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패망을 다시 생각한다.(2-2)
월남의 패망.
1975년 3월 10일 새벽 2시, 월맹 공산군이 침투한 프락치와 연계하며 총공세를 했다. 월남은 자유세계의 기대를 저버리고 1975년 4월 30일 공산군에게 패망했다. 끊임없는 분쟁과 부정부패로 나라 전체가 뿌리부터 흔들리더니 월맹군의 기습 공격에 공격을 당한지 51일 만에 세계 4위의 전투력을 갖고도 모래성같이 무너졌다. 월남의 정치인, 군인, 경찰, 학생, 종교인 언론인, 노동자, 스스로 재야 민주세력 그리고 중도를 자처하던 사람들의 무지 때문에 내부부터 무너졌기 때문이다. 공산당과의 협상은 허상이고 그들의 전술에 속는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중부지역에서는 전투력이 강한 사단이 패닉 현상으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포로로 잡힌 월남 군 전차와 공병부대의 전투원은 월맹군 모자로 바꿔 쓰고 전차를 몰고 월맹군 선두에 서서 지뢰밭을 개척하고 어제의 전우에게 전차포를 발사했다.
월남의 인간개조 재교육 수용소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과 경찰은 무장 해제되고 지도층 인사는 전부 체포되어 “인간 개조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무려 8년간 전 세계와 문을 닫고 인간 재교육을 시켰다. 과거 군 막사를 개조해 수용소로 사용하고, 특히 각 성마다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수용소를 밀림에 설치하여 외부와 연락을 단절하고 월 9kg의 쌀만 지급하고 자급자족하도록 했다. 의약품 지급이 중단되어 열병과 풍토병으로 쓸어졌다. 화폐를 개혁하고 전쟁 상환비를 거두어 들였다. 희망을 잃은 지식인이 자살하고 미래를 포기한 폐인이 되었다. 외부 세계의 비판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월남의 지식인을 제거했다.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하던 지식인, 종교인, 학생과 민주인사도 체포되었다. 수감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 같은 짓을 하기 때문이다> 이었다.
많은 월남인이 처형되었고 그 수는 수 십 만 명이다. 뇌물을 주고 작은 배를 타고 바다로 탈출했다.
소위 보트 피플이다.
그 숫자는 약 106만 명, 그 중 11만 명이 바다에 빠져 죽거나 굶어 죽었고, 해적에게 강탈당하고 죽었다.
나라의 안위는 팽개치고 분열을 계속하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청년은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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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나라의 안전보장은 미국과의 방위공약도 아니고, 공산당과의 휴전협정도 아니고 오직 나라를 지키겠다는 국민의 단결된 의지와 국방력뿐이다. 폐 타이어로 만든 신발을 신은 거지군대에게 월남은 패했다.
큰 교훈
월남의 패망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1975년 4월 30일 월남은 패망했다. 34년 전 그날을 기억하면서 챙겨봐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북에 핵과 화생무기 등을 갖추고, 4대 군사노선으로 강한 군대를 준비해 두었다가 통일전선 전술로 후방을 흔들어 혁명의 성숙기가 도래하게 만들었다가 적화통일을 하겠다는 북의 대남전략은 월남 패망 시와 똑 같다. 월남의 패망을 거울로 삼아 나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한 때라고 본다. 6.25 때, 남한에서 활동한 남로당 인원 50만이 부풀려 북에 보고한 북한 동조자가 남한 인구보다 많았다고 한다. 이들의 부풀린 정보로 서울만 점령하면 전국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나 쉽게 대한민국을 정복할 수 있다는 오판이 전쟁을 일으켰다. 지금은 6.25 때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북한 동조자라고 하는 기사를 읽었다. 월남패망의 경우를 거울삼아 북이 바라는 혁명의 성숙기가 도래하지 않도록 내부 단속을 더 잘 해야 한다.
<내부의 적이 총을 든 적보다 더 무서운 적이다.>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글쓴이 : 서 경석 1965년 고려대학교 졸업.육군중장전역(ROTC3기) 현재 고려대학교에서 손자병법과 지도자론을 강의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