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영등포 소식

롬멜(Rommel)은 어떻게 싸웠나?

영등포로터리 2009. 12. 3. 16:33

롬멜(Rommel)은 어떻게 싸웠나?

롬멜은 1910년 7월 19세의 나이로 독일군 제124연대의 소위 후보생으로 입대했다.
그는 평화 시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나 세계 제 1,2차 대전을 통해서 군인으로서의 진가를 발휘했다.

그는 전투유공으로 20대의 청년시절에 2등 철십자 훈장, 1들 철십자 훈장 특히 1918년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훈장에 버금가는 프르 르 메리트(Pour le Merite)훈장을 받았다.


세계 제1차 대전 중에, 독일군이 불란서를 침공 중이던 1914년 8월 22일, 안개가 자욱하게 낀 아침에 위장장애의 고통을 받으면서 불란서군 진지를 단 3명의 부하를 데리고 정찰을 나갔다.
불란서 군의 진지를 찾아내 본대의 정확한 공격을 유도하였다. 그리고는 롬멜은 즉시 적의 후방 깊숙이 침투하여 독일군의 후방을 단 3명의 부하와 공격하였다.
대담하고 단호하여 약 1.000 명의 불란서 군은 그들의 후방이 차단된 것으로 오판하고 대 혼란이 일어나 마침내 패주하고 말았다.

1917년 10월 24일, 독일 오스트리아 동맹군과 이태리군 간의 전투인 카포렛트(Caporette)에서 그는 단 9명의 부하를 이태리 군으로 위장하여 적 후방으로 침투하여 이태리 장교 12명, 병사 2명을 생포하였다.
그의 최초 전과를 시작으로 독일군은 이 전투에서 150명의 장교와 9천 명의 병사를 생포하였으며, 81문의 포를 포획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제 7기갑사단장으로 개전 후 불과 2일간 전투에서 전차 100대, 장갑차 30대, 포 27문을 파괴하고 1만 여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하루에 150마일 이상을 진출하여 전격전의 신화를 창조했다.
늘 선두 전차에서 부하들을 독려하였다. 전통에 얽매인 독일군의 참모들은 그의 전투방식을 따라가는데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1941년 북 아프리카에서 롬멜은 새벽 5시면 장갑차를 타고 하루 종일 전선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경비행기를 타고, 전차나 동차 또는 걸어서 전선부대를 돌아다니며 싸우는 방법을 토의했다.

롬멜이 전선에서 건재할 때는 독일군이 패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종횡무진으로 승리를 구가하던 롬멜도 사막의 기후와 피로로 기관지가 악화되고 혈압이 비정상이 되어 오스트리아에 있는 병원으로 치료차 떠났다.


 롬멜의 장례식

롬멜이 전선에 없는 그 틈을 이용하여 물자와 인원에서 충분한 준비를 하고 때를 찾고 있던 영국의 몽고메리 군에 의해 독일군은 엘 알라마인(El Alamein) 전투에서 패했다.

평소 롬멜의 전투 중의 위치는 항상 최전선이었다. 그는 직접 전선의 상황을 자기 눈으로 보고 결단을 내렸다. 이러한 그의 전투방식은 항상 생명의 위협을 안고 있었다.
북아프리카에서 전투 중에 그는 전투기를 타고 전진이 늦어진 부대를 찾아 사막의 상공을 날아다녔다. 그 부대를 찾아낸 그는 근방의 지역에 착륙하여 전진을 독려하였다.
그때 그의 전속부관과 전령이 모두 적탄에 맞아 쓰러지는 바람에 자신이 직접 전차를 조종하여 달빛 아래 사막을 달려 사령부로 돌아오기도 했다.
북 아프리카 사막전에서 최초 롬멜에게 연패하여 교체된 4명의 영국군 사령관들은 항상 후방에서 지휘하였다는 사실은 좋은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전선 현장을 모르면 적절한 결심을 하지 못하게 되고, 절호의 기회를 상실하기기 때문이다.

제2차대전 시 노르만디 상륙작전에서 미 제82 공정사단장이었던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은 전장에서 갖는 지휘관의 위험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최초 이 전투에 12명의 보병 대대장과 4명의 연대장과 같이 참전했다. 우리가 그 지역에서 싸운 33일 동안 치열한 전투에서 불행이도 몇몇 대대가 3번이나 대대장을 바꿨다. 전투가 끝나고 재편성을 할 때 14명의 신임 지휘관만 남아 있었다.”


고려대학교 졸업 ROTC 3기. 육군중장 전역.
전 고려대학교 객원교수(손자병법과 지도자론 강의)
현 동티모르 대한민국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