 받음, 그녀의 죽음에는 여러 거지 설이 있으나 50대 중반의 나이에 죽었음, 올림피아스는 그의 아들의 죽음에 연관하여 안파트로스와 그의 아들들에게 괴상한 권력을 휘둘렀으나 그들에게 승리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여 들짐승 밥으로 대던져짐.
- 포로가 된 왕족(마케도니아, BC316년 봄) : 함께 포로가 된 록사네에게 카산드로스는 아버지와 남편을 살해한 자였으므로 증오심이 더 컸을 것임, 카산드로스도 올림피아스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 이유는 무력한 어린애지만 군주제의 미래를 대달고 있는 가느다란 실이었기 때문임, 아이를 죽이는 것이 정치적인 부담이 있었지만 동방의 안티노고스와 에무메네스를 생각하면 살려둘 필요가 있었음, 그래서 카산드로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이복 동생 테살로니케와 결혼을 함, 카산드로스는 자신의 혈통으로 왕국을 이어가겠다고 결심함, 그는 아내의 수동적인 태도와 多産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케도니아에 그녀의 이름으로 도시를 지어주었음, 오늘 날 그리스 북부의 테살로니키가 그것임.
- 낡은 왕국의 장례식(아이가이) : 마케도니아의 내전을 일시적으로 종식이 되고 동면기에 들어감, 그리고 죽어 간 왕족들의 유해를 정식으로 왕족묘, 웅대한 묘지에 매장을 함, 그러나 그가 묻은 것이 왕족이 아니고 왕국 자체였는지도 모름, 그래서 왕관을 전해 내려가지 않고 감추어두고자 했다고 여덟 살 난 알렉산드로스 4세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 자들에게는 그렇게 비쳐졌을 것임.
- 죽어서야 왕이 된 소년 알렉산드로스(마케도니아와 암피폴리스, BC315년~308년) : 겨울의 땅 트라키아에 있는 그리스 도시 암피폴리스는 록사네와 그녀 아들의 마지막 집임, 세파에 시달린 이 모자가 서이시아 전체를 거쳐, 이집트로 거기서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유럽으로 다시 그리스와 발칸 땅의 많은 지역을 거쳐 온 곳임, 이곳에 알렉산드로스가 성년이 될 때까지 격리 시켜놓는 포로로 잡아 둠, 이곳에서의 생활은 알려지지 않음, 그러나 이들을 권력투쟁에서 그냥 내버려두지 않음, 카산드로스와 틀어진 안티고노스가 이들의 왕권을 회복시키겠다고 맹세함, 알렉산드로스가 사춘기가 되어 12살이 되는 BC311년에 어린 왕이 왕좌에 앉는 순간 권력을 내려놓기로 중요한 장군 4명이 합의함, 카산드로스는 그들을 죽여서 시신이 발견되지 않도록 하라고 명령함, 따라서 이들의 죽은 날짜가 명확치 않음, 독살로 추정되며 카산드로스는 이들의 주검을 모독하지 않음, 하여튼 유럽에서 막강한 두 집안의 싸움은 즉 한 집안이 한 집안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끝이 남, 알렉산드로스의 주검은 화장되었고 카산드로스는 이들을 좋은 묘실에 안치했음, 왕가의 마지막 인물이 평화롭게 쉬고 있음, 그의 아버지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설계한 알렉산드리아 세마의 성소에 안치되어 수많은 순례자들이 그 안에서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음.
에필로그 : 알렉산드로스가 죽기 전에 태어난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헤라클레스가 있었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유일한 후손으로 권력투쟁에 벗어나기는 힘들었음, 폴리페르콘이 그를 저녁 파티에 초청하여 살해했음, 카산드로스는 항의를 피하기 위하여 주검을 몰래 묻었음, 그와 비슷한 시기에 알렉산드로스의 동생 클레오파트라도 죽음, 그녀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청혼을 받고 알렉산드리아로 떠나려하자 안티고노스가 자객을 보내 암살함, 정통성이 있는 왕족이 다 죽었으니 “가장 힘이 강한 자”에게 주권이 넘어감, 알렉산드롯가 꿈꾸었던 제국은 사라지고 권력의 야비한 이합집산으로 새로운 정치질서가 등장했지만 그것은 경쟁, 변덕스러운 동맹, 장기간의 소규모 갈등을 특징으로 하는 多極世界였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다를 것이 없음.
저자의 말 : 마케도니아 제국은 세계 최대의 규모였지만 가장 단명한 제국이었음, 이 책이 다루는 알렉산드로스 사망이후 7년 동안 어느 누구도 왕위를 승계하려 하지 않고 권력을 놓고 투쟁을 하였으며 그 기간 동안 왕족이 살아 있었지만 아르가이 가문(마케도니아의 왕족 구성원들)이 멸문지화를 입은 다음(BC308년)에서야 다수가 결국 왕좌를 차지함, 사료나 연대표, 이름 등등 논란이 많음, 날조한 것은 아님.
감사의 말 : 도움을 준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림.
옮긴이의 글 : 알렉산드로스는 맹목적인 정복의 화신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비전에 따라 제국의 내용적 통일성을 도모했던 왕으로 2천년이 지난 지금도 모르는 사람이 없음, 그러나 그의 사후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드물음, 제국이나 영웅은 가도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 모두 간 것은 아니고 남은 사람들이 이어간 이야기, 세계사의 어느 대목 못지않게 흥미진진하면서 기원전의 이야기이지만 마치 근대사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저자 제임스 롬의 역할이 컸다고 봄, 김 시간에 세 대륙에서 있었던 인문과 사건들을 사료에 입각하여 저술된 역사적 서술임에도 마치 소설 같은 느낌을 주는 대서사시로서 세상에 흔하지 않은 저서임.
주석/참고문헌/찾아보기
2016.06.19/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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