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영등포의 삶

[스크랩] [서성이는 이]

영등포로터리 2016. 10. 31. 00:11

[서성이는 이]

집을 향하는데 아파트 문 앞에서 누군가가 서성인다. 얼마 전에 거수자가 나타나면 112나 경비실로 신고를 하라는 공고문을 본 기억이 나서 혹시 거수자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 사람은 출입문의 비밀번호를 몰라 문 앞에서 서성이는 거수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비밀번호를 누르려는 것이 아니고 여닫이 자동문을 좌우로 열려고 무작정 시도하는 것이다. 내가 문을 열면 되니 신원을 확인하려고 어디 사느냐고 물었지만 그 사람은 대답 없이 문만 만지작 거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결과 런닝셔츠만 달랑 입은 나신으로 주변은 엉망인 것이 술에 취해 무엇인가를 회피하려고 하며 통제되지 않는 몸놀림으로 부단히 허우적거리고 있음을 보았다. 얼추 나이는 70대 중반이나 80대로 보이는데 과음을 한 탓에 자신도 모르게 집밖으로 나왔다가 자동문이 닫히는 바람에 그것을 열어보려고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지금으로서 내가 취할 행동은 경비실에 연락하여 그 사람의 신원을 확인해서 보호자에게 넘겨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그 자리에 서있으라고 일러두고 주변을 순찰하던 경비에게 알려서 신원을 확인하여 그 집으로 경비가 데리고 가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나 역시 주차장을 통과해서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누구의 차인지 조수석 밖에 슬리퍼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음을 본다. 어찌된 영문일까? 상상을 해 본다. 아마도 저 주차면에 차를 대놓은 사람의 집사람이 슬리퍼를 신고 와서 차안에 있는 예비신발을 갈아 신으며 그냥 문을 닫고 출발을 했는데 그 자리에 지금 서있는 차가 들어와 주차를 한 것이 아닐까? 정말 정신을 어디엔가 저당 잡히고 다니는 사람이 참 많은 세상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니 나 역시 실소를 금하지 못할 옛 추억이 하나 떠오른다.
1976년 초여름 날(유월 초순 경으로 기억됨)이었던 토요일이었다. 토요일은 오전 수업만 있는 날인지라 학교에 재학 중인 선후배 동문들이 모여 학교 인근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동문회합을 갖고 나서 선배 2명과 같이 2차를 막 끝내 오후 세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상대를 다니는 선배가 자신의 하숙집에 가서 3차를 하자는 제안을 하였고 그에 동의를 하여 셋이 신촌시장을 출발하여 신촌역(현재의 신촌기차역)을 지나 이화여대 정문 방향 왼쪽에 있는 하숙집으로 갔다. 우리 셋은 다시 의기투합하여 소주(당시는 소주 도수가 25°임)를 사다가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마셔댔다. 선배들은 군을 다녀왔지만 나는 당시에 ROTC 후보생이었다. 그러던 중 행정과를 다니던 한 선배가 집에 가겠다며 나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대로 보내서는 안된다며 하숙방을 박차고 일어나 그 선배를 잡으러 골목 어귀까지 갔으나 그 선배 역시 술에 너무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며 벌써 길 건너로 사라지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잘 가시라고 손을 흔들고 하늘을 보니 화창한 초여름 긴긴 낮의 태양이 아직 작렬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선배의 하숙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골목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내 앞에 펼쳐진 골목길 풍경에 나는 아연실색을 하고 말았다. 사연인즉 그 하숙집 골목에는 한옥집 대문이 양 옆으로 수십 채가 줄을 서있는데 가옥의 구조가 하나 같이 똑같은 것이었다. 도대체 내가 어느 집에서 나왔던가? 지금 같으면 휴대전화로 확인을 하면 되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문명의 이기가 불행이도 없었다.

아! 도대체가 내가 어느 집에서 나왔던가?
누부신 태양은 뜨겁게 작렬하는데 하얀 ROTC단복을 입고 술에 만취된 내가 골목길에 서서 서성이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정말 망연자실 그 자체였다.
순간 여고생이 골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여고생을 붙들고 혀가 잔뜩 꼬부라진 말투로 "학생! 내가 어느 집에서 나왔는지 알려줄 수 있니?"하고 묻고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길을 가던 여고생이 내가 어느 집에서 나왔는지 알 턱이 있겠는가~
비록 나보다는 서너 살 나이가 어린 여고생이었지만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다보던 것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만취했음에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실례를 무릎쓰고 집집마다 들어가 확인을 한 다음에야 겨우 선배의 하숙집을 찾아 다시 술판을 벌이고 말았으니 아무리 객지생활이지만 외박을 한 것이었다. 나는 용두동에 기거를 하였기에 다음 일요일날 쓰린 속을 움켜쥐고 양말도 잃어버린 채 맨발에 구두를 신고 집으로 돌아와 지금은 평택에 사시는 이모님께 혼났던 기억이 있는데 이는 정말 실소를 금치 못하는 나의 아련한 그러나 참 부끄러운 추억이다.

그때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그 여고생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최근에 신촌기차역 근처를 월요일마다 가는 일이 있어 그 골목을 찾아봤지만 동네 자체가 재개발이 되어 흔적을 찾을 수가 없으니 이 또한 세월의 무상함이다.

https://youtu.be/SbHJnd2WAFk

2016.10.30/해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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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돌고도는 영등포 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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