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공동체를 이루어 홍해 바다를 건너 수르 광야로 나왔던 일을 지난 글에서 살폈습니다. 수르 광야 사흘 길에 물이 없어 갈증에 시달리다가 마라에서 우물을 만났으나 오염된 물이어서 마실 수 없었을 때에 백성들의 탄식과 원망이 어떠하였음도 이미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모세가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물가의 한 나무를 보여 주시는지라 모세가 그 나무 가지를 잘라서 우물에 던지매 오염된 물이 정화(淨化) 되어 마실 수 있는 물로 바뀌었습니다.
어제 글에서는 바로 그 나무에 대하여 생각하였습니다. 이름도 남기지 않은 한 나무였지만 필요한 때에 쓰임 받아 백성들을 재난에서 구하는 일에 쓰임 받았던 나무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그 나무처럼 그렇게 사람들을 돕는 일에 쓰임 받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유명하여 지는 일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고 정력을 허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 진리의 세계를 찾아 교회로 나오는 사람들까지 그렇게들 이름내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누군가의 시구(詩句)에 산허리를 지나는 구름처럼, 골짜기를 지나는 물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고 하였지만 길지도 않은 한 세상을 매임이 없이, 초연하게 살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오늘따라 절실합니다. 1300여년 전에 이 땅을 먼저 살다 간 원효 큰 스님은 자신의 호(號)를 짓기를 무애(無碍)라 하였습니다. 어디에도 매임이 없이 글자 그대로 자나가는 구름처럼, 흐르는 물처럼 살다 가고파서 무애라 하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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