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영등포 소식

고인 물은 썩는다.

영등포로터리 2009. 9. 11. 08:04

고인 물은 썩는다.

몽골은 제국 성립 후 170 여 년, 칭기스칸이 죽은 후 150년 만에 몽골제국은 몰락했다. 몰락은 했으나 칭기스칸의 나라는 멸망한 적이 없다. 그들은 왕조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굳이 말을 하자면 그들이 출발했던 곳으로 양을 치고 말을 기르던 곳, 고향으로 돌아갔다.
칭기스칸은 왜? 초원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나?

이유 하나: 머스킷(Musket)즉 구식소총 때문이다.
총은 원래 대포에서 시작하여 손으로 쏠 수 있도록 소형화하여 사용하였다.
초기의 총이 우스꽝스럽긴 했어도 총의 등장은 몽골제국의 퇴각을 알리는 신호였다.
몽골 유목민이 세계를 정복한 무기는 말 탄 푸른 늑대군대와 그 군대의 기동성과 속도였다. 그들은 날이 선 반달형의 칼과 멀리 날아가는 화살촉을 사용해 문명국가를 정복했다.
기동성을 제공한 말이 적탄에 맞아 고꾸라진 것이 아니다.
말들이 처음 듣는 총소리에 놀라서 겁을 집어먹고 병사들 지시에 따르지 않고 제 멋대로 도망을 쳤다. 총의 등장으로 말을 타던 몽골제국은 역사의 전면에서 밀려나 옛날 고원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결정타적인 원인이다. 총과 화약을 먼저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화약과 총을 든 유럽이 동양과 아프리카를 지배하는 시대가 오고 말았다. 현실에 안주하고 화약과 총을 챙기지 않았다.
말과 칼로 만족하고 있을 때, 그 고인 물은 곧 썩었다.

이유 둘: 후계자 경쟁.
몽골제국이 쇠퇴한 결정적 이유 하나는 소모적인 후계자 경쟁이었다.  유목 기마민족은 여러 부족의 연맹체였다. 권력 중심부가 흔들리면 해체속도도 빠를 수밖에 없었다.
원(元)나라를 포함한 몽골의 칸 국들이 역시 왕권 계승문제에 휘말려들었고 이는 결국 제국을 멸망시키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였다.
칭기스칸은 흡혈박쥐에게서 협력을 배웠다. 병든 박쥐가 사냥을 나가지 못하면 동료박쥐가 먹고 온 음식을 일단 소화하기 좋게 만들고는 돌아와 아픈 박쥐에게 입으로 전달했다. 그 모습을 보고 칭기스칸은 몽골인은 협력이 없이는 다 죽는다는 교훈을 배웠다.
그래서 협력으로 몽골 대국을 건설했다. 그런데 후계자 경쟁에서 협력이 무너졌다. 몽골제국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유 셋: 정체성 상실이다.

“내 자손들이 비단 옷을 입고 벽돌집에서 사는 날 내 제국이 망할 것이다.” 칭기스칸의 말입니다.
그러나 몽골제국의 후대 지도자들은 끝내 이 충고를 되새기지 못했다.

소수인 몽골사람들은 다수의 피정복민을 지배하기 위하여 정착지역에 생계의 근거를 두었다.

수렵과 유목성 생활을 스스로 버리고 한 곳에 정착하다 보니 정착민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를 잘 모른다.

정착은 안주(安住)를 가져왔고, 유목민의 특성인 이동과 속도 및 용감성이 추락했다.

안주는 지도층의 부패를 가져오고 패거리가 생기고 내 것을 챙기기 시작했다.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유 넷: 재정의 고갈이다.
제국은 창업 초기에 창업공신들에게 엄청난 지분을 할당했다. 그리고도 예속민이나 대상(隊商)들에게 무한한 재산축척을 허용하다 보니 막상 몽골 정부는 지분을 잃어버렸다.
운남의 은(銀) 채굴권은 주원장을 비롯한 한족 반란군에게 넘어갔고, 소금 전매 등 황실의 자금줄이 분산되었고, 각 지방의 세금은 제후들이 차지했다.

초기 몽골군은 계속 이동을 하다 보니 무엇이 쌓이지가 않았다.
늘 긴장을 하고 이동과 속도와 말로 달리던 몽골군이 정착을 하다 보니 흐르는 물이 정지하면 썩듯이 제도나 운영이 모두가 썩어가기 시작했다.
방대한 지역을 통치하다 보니 군대도 토호들에게 분산되어 버렸다. 명령이 있어도 먹혀들지가 않았다. 군량과 전비를 댈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은 뻔했다. 그들이 처음 시작했던 몽골 고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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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에서 벗어나라. 안주하면 썩는다. 썩으면 망한다.

글쓴이 : 서 경석
1965년 고려대학교 졸업.육군중장전역(ROTC3기)
현재 고려대학교에서 손자병법과 지도자론을 강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