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모던타임스/Modern Times]
[모던타임스/Modern Times]
폴 존슨(Paul Johnson) 지음 / 조윤정 옮김
제1장 : 상대주의
1) 의도하지 않은 결과
- 현대 세계는 1919년 5월29일 시작되었다(우리가 식민통치하에서 3.1독립을 외칠 때임).
- 아인슈타인이 E=mc²으로 요약되는 일반상대성이론이 증명된 날로 뉴턴의 고전물리학을 뒤엎은 날로서 사람들에게 불안과 모호함을 안겨주었다.
- 과학천재들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정치, 군사지휘관보다 인류에 더 큰 충격을 준다.
. 갈릴레오의 경험주의 : 과학혁명과 선업혁명의 기초가 된 17세기의 자연철학을 탄생시킴
. 뉴턴의 물리학 : 18세기 계몽주의의 근간, 현대 민족주의와 혁명정치를 탄생시킴
. 다윈의 적자생존 : 계급주의라는 마르크스주의와 히틀러의 인종철학을 탄생시킴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 핵개발과 도덕적 상대주의를 불러옴
=> 유대-기독교 문화의 도덕과 신념이라는 전통적 뿌리에서 서구사회를 잘라냄
-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으로 프로이트 심리학을 보급했다.
. 참호전에서 받은 포탄쇼크는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 장애 초래하여 매우 용감하게 싸우고 훈장을 받은 훌륭한 가문의 사람이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현상을 해석함
. 프로이트는 반론을 자기이론으로 전환하여 모두 수용하므로 칼 융이나 헤이블록 앨리스 같은 비판자를 이단으로 취급하여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치료가 필요한 사람으로 간주 => 반대자를 강제수용소에 처넣는 히틀러 및 소비에트 식 정치억압을 등장시킴
-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는 지식인과 예술가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 모더니즘(기존의 도덕, 권위, 전통을 무시하고 새롭고 혁신적인 문화의 창조를 추구하는 예술상의 경향과 태도),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라는 작품은 19세기까지의 소설 개념을 타파한 소설(섹스, 사디즘, 방뇨 등)이 출간됨, 등등
- 1920년대에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은 동일한 메시지를 퍼뜨렸다. : 개인적인 책임감과 19세기 문명의 중심이었던 객관적인 도덕규범에 대한 의무감을 무너뜨림으로 사람들은 쉽게 도덕적 무정부주의에 빠짐
2) 도덕적 무정부주의
- 1차 세계대전은 로마 멸망 이후 인류에게 가장 큰 재앙이었다.
- 독일에 만연한 염세주의(두려움과 야심으로 전쟁을 원함), 독일 제국의 총리인 베트만 홀베크가 음울한 만족감 속에 독일과 유럽을 깊은 늪으로 끌고 들어갔다고 비서 크루트 리츨러가 기록했다.
- 비관주의에 빠진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서 “전쟁은 인간의 본질을 바꾸어 놓지 못한다.”고 오직 조지프 콘래드(1857~1924)만 설파하였다.
- 전쟁은 정연한 진보의 개념을 없애버린 도덕적 무정부를 잉태하여 도덕적 타락을 불러왔을 뿐이다.
- 처칠이 지적했듯이 교육수준이 높은 강대국이 저지른 행위가 곧 전쟁이었다.
. 국가가 커지면 파괴능력도 커지고 억압적인 성격도 강화됨
. 비스마르크 시대부터 복지제도를 확충한 독일정부총수입이 18%로 가장 큼(미국의 2배)
. 일본과 러시아도 군사적 제국주의를 목적으로 정부총수입을 키워나감
- 전쟁을 예찬하던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1916~7년 겨울이 되자 예찬론이 사라졌다.
. 끝없는 전쟁에서 피투성이가 된 젊은이들이 환상에서 깨어남
. 1917년, 미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전쟁으로 국가존망의 기로에 서게 되어 더욱 더 야만적인 전쟁을 치달음
. 좀 더 나은 강화조건을 끌어내기 위하여 독일은 1918년11월 9일 빌헬름2세를 쫒아 내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Karl I) 황제도 3일 후에 퇴위, 러시아의 로마노프 일가는 7월16일 살해됨, 터키의 술탄(Sultan)제 또한 최후를 맞이함
3) 민족자결주의와 비밀 조약
- 왕과 지주가 지배하던 제국의 해체는 이때까지 면밀히 통합해 놓았던 이질적인 민족의 분열을 초래했다. : 각 국가의 인구조사 결과는 다양한 민족으로 한 국가를 구성
-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경향이 강해졌으며 각국 정부는 전쟁의 수행을 위해 특정 민족에 대하여 민족국가의 건설을 보장(민족자결주의)하는 비밀증서를 남발하였다.
. 특히, 레닌과 볼셰비키는 러시아를 장악하고 차르(Tsar) 시대의 외교문서를 입수하여 유럽 전역에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위하여 민족자결을 이용
. 이에 자극을 받은 미국도 구태의연한 약탈자의 오명을 벗기 위해 점령지 반환, 민족에 따른 영토 귀속 등의 처리
- 승전국에 대한 보상과 패전국의 배상 그리고 국제연맹기구 설립했다.
4) 강요된 협상
- 독일제국과 연합국 사이에 맺어진 베르사유 조약(1919.06.28)은 미국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로부터 비판(너무 가혹하다와 너무 봐주었다)을 받았다. 특히, 영국 대표단의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는 중도사퇴를 하며 그 내용이 “정당하고 영속적인 전쟁의 토대(결국은 그의 말이 맞았고 결국 2차 세계대전을 맞이함)”라고 말했다.
- 그 내용은 국제연맹, 국제노동기구, 유럽의 평화유지, 독일과 그 동맹국들의 전쟁책임, 영토분할, 정책/정치/외교, 군 관련, 경제관련, 식민지 포기 등이었다.
- 서명당사자 : 독일은 패전국으로 지도자가 없었고(따라서 서명권도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 즉 강요된 협상) 러시아는 전장에서 떠난 상태였으며, 4개 승전국 지도자들(프랑스 조르주 클레망소, 영국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수상, 이탈리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서명했다.
- 미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負債국으로 전락하여 결국 1922년12월26일 독일은 조약 부칙 II 17~18절에 의거하여 채무불이행국가로 선고받고 채권국은 영국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벨기에가 군대를 동원하여 라인 강을 넘어 루르지방을 점령하였고 독일은 이에 파업을 하였으나 궁극적으로 독일, 프랑스 모두에게 정치적 영향은 비통한 것이었다.
5) 인종 민족주의
- 베르사유 조약이 실패작이라고 당시의 지식인들은 그렇게 인정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종 민족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였을지라도 내부적으로는 인종간의 갈등이 심했다. 그래도 그곳에는 법치가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모든 것을 바꾸어 폭력을 불러왔고 이는 중부와 동유럽에서 극심하고 광범위하게 지속이 되었다. 발칸반도는 인종을 청소하는 곳이기도 하고 언제라도 전쟁이 터질 수 있는 화약고이다. 베르사유 조약은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고 이 비타협적 민족주의는 히틀러와 스탈린이 무력으로 제압할 때까지 유럽에 머물렀다.
- 민족자결주의는 유럽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원주민에게 자결권을 준다면 대영제국은 어찌될 것인가? 가혹한 전쟁 중에 연합국은 전쟁에 동원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약속어음을 써주고 있었다. (우리의 3.1운동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정말 그랬을까? 그랬겠지! 꿰어 맞춘 것은 아니겠지~)
- 그렇게 전쟁으로 사상자가 늘어갈수록 그 공백을 식민지에서 동원된 인력이 담당했는데 이를 위하여 오직 “정치적 국민”에 관심을 갖고 인도의 “진정한 국민” 4억을 대상으로 자신의 박애주의를 실험을 했고, 레닌 역시 노동자의 이름으로 노동자에게 의견을 구하지도 않고 거대한 국가를 전복시켜버렸다.
-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에는 그 넓고 광활한 세계도처의 식민지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식민지에서의 19세기 틀이 깨졌다.
- 19세기 상상력이 풍부했던 위대한 독일학자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가 인간행동의 동인(動因)을 분석을 했고 1918년 이후의 세계는 그들의 생각을 이어받았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유럽의 그림자가 된 이 종교적 동인이 약화되고 소멸되는 사건은 선진 국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공백을 남겼으며, 이 공백을 메우는 것이 현대의 역사가 할 일이기도 하다. 이에 니체는 이 공백을 메울 유력한 후보가 “권력에의 의지”가 되리라고 생각을 했다. 이 의지는 새로운 종류의 메시아(전체주의적 정치가)를 낳고 이 메시아는 어떤 종교적 구속도 없이 꺼질 줄 모르는 욕망으로 인류를 통제하려들 것이라고 보았다.
제2장 : 전제주의와 유토피아
1) 권력의지와 마르크스주의 이단
- 레닌은 공산주의 혁명을 하기 위하여 1917년 4월 8일 러시아로 돌아온다. 레닌은 종교를 하찮게 여긴 마르크스와 달리 종교를 증오했다. 그가 종교를 싫어했던 이유는 부패하여 착취자 편에 서있는 성직자보다 프롤레타리아 편에 서서 그들과 연대를 표하는 성인(聖人)들이 더 영향력을 갖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이 심리를 독차지해 종교적 열정을 권력의 의지로 바꾸어 놓은 사람이다. 그가 더 오래 전에 났으면 성직자가 되었을 것이다. 레닌은 철저한 금욕주의자였고 자신이 상대하는 동지들은 사상을 담는 그릇으로 보았다. 그의 모든 열정은 정치투쟁이었다. 그는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에게서 나온 심오한 과학적 지식의 산물이라고 생각했고 그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닌 이들과 일생을 보냈다. 그는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한 루이14세와 같은 국가관을 갖고 있었고 멘진스키는 그를 정치적인 책략가, 러시아 절대왕정의 사생아라고 불렀다. 사회민주당에서 볼셰비키라는 자신의 분파를 만들어 나온 그는 “계급은 당이 지도하고 당은 지도자라고 불리는 개인이 지도한다.”라고 생각했으며 칼뱅이 그랬듯이 이교도보다 이단을 더 가혹하게 다루고자 한 그는 당내의 반대세력을 악의적으로 비난하고 도덕적으로 몰아세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정통성을 주장했지만 그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몰아넣어 자신을 합리화한 주의주의(主意主義)자로서 인간의 의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그 인간은 바로 자신인 것이다. 혁명은 억압받는 계급들의 축제라고 주장한 레닌은 지나친 행동가였으며 군사용어를 많이 사용한 권력지향자이기에 정통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는 못했다.
- 러시아 혁명 이후 당시 러시아는 反산업국가로서 부르주아 계급은 약했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수가 적었다. 그래서 레닌은 ‘전위투사’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이 외부로부터 의식을 프롤레타리아에게 불어넣어줘야 한다고 하며 혁명을 밀어붙여야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주의는 단순히 이단일 뿐만 아니라 파시즘을 낳은 이단과 정확히 일치했다. 反산업국가였던 이탈리아도 혁명을 앞당길 방법을 찾고 있었으니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가 이런 생각을 받아들였다. 무솔리니는 책을 레닌보다 많이 읽었는데 여기에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가 포함되었다.
- 마르크스주의의 이단이자 폭력적인 혁명 활동가로서 레닌과 무솔리니는 첫째 부르주아 의회와 어떤 개량주의에도 반대했고, 둘째, 당이 사회주의라는 목표를 향하여 고도로 집중화되고 엄격한 규율과 위계로 이루어져야 하고, 셋째, 직업혁명가들의 주도권을 원했으며, 넷째,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자신을 조직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고, 다섯째, 자칭 엘리트 혁명가를 통하여 의식을 외부에서 대중에게 주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마지막으로 다가올 계급투쟁에서 준비된 폭력이 최종심판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세계대전은 레닌주의와 무솔리니의 원형적 파시즘의 분기점이 되었다. 무솔리니는 행군하는 군홧발 아래에서 민족주의의 향기를 느꼈고 레닌은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국가라는 것으로부터의 권력(정치권력)을 추구하고 있었다.
2) 러시아 혁명의 실상
- 1917년에 페트로그라드에 돌아왔을 때, 전쟁은 부르주아의 모험이라 말한 레닌은 차르 타도는 최소 목표이고 “자본가 계급의 붕괴를 앞당기는데”라는 그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3월5일 발간된 ‘프라우다’지의 편집을 맡은 카메네프와 스탈린이 전쟁을 지지하는 노선을 취하자 레닌은 호된 면박을 주었다. 볼셰비키도 대부분 레닌의 테제(These, 논리를 전개하기 위한 최소한의 명제)에 동의했다. 단지 전쟁은 전제주의 국가를 무너뜨렸다. 이를 이용하여 의회주의자를 내쫒는 일에 몰두한 레닌은 러시아 영토를 얼마든지 잃어도 관계치 않았다. 독일이 전쟁에 승리를 한다고 해도 곧 전 유럽에서 동지들이 권력을 잡아 사회주의 혁명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트로츠키가 그의 보좌역을 맡았고 2만 명의 지지자들을 확보했지만 대다수의 국민이 농민이고 도시노동자 등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해당되는 수는 1,500만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의 기반이 대부분 농촌으로서 도시와 연계하여 농촌에 급진사상을 전파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전쟁은 농민을 병사로 징발해갔고 농촌은 피폐해졌는데(1916년 12월까지 농민반란이 557회 발생) 나중에 이러한 상호간의 증오를 볼셰비키는 교묘하게 이용을 했다.
- 농촌이 피폐해지고 식량이 부족해지자 공장근로자들로 파업을 강행하였으나 이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농촌 출신 병사가 거부하고 장교들에게 반항을 하여 1917년 2월 차르체제는 붕괴할 수밖에 없었으니 러시아 혁명의 첫 단계는 농민이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전제체제의 붕괴는 농촌의 위계질서를 파괴하였으나 러시아 임시정부의 내각 케렌스키 총리가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혼란이 가중되어 농촌에 대하여 전혀 몰랐던 레닌이 어부지리로 농민세력과 연대를 하게 되었다. 10월이 되자 식량가격폭등, 파업, 군 반란 등으로 케렌스키 정부는 치명상을 입었다. 레닌이 권력을 잡을 시기가 온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원한 것은 세상을 뒤엎는 것이 아니고 생활개선이었다. 소비에트란 러시아어로 평의회라는 뜻이며 마르크스 문헌에도 없던 소비에트의 출현에 당황한 레닌은 7월 소비에트 대회에서 소수파로 전락하였으나 이 대회가 정부군에 의하여 해산되며 숨어 지냈고 트로츠키는 투옥이 되었다. 10월이 되자 소비에트의 다수를 차지한 볼셰비키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명에 나섰다. 석방이 된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의 집행인이었고 레닌은 배후조종자였다. 다시 말해서 레닌이 권력을 장악한 방법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고 쿠데타였다. 11월 선거를 통하여 볼셰비키는 다수당이 되었고 레닌은 1918년 1월5일 제헌의회의 첫 회의를 열기로 하였다. 이는 자신의 법적인 정통성을 얻기 위한 음모였다. 레닌은 권력을 잡은 지 이틀 만에 언론의 자유를 끝장냈다. 레닌은 폭력이 혁명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믿었고 혁명인민정부의 특성에는 선과 테러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했기에 테러는 즉각적이고 엄중하며 확고한 정의와 같다고 했다. 마르크스는 이에 무한한 지지를 표명했다. 하지만 1918년 12월 독일공산당 강령에는 테러를 필요로 하지 않고 살인을 증오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차르의 독재체제와 러시아의 야만적이고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를 배경으로 했을 때 테러는 유혹이 될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김일성이 이들에게 배웠으니 지금의 북한이 있는 것이고 동족상잔, 6.25를 치르고도 현재 대한민국에는 지금 같이 좌빨이 준동하는 것이다.]
3) 비밀경찰과 전제정치
- 레닌의 등장으로 인한 가장 큰 비극은 사라져가던 러시아식 야만통치방법이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볼셰비키 군대는 원래 트로츠키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였고 트로츠키는 혁명을 성공한 뒤에도 계속해서 무력을 행사했다. 이는 안보를 담당하였으며 사보타주, 공급물자은닉, 고의적 운송지연 등을 처벌하는 것으로 1917년12월 7일 군사혁명위원회가 해체되었지만 제르진스키가 맡고 있던 위원회는 “全러시아비상위원회(Cheka)"였는데 그 존재가 비밀경찰로 남아있었고 1917~18년에는 한 달에 1,000명을 처형했다. 레닌의 혁명재판소는 차르 체제보다 더 극악무도 했고 체카가 운영한 강제노동수용소는 나중에 ‘수용소 군도’로 발전을 하며 체카는 1920년 말까지 50,000명을 사형에 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레닌은 개인적 죄의 개념을 포기했고 유대-기독교적 윤리 전체가 무너진 것이다. 레닌은 전체 계급을 ‘말살'하기 시작했고 이는 인종이든 계급이든 집단학살의 원조가 되었다. 러시아의 민주주의는 이렇게 파괴된 것이다.
- 처칠을 제외하고 당시 세계의 정치지도자들이 레닌의 독재를 간과했다. 엄청난 국토면적의 심장부에 독재가 심어지는 것을 처칠만 걱정하며 레닌과 트로츠키의 처형을 정책목표로 삼고 볼셰비키의 러시아가 “대단한 군국주의적 국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민족자결주의를 인정하고 주변의 소국들을 예전의 러시아 제국의 족쇄에서 풀어주려고 했고 그것을 실행하려고 하고 있었다. 레닌은 주변의 민족 집단과 농민에게 아낌없이 약속어음을 써주었다. 그러나 이의 지불에 대한 거절방식은 레닌에 의해 나왔지만 그것을 실천한 사람은 스탈린이다. 레닌에게 그가 조종할 수 없는 의회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인 반면 조종할 수 있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였다. 그렇게 떨어져나간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들은 소비에트 권력이 강해진 후 다시 돌아왔고 우크라이나 같은 프롤레타리아 같은 국가들은 연방으로 편입이 되었다. 스탈린은 이런 수법을 아시아에서도 써먹었다. 결국은 민족자결권도 부르주아가 아닌 노동 대중의 것이고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수단으로 이용되어야 했다. 즉 프롤레타리아적이어야 했다. 스탈린은 민족적 소속감보다 당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관리를 민족문제에 끌어들였다. 레닌은 그렇게 차르 제국을 다시 건설했고 스탈린은 그것을 더욱 확장시켰다. 이른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蘇聯)”이라 명명되었고 이는 러시아 제국의 가면이었다. 헌법이 마련되었지만 그에 관계없이 모든 권력은 소수지배집단의 손아귀에 있었다.
4) 순종적 침묵이냐 감옥이냐
- 레닌이 만들어낸 독재체제는 상세히 기술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그 후 60년 동안 이어지는 다른 독재체제의 음울한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 레닌의 목적 : 당 밖의 모든 반대세력을 물리친다, 모든 권력을 당의 수중에 둔다, 당내 모든 반대세력을 무찌르는 것이다, 당의 모든 권력을 자신과 협력자들에게 집중시키는 것이다.
. Cheka는 모든 당 밖의 반대세력을 척결하고 스탈린이 기초한 1981년 헌법에 의하여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구현하고 있었고 볼셰비키는 모든 대의기관을 통제해왔다. 레닌은 통치정당으로서 소비에트를 장악을 하고 당원은 국가행정망을 장악하도록 지시한다. 레닌은 기존 지배계급을 당이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대체한 것이며 자신의 결정에 대하여 어떠한 법률적, 민주적 제한 그리고 정부조직도 원하지 않았다. 레닌은 크론슈타트(水兵) 반란 후에 수백, 수천이 살해당한 공포를 이용하여 당에 남아있던 민주주의 개념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 레닌은 스탈린의 업무처리 능력을 좋아했고 1919년 봄 제8차 당 대회에서 서기국, 조직국, 정치국을 출범시켰는데 스탈린의 이름을 정치국과 조직국에 올려놓았다. 스탈린은 입수가능한 모든 정보를 이용하여 중앙위원회에 레닌을 지지하는 인물을 채워놓았다. 1922년 4월 4일에 프라우다지에 이러한 내용이 발표되자 스탈린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당 내에서 비판 받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6월 레닌은 발작을 일으킨다. 레닌의 건강 상의문제로 서기국은 중앙위원회 명의로 요양을 명하고 업무복귀를 불허했으며 이는 레닌과 스탈린의 불화로 이어졌다. 레닌이 스탈린에게 경고를 했지만 1924년 1월 마지막 발작으로 레닌은 죽었으며 이미 그는 더 이상의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5) 계획경제 유토피아
- 레닌은 결국 그의 후계자에게 무서운 기세로 돌아가는 개인독재기구의 모든 요소를 물려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러시아의 산업생산이 매우 높았지만 레닌이 권력을 잡자 그 반대현상이 일어났다. 레닌은 독재체제를 만드는 방법은 알았지만 유토피아에 대해서는 아무런 복안이 없었고 마르크스도 그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레닌은 정치고 경제고 통제에 대한 측면만 생각을 했지 생산성을 고려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연히 독일의 전시생산체제가 레닌에게 비전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독일의 국가자본주의를 서둘러 도입을 하였다. 규율을 어기는 노동자는 총살을 당할 것이라고 하여 결국은 노조를 정부가 관리를 하게 되었다. 노조의 주된 목적은 노동규율이고 산업경찰이 되었다.
- 그러나 레닌의 사회공학이라는 최초의 거대한 실험은 실패로 끝이 났고 죽었으며 농민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뒤에 남겨놓은 관료주의적 괴물의 손에 맡겼다. 레닌이 남긴 것은 경제적인 파탄에 둘러싸인 견고한 경찰국가였다.
6) 무솔리니와 파시즘
- 마르크스주의 혁명이 선진산업국가에서 일어나리라는 레닌의 기대는 땅에 묻힌 지 오래다. 레닌의 혁명은 뒤죽박죽된 상태에서 농민운동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으나 산업화된 유럽에 기반을 둔 레닌의 마르크스 혁명가들에게는 레닌과 같은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이들 공산주의자들은 선거에서도 이기지 못했고 폭력을 써서 승리를 하지도 못했다. 변화의 바람은 오히려 다른 곳에서 불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터키, 이탈리아 등 베르사유 조약에 불만을 품은 나라들이 사회주의를 도입하였다. 무솔리니(1883~1945는 밀라노에서 이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끌고 전쟁으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공식적으로 사회당에서 축출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러시아를 전쟁에서 빼낸 레닌을 미워했으며 일본을 향하여 러시아를 침공하도록 부추겼다. 그가 바란 것은 급진적인 혁명이었다. 이것은 前衛엘리트式 마르크스주의와 생디칼리즘(조합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고 1919년 3월23일 당을 만들었는데 그는 레닌의 폭력적 행동주의와는 궤를 같이 했다. 그는 권력을 원했는데 급진적 민족주의로도 부족했기에 시와 드라마, 미스터리, 민족적 신화가 필요했다. 가리발디와 마치니, 마키아벨리는 무솔리니에게 는 로마제국의 신화를 깨우는 신화였다. 그는 이러한 휘발성 요소들을 한데 모아서 뒤섞어 폭력을 가미하여 파시즘(facism, 결속주의)이라는 뜨겁고 걸쭉한 혼합액을 만들어냈다. 1921년 1월 이탈리아 공산당이 탄생했고 부르주아 계급의 마음속에 일으킨 두려움이 무솔리니에게는 폭력에 호소하는 구실을 주었다. 파시스트 행동대는 초기에 주로 전직 군인이었고 이들은 인종문제가 심각한 곳, 노동계급이 있는 주변에서 시작하여 내륙으로 확장해나갔다. 파시즘이 확대되면서 1921년 5월 35명의 파시스트가 국회에 진출했는데 폭력을 반대했던 무솔리니가 파시스트 당 대회에서 수령이 되는 조건으로 폭력을 수용했다.
- 이탈리아는 행복한 나라도 통치가 원활한 국가도 아니었다. 이에 무솔리니는 대중연설가가 되어 이탈리아인을 사랑하는 광범위한 철학사상을 다루는 선동가가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통치하기를 원했고 “검은셔츠단”을 동원하여 로마로 진군하여 1922년 10월29일 그는 내각을 접수했다. 그는 권력의지보다 공직에 남기를 원했고 존경을 받고자 했다. 1924년 “자코모 마테오티”가 살해되자 모든 책임이 무솔리니에게 돌아왔는데 이는 그를 극단주의자로 몰았다. 1925년 1월 3일 파시즘을 알리는 악명 높은 내용인 “모든 것은 국가 안에 있다. 국가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 국가에 대립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연설을 행했다. 그는 파시스트 법을 만들어 정치적, 경제적, 도덕적 힘을 통제한다고 큰소리를 쳤다. 전 지구적인 전체론은 환영할 만 것인 동시에 두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마치 전염병이 번지듯이 폭력과 테러, 전체주의의 바이러스도 신속하게 곳곳에 퍼질 수 있었고 이런 바이러스가 러시아에는 이미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이탈리아에서는 시작한 것이다. 이탈리아는 간척사업, 항공 산업, 산업지대 건설, 금융, 교통, 우편, 통신 서비스도 크게 향상이 되었다. 파업도 없었다. 물론 부패도 증가하였지만 거리에는 폭력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이탈리아에 유토피아가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허기와 테러로 몸살을 앓는 러시아에 비한다면 그 성과는 가히 놀랄 만한 것이었다.
제3장 : 히틀러를 기다리며
1) 패배의 충격과 내부 충돌
- 1918년 3월 3일 차르의 러시아가 무너지고 레닌의 러시아는 독일의 요구에 따라 철강생산의 70% 및 총산업생산의 40%를 잃어버리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을 했다. 이해 3월 1일 키예프,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4월에는 핀란드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5월에는 루마니아에 평화조약을 강요했고 9월에는 중앙아시아 바쿠유전지대까지 진격을 했다. 초가을까지는 독일이 승승장구하는 분위기였는데 11월10일 독일은 패배를 했다. 독일인들은 얼마 전의 엄청난 이득에서 오늘의 손실을 보며 정부의 명확한 설명 없이 슐레지엔 지방의 40%를 폴란드에 넘겨줬다. 이 분노가 국제연맹을 향했다. 이러한 현실을 히틀러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 홀베크는 패배에 절망을 하면서도 독일인들이 전쟁을 한 진실과 책임에 대하여 거짓으로 일관하며 독일 황제의 퇴위를 통하여 전쟁을 향한 책임을 연합국은 경감해주었다. 막스베버에 의하여 바이마르 헌법이 기초되고 그렇게 공화정으로 거듭났으나 국회가 교착상태에 빠질 때 허용된 대통령의 비상조치권이 결국은 바이마르 말기에 정부의 기능을 말살 시키고 1933년 국회가 사라지기도 전에 독재의 토대가 구축이 되었다. 이즈음에 히틀러라는 인물이 이 과정의 절정에 서있었다.
- 이 균열은 독일의 동서분열이다. 독일체제의 주된 특징은 반자유주의였다. 문명은 독일을 서구로 이끌었고 문화는 독일을 동구로 이끌었다. 독일을 지배해온 것은 동방파이다. 독일이 서구에 빠졌을 때는 재앙을 불러왔고 동구에서 자신의 운명을 찾았을 때는 역량을 발휘했다. 따라서 전쟁의 책임은 서방파에 있었다.
2) 만개한 바이마르 문명
- 하지만 당장은 서방파의 승리였다. 바이마르는 서구적 공화국으로 문화보다는 문명을 대표했다. 바이마르 체제하에서는 모더니즘이 크게 발전을 했다. 즉 바이마르는 모더니즘과 전통주의가 한 판의 싸움을 벌이는 전장이 되었다. 동성애, 사도마조히즘, 복장 도착증, 근친상간 등을 프로이트를 완전히 흡수한 지식인에 의하여 반영되었으나 좌파지식들은 이에 분노하고 있었다.
- 문화적 참호전은 악의적이고 무자비하며 적대감과 원한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로 인해 동방파들의 유전적인 형질이 다시 발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망상은 유대인들이 바이마를 헌법을 만들었고 또 지배하고 있다는 믿음을 만들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획득하자 유대인들이 힘을 잃었듯이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대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건립에 적극적인 활동을 했지만 1920년 이후 고위 공직에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3) 고개를 드는 반유대주의
- 유대인은 비평가, 여론형성가, 극작가, 배우, 언론인, 출판가, 소설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것이 바이마르 독일에서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린 이유다. 독일에서의 민족운동이 꾸준히 있어왔으며 유대인은 이들에게 민족이 아니었다. 민족운동은 반유대적이었다. 따라서 1920년대 독일의 권력의지를 위한 매개로 반유대주의를 내세울 경우 정치가에게 유리했다.
- 1918년 독일의 패전은 희생양을 요구했고 이에 유대인이 이용되었다. 문화와 문명의 충돌에 대한 폭력적인 해결의 개념이 일부 독일인들의 머릿속에서 현실적인 모습을 취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히틀러는 적색테러에 대한 두려움에 이를 십분 활용했다. 유대인은 죄 없는 희생자가 아닌 실재적인 혹은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서 사냥을 당했다.
4) 우익 과격파의 부활
- 동방파들은 비스마르크의 본보기를 따라 프로이센 군국주의 국가에 복지국가를 접목시켰다. 이 결과는 국가조합주의로 나타났다. 우익의 부활은 정치적으로 반영이 되어 폭력적이 되었다. 독일 학생 단체와 교수들에 의하여 동방파들의 철학이 받아들여지고 이들은 폭력적 극단주의자들의 인적자원이 되었고 1920년대 내내 학생의 정치활동은 우익대학연합운동이 주도하였고 그 이후에는 나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 대학 총장들이나 교수단은 이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학생들의 폭력적인 요구에 굴복을 하였고 1929년에 대학들은 대부분 동방파 진영으로 넘어갔다.
- 바이마르를 위하여 목숨을 내건 서방파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바이마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적었다. 그들에게 공화국은 군주제를 대신할 정치체제가 나타날 때까지의 진공상태를 매꿔주기 위한 대체물에 불과했다. 공화국은 슬픔 속에 태어난 아기였다.
5) 독일을 유혹한 광인
-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라는 권력의지가 강한 인물이 없었다면 공화국의 붕괴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에게는 음모, 선동, 힘에 의한 권력의 추구가 주요 목표였다. 레닌과 비슷하지만 레닌이 종교적인 타입의 혁명가였다면 히틀러는 낭만적인 혁명가였다. 그는 인종을 혁명원리로 보았다. 인간을 콘크리트처럼 마음대로 버무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그는 바이마르에 대한 대중적인 혐오를 그의 정치적 에너지로 통로를 연결하고 있었다. 그는 “선전의 목적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침투하는 것”이라고 나의 투쟁(6장)에서 밝혔듯이 선전으로 정치에 있어서의 승패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 레닌은 러시아를 강탈했지만 독일은 달랐기에 히틀러는 독일을 유혹해야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민주주의를 신봉했다. 그는 1917년 레닌이 취했던 準군사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쥐고자 했으나 1922년 무솔리니가 성공시킨 로마진군에 영향을 받아 결심을 바꾸었다.
- 1923년 독일이 통화가 무너져 내렸다. 1922년 케인즈의 조언을 받고도 조폐국의 인쇄기를 더 빨리 돌려서 인플레이션이 유발되었고 이로 인하여 잃은 자는 프롤레타리아 의식이 아니라 베르사유조약의 부당함과 유대인 투기꾼들에 대한 증오였다. 이때다 싶어 히틀러는 나치 당원 3,000명을 이끌고 베를린으로 진격을 하지만 체포되어 5년형을 받고 수감이 되었다. 그는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나의 투쟁을 저술했다. 그는 레닌처럼 권력을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을 여기서 했고 대중정치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는 감옥에서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폭스바겐을 타고 다시는 독일 국민”을 생각하고 있었고 석방이 되어 그 꿈을 이룰 준비를 한 것이다.
제4장 : 제국의 쇠퇴
1) 무기력한 제국
- 독일에 동풍이 부는 동안 영국과 프랑스의 동맹관계에 금이 가고 있었다. 이들의 불화는 독일의 재무장을 보는 시각차에서 시작이 되었다.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무기를 생산할 수가 없자 러시아를 비롯한 주변국과 무기제조를 추진하였으나 이에 프랑스는 독일의 부활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하였으나 영국의 무관심에 화가 치밀었다. 싸움닭이라는 프랑스의 이미지는 허세였고 독일이 다시 유럽의 최강대국이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호의를 갖느냐 적의를 갖느냐의 차이였다.
- 프랑스의 인구는 다른 유럽국가에 비하여 적었고 전쟁을 통하여 상이군인이 증가했으며 1930년대에 이르러 매우 고령화된 사회가 된다. 프랑스는 알자스와 로렌 지방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교회의 성직자를 소외시켰고 주택시장이 붕괴되었으며 자동차 생산수량은 많았지만 저렴한 자동차 생산에도 실패했다.
- 문제의 근원은 적은 투자에 있다. 사회지배구조의 하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적었으며 엔지니어의 임금은 30%가량 하락했고 고등교육이 부족했다. 1927년 프랑스는 교육보다 기병대 말 사료에 더 많은 예산을 지출했다.
2) 프랑스 민족주의
- 프랑스는 고유한 방식으로 독일처럼 분열되어 있었다. 문명은 프랑스의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프랑스인은 프랑스를 문명의 창시자이자 수호자이며 본향이라고 생각을 했다. 프랑스인은 영국보다 독일을 좋아했지만 그들의 교육의 맥을 쥐고 있는 것은 데카르트의 방법론이었다.
- 프랑스인에게는 문명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고 문화에 대해서 싸움을 벌였다. 세속적이냐 종교적이냐, 실증적이냐 형이상학적이냐 하는 것으로 투쟁은 파괴적이었다. 프랑스에는 경쟁하는 두 가지 형태의 민족주의자가 있다. 하나는 세속파와 공화주의자들로서 조국에 대한 충성을 표했으며, 또 하나는 자코뱅적인 진보적 민족주의자이다. 프랑스 민족주의자는 너무 지적이다. 그래서 권력의지를 지닌 지도자가 부족했다. 1933년 말 대부분의 유럽에 파시즘이 승리할 때 프랑스에서는 공화국의 부패가 폭로되었다. 따라서 프랑스에서는 파시스트 운동을 결집할 수 있는 구심점이 없었다. 프랑스는 베르사유 조약의 협정에 의거하여 독일의 군사력을 애써 모른 체 하고 방어정책으로 돌아섰다.
3) 제국주의론의 허상
- 전쟁 중에 대통령을 지낸 푸엥카레의 “1억의 나라”, 웰스가 ‘검은 프랑스의 발전’이라고 이름붙인 제국주의적 비전은 무엇인가? 식민 장관 알베르 사로는 1921년 프랑스의 해외영토 확보로 모국의 경제적 토대를 만들겠다고 하는 원대한 계획을 제출했다. 그 과제로 돈문제와 1억의 나라의 주민들이 동등한 권리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해외에서 1프랑의 이익을 보지 못했고 식민지 주민에게 동등한 권리를 허용할 가능성도 전혀 없었다.
- 프랑스인에게는 유색인종 차별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36년까지 프랑스에는 오직 2,000명의 흑인만이 프랑스 시민권이 허여 되었다. 식민지 체제는 너무나 많은 모순을 담도 있었다. 1930년대에 아프리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구테타가 증가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유럽의 연합전선을 펴지만 여기에 독일도 참여하므로 결국은 식민지를 다시 유럽의 적들과 싸우는 하나의 수단으로 보게 되었다. 식민지가 없으면 실업자가 사회질서를 파괴할 것이고 빵과 버터를 해결하기 위하여 과밀한 유럽의 인구가 식민지로 진출할 수뿐이 없는 제국이 되는 것이었다.
- 식민지를 1차적인 자본투자를 위한 장소라고 본 자본투자이론을 1902년 홉슨(John A, Hobson)은 음모이론으로 바꾸었다. 산업생산량이 넘쳐나도 부자는 다 소비하지 못하고 빈자는 소비할 여유가 없으므로 자본을 수출할 수뿐이 없다는 이론의 변용인데 이는 케인즈의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 1936)"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아프리카 쟁탈전 및 중국으로부터의 이권 강탈, 보어전쟁을 나은 사건에 대해 분개하여 제국주의(1902)라는 책을 썼다. 홉슨은 제국주의란 ‘나라 밖에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자본가들이 사리사용으로 정부기구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했다. 레닌도 제국주의에 대한 책을 썼고(1916)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토대를 맞추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은 현실에서 맞지 않는 면이 많다. 프랑스나 영국만 해도 투자자는 많았지만 정보가 부족하여 음모를 세울만한 능력도 없었고 하루하루 단기이익을 쫒아 다닐 뿐이었다. 식민지시대의 유럽투자자들이 자진 특징은 그저 태만으로 인한 무지였다.
4) 잉여 자본의 환상
- 투자자들의 음모는 고사하고 식민지 행정관들의 일처리도 명확하지가 않았다. 보통 식민지 정부는 본국보다 광범위한 공공 부문을 유지해야 했고 영국은 아프리카에 철도를 부설해야 했다. 이는 본국 자본의 잉여가 아니고 자본의 부족이었다. 따라서 식민주의가 식민지의 산업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식민지배는 화려했기에 시각적인 현상이라는 매우 중요한 결론에 도달한다. 식민지배는 장엄한 환상과 근거 없는 불평거리를 만들어냈다. 당시의 당당하고 튼튼한 건축물과 시설들이 지금도 위용을 자랑한다.
- 중요한 것은 제국의 통화였다. 식민지에서의 화폐제도가 본국이 어려워지면 가혹해지기도 했고 본국이 부유하면 식민지에도 너그러웠으며 본국이 가난하면 식민지를 돌보아줄 여력이 없었다. 부유한 국가만 식민지를 번영으로 이끌 수 있었다. 따라서 식민지의 부의 원천이 아니라 쇠약의 원천이다. 그리하여 양차대전 사이에 제국은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고 무절제하며 허약하고 덧없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원주민에게 충격을 주기 위하여 코끼리를 쏘라고 했듯이 백인들이 동양을 지배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하고 시시한 것인지 말이다.
-제국을 경영하는 것은 단순한 결단력의 문제였다. 세계대전은 많은 인명의 손실을 가져왔다. 전통적인 농업은 빈사상태에 놓이고 전쟁으로 인한 토지제도의 변화는 농가부채의 증가와 농업생산의 중단을 초래했다. 산업의 쇠퇴 또한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낮은 생산성과 높은 실업률은 1925년 영국경제를 금본위제로 환원시킨 처칠 재무장관에게 책임이 돌아갔으며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이어졌고 이는 운송, 철도, 광산 노조들을 싸움에 끌어들였다.
- 1차 세계대전은 영국교회에도 붕은의 전쟁이었다. 전쟁의 와중에 그들은 입지를 상실했다. 윌리엄 템플은 교리의 전파 대신 진보적 정치를 택한 최초의 앵글로색슨족 성직자였고 그의 진보적인 사상은 국내나 국외의 곤궁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무감이 강화되었다. 이는 경제학은 정치경제라는 케인즈와 맞물려 반체제 세력을 대변하게 되었다. 이러한 입장은 영국의 지배계급에 영향을 미쳤으며 영국의 국익을 지켜야할 때는 가차없이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5) 블룸즈버리그룹
-옥스퍼드는 우등생을 의회로 보내 공적인 무대에서 활약하는 대신, 케임브리지는 사적인 영역에서 활약을 했다. 1820년 12명의 회원으로 ‘사도’라고 불리는 문예협회를 만들었다. 신규회원은 비밀투표로 뽑고 창작자보다는 비평가가 많았고 동성애 분위기가 지배했다. 1902년 영입된 스트레이치(어머니는 진보여성운동을 한 불가지론자)는 ‘자정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블룸즈버리그룹이 된다. 두 모임을 움직이는 스트레이치는 천재적인 선동가였다. 이들을 대표하여 무어가 모임의 철학자 역할을 하였고 그는 무책임한 쾌락주의를 내세웠다. 레닌처럼 홉슨의 ‘제국주의’를 접한 스트레이치는 ‘사도’를 통하여 집단을 다스리는 원리를 깨달았다. 친구를 배반하기보다 조국을 배반하겠다는 그룹은 케인즈가 100년 후에나 가능하다는 말을 전쟁의 시대가 병역기피라는 형태로 반체제 철학을 선전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는 나이팅게일, 고든 장구 등과 같은 사람들이 참호 속에서 죽어가면서 지키려고 했던 가치와 원칙을 비판하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전쟁에 지친 세대들의 비웃음을 전해주었다. 그는 블룸즈버리 그룹의 거물이었고 그들은 무대 뒤나 책속에서 움직이며 공직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들은 불평등한 평화조약, 지속된 제국주의 지배, 전쟁의 원인이 되는 군비확장 등으로 영국이 비도덕적이라고 생각을 했고 이는 당시 영국의 교양 있는 사람들의 통념이었다.
* 불가지론(Agnosticism) : 사물의 본질이나 실재의 참모습을 사람의 경험으로는 알 수 없다는 이론
- 블룸즈버리 그룹은 활력아 결여된 조직으로 스트레이치는 마약에 취한 황새 같았고 회원들은 대부분 독신자였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의 낮은 생산성이다. 영국의 낮은 산업생산성과 같이 그들의 저술은 극히 저조했고 창백하며 무기력했다. 케임브리지 사도 회원 중에 가장 저술이 왕성했던 사람은 버트런드 러셀이었다. 하지만 러셀은 블룸즈버리 그룹에는 참여한 적이 없고 그들의 무기력을 혐오했다. 러셀은 스트레이치와 다르게 평화를 위해 싸우다가 감옥을 갔고 바람을 피우는 중에도 56권의 책을 저술했다. 러셀은 레닌의 금빛 볼셰비키에 동조하며 레닌의 탁월한 선택을 기뻐했다. 그는 1920년 러시아에 가서 레인을 만났고 그 다음해는 중국에 가있었다. 러셀의 활동은 영국 외무부를 놀라게 하고 위험한 발언을 계속했다. 사도는 세 명의 소비에트 하수인을 배출했고 러셀은 도덕적 상대주의로 영국정부를 괴롭혔다.
- 영국은 식민지는 많은데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소수였고 국제연맹으로 하여 불어나는 할 일 때문에 국제연맹을 싫어했다. 그리고 그런 분노가 러셀과 세실 같은 전통적인 지배 가문 출신들에게 향했다. 러셀은 총리의 손자였고 세실은 총리의 아들이었다. 더구나 영국의 해군이 쇠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02년 아시아를 점령자인 일본과 동맹을 맺고 일본은 호주와 뉴질랜드 군대를 전쟁터까지 호위를 해주었다. 그러나 미국의 참전으로 상황은 변했다. 일본을 통제하던 미국과의 사이에 영국은 입장이 모호해졌다. 1922년 영일동맹을 갱신해야할 때 미국은 그의 폐기를 요구했고 영국 내각도 둘로 나뉘었다. 결국은 미국, 영국, 일본이 5:5:3의 주력함 비율을 합의하였고 1930년에 이르러 이 비율을 구축함과 잠수함까지 적용하므로 영국은 찰스2세의 암흑시대 이후 가장 허약한 해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인도와 같은 식민지는 부담이 되었다. 극동에 대한 대비책이 있었다고 말하기가 어려웠고 1924년 12월15일 처칠은 총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일본의 위협 가능성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지극히 낙천적인 볼드윈에게 확신시켰다.
제5장 : 일본의 신정, 중국의 혼란
1) 근대세계와 일본
- 일본의 명치천황 시대는 일본을 근대화로 이끈 시대이다. 다이쇼, 쇼와로 이어지는 왕들은 암살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정치가 이또 히로부미는 자객에게 쫒길 때 자신을 숨겨준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근대 일본은 全體論에 희생양이다. 1850년대에 개항이 되었을 때 일본은 서양의 식민지가 되거나 중국의 운명을 따라가지 않을까했지만 명치천황은 독자적인 생존에 필요한 서구방식을 채택하는 유신을 단행하여 쇼군 통치를 폐지하고 천황에게 실제 지배권을 부여했다. 서양으로부터 모든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중국 문명의 사회구조 및 윤리적 토대는 대부분 배척을 했다. 일본인들은 선사시대 이후 계속 근대적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늘 새로운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 문화의 모체는 다른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공간의 영역에서 살면 일본인들은 시간의 영역에서 산다고 한다. 그만큼 중국과 일본은 달랐다.
- 일본인들은 어떤 이견이 없이 앞으로 나가겠다는 국민적 합의가 있었다. 일본은 1914년 러시아의 국가자본주의와 같았지만 계급투쟁은 없었다. 천황, 군벌, 재벌은 부국강병의 계획에 따라 엄청난 산업생산을 가져왔다. 일본은 1930년에 이르자 인구가 6,400만 명으로 이미 주요산업국가가 되어 있었다. 일본은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1945년까지 법률이 없고 원칙, 규범 같은 정의의 개념만 있었다. 마치 신정국가인 것처럼 말이다. 1946년 천황은 신이 아님을 천명하였다. 일본이 1868년 실용적인 지침을 얻기 위하여 유럽에 눈을 돌렸을 때 기술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행동규범도 찾고 있었지만 일본이 찾아낸 것은 비스마르크의 현실정치였다. 서구열강의 아프리카 쟁탈전, 군비경쟁, 전쟁, 폭력에 의한 힘의 숭배, 레닌이 주도한 폭동의 성공이 그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국가종교와 지배도덕이 탄생했는데 그것은 신도(神道)와 무사도(武士道)였다. 그로 인하여 1900년에 천황숭배관행이 확립되었고 1920년대에 국민도덕수업이 도입되었다. 이과정이 절정을 이룬 것은 1941년이며 2차 세계대전에 돌입을 하고 신도는 전체주의적 국가신앙이 되었다. 1920년대에 무사도가 군인의 명예로운 규범을 받아들여져 군국주의화 되었다. 이 역시 레닌의 전위엘리트, 나치의 돌격대, 소련의 체카대원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1870년대 서양식 정당과 신문이, 1884년 귀족제도가, 1885년 내각제가 도입되었고 1890년 첫 의회가 구성이 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권위주의가 같이 확립되어 나갔다. 1875년에 매우 억압적인 언론법이 만들어졌고 1880년에 경찰이, 1889년에 이또 히로부미에 의하여 헌법이 기초되었으며 의회를 견제하는 원로원이 그리고 내각이 존재했다. 원로원은 전임총리와 정치가 집단으로 육군, 해군 대신들은 참모들이 지명하는 현역장교들이었다.
- 시민의식의 발달은 매우 서서히 진행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어떤 특정 파벌이나 집단에 속해있어야 마음의 안정을 찾는 특성을 가졌다. 이는 오야붕과 꼬붕이라는 변칙적 봉건체계를 유지했고 이러한 바탕 위에 선 일본의 정당은 마피아 집단 같은 것이었다. 이는 의회 내외에서 성행했는데 결국 인 것이 정치폭력의 시대를 만들어냈고 암살이 횡행했다. 일본은 영토의 확장이 근대 세계로 들어가는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국과 전쟁을 했고 조선과 대만을 침략했다. 동아시아에서 확고한 우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이며 일본은 산둥성과 태평양제도 전체를 얻었다.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패권국이 되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연합이 필수적이지만 중국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설정하고 영국의 협조를 구했으나 영일동맹이 미국에 의하여 1922년 깨졌다. 동아시아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고 일본의 더 현실적인 이유는 식량의 부족이었다. 이민이 증가하였지만 미국, 호주 등 일본인의 이민을 제한하였다. 따라서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평화적인 방법을 해결이 불가하다는 것이 당시 일부 존경 받는 정치인들에게도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하시모토 킨고로는 “일본 청년들에게 고함”에서 영토 확장을 제기한다. 호주, 미국, 캐나다, 프랑스, 영국, 벨기에, 포르투갈이 점령한 식민지 면적을 생각하면 일본이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일본은 그러한 서구열강에 대항하려 하지 않고 “무기력하고 절망에 빠져있는 중국 민중”에게 또 다른 압제자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그것은 유럽 열강들이 행했던 것의 같은 복사판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부패의 냄새를 기이할 정도로 잘 맡는 그들이었다. 차르 체제의 러시아를 공격한 것도, 상처 난 곳을 물어뜯는 상어 마냥 부패한 곳을 물어뜯는 일본인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1941년 일본이 아시아와 태평양의 패권에 도박을 건 가장 근원적인 이유였다. 그렇게 낡고 썩어 냄새나는 중국의 1920년대를 파고들어 간 것이다.
2) 군벌과 혁명의 바람
- 중국의 곤경은 낙관적인 신념의 결과였다. 19세기 서구열강은 중국을 근대화시키려고 했지만 중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약탈이었다. 3000년간 지속돼온 황제지배체제가 이제는 구심점 역할을 못하게 되었고 외국침략에 대한 허약함의 상징이었다. 그렇다면 아래에서 혁명이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하는 급진적인 지식인들의 견해가 강했다. 바로 서양교육을 받은 쑨원(孫文)이 그였다. 쑨원은 흥중회를 창립하여 레닌처럼 중국의 전제정치를 타파하고자 했다. 1908년 서태후가 푸이에게 황위를 넘겨주었을 때 입헌군주제를 세울 수 있었지만 그는 1911년 12월29일 난징에 공화국을 수립하고 대총통에 취임을 했다. 군주제의 전복이었으니 그는 정통성 결여되어 그 공백을 힘으로 메꾸어야 했다. 마오쩌뚱이 그를 보고 있었다. 마오쩌뚱은 신해혁명시 변발을 자르고 군에 입대했는데 군대의 필요성을 깨달아서 그렇고 뒤늦게 이를 깨달은 쑨원은 대총통 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내주었다. 황제가 되고자 했던 위안스카이는 1916년에 죽었고 중국은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외몽고는 독립을 선언했다. 군주제의 붕괴로 전통적인 지주계층은 유사봉건제를 찾아다니는데 그것은 군벌이었지만 군벌은 4대 군벌과 수십 개의 군소군벌로 춘추전국시대가 유럽의 30년 전쟁 같이 온 것이다. 그런데 쑨원에게는 군대가 없었다. 그는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 건국방략이라는 책을 쓰고 흥중회를 개편하여 국민당을 세웠다. 그러나 돈도 없는 현실은 그와 달랐다. 영국과 미국에 기댔지만 거절당하고 1923년 소비에트 정부에 기댔다. 소비에트가 주도하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 제국주의였다. 그 도움으로 소비에트 지원단은 군사학교를 세웠고 쑨원은 자신의 동서인 장제스(蔣介石)에게 교장을 맡겼다.
- 장제스는 군대의 규율을 잡기 위해서 전쟁 중에 명령 없이 퇴각하는 군인은 총살에 처했다. 1924년 쑨원은 최초의 국민당 대회를 개최했는데 1925년 죽는다. 공산주의가 득세분열하고 이에 스탈린은 당분간 국민당을 지원하고 중국인의 민족주의를 이용하여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여기에 장제스(장개석), 저우언라이(주은래), 마오쩌뚱(모택동)이 등장한다. 장제스는 자본과 결탁을 한다. 스탈린도 정책을 바꾸었고 공산당 세력도 분쇄되었다. 그리하여 장제스와 마오쩌뚱은 마침내 갈라섰다. 장제스는 군벌이 되었고 마오쩌뚱은 자신의 힘으로 군벌이 되어야 했다.
- 마오쩌뚱은 사납고 열정적인 낭만주의자였다. 히틀러같이 성격이 급하기도 했고 민족문화를 신봉하는 민족주의자이자 급진적 애국주의자였다. 그는 중국을 착취하는 자들이 여럿이라는 것을 이점으로 생각했고 성공요소를 군대라고 생각했다. 농민들을 무장시키고 훈련해 전쟁도구로 만들 요량이었다. 그는 공산당 지도부로부터 1927년 9월 국민당과 관계를 끊고 후난성 농민들 안에서 무장봉기를 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군벌이 되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군부의 실세로 떠오른다. 그는 지주계급과 결탁한 군벌이 아니고 농민의 편에선 군벌이었다. 그는 적을 죽이는데 다른 군벌 못지않게 잔인했고 무력을 동원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1930년 말에 비밀경찰을 창설했고 이것은 아주 야만적이었다. 장제스와 마오쩌뚱은 모두 급진적인 개혁을 지지했다.
- 중국인만 급진적인 개혁을 좇은 것은 아니다. 중국의 쇠퇴는 일본인들이 가진 약탈의 본능을 자극했다. 중국의 3000년 역사에서 이루어진 발전보다 일본이 30년간 지배하던 조선에서 이루어진 발전이 더 컸다고 외국기자들은 말한다(우리가 생각해 볼 일). 만주를 점유하고 있던 일본군의 이시하라 칸지 중좌와 다까끼 세이시로 대좌는 자국 정부를 중국 문제에 끌어들이기로 결의를 했다. 당장 질서가 필요한 중국과 영토가 필요한 일본이기에 만주는 일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1928년 6월 4일 두 사람은 일본의 만주 점령을 위한 첫걸음을 떼었다. 만주 최대의 군벌인 장쩌린 원수가 일본군이 설치한 다이너마이트에 의하여 살해된 것이다. 이는 동양에서 벌어질 국제전쟁의 서막이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은 이에 개의치 않고 멜로드라마 제작에 힘을 쏟고 있었다.
제6장 : 마지막 이상향
1) 인종 편견과 아메리카니즘
- 미국의 목표는 미 대륙이라는 유토피아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어떻게 진정한 아르카디안(Arcadia인)을 창조할 것인가? 이 두 가지였으나 이는 서로 상충되는 명제인 것이다. 이민정책은 실패한 듯이 보였고 그로 인하여 북유럽인종은 출생의 특권이 파괴되었다고 보았다. 인종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지키고자 하는 KKK단이 결성되었고 세계대전은 미국은 애국심을 강조하고 외국인 배척감정이 강해졌다. 저항세력이 있었지만 소수였고 미국의 1919년의 모토는 미국화였다. 1920년 윌슨 대통령이 죽자 미국은 마치 무정부주의가 되고 경기침체가 되어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은 가속화됐다.
- 제퍼슨 민주주의에서 비롯된 아메리카니즘이 공격 받는다면 미국의 실체란 그냥 유럽에서 떨어져 나온 또 하나의 문화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 동부의 교양인(highbrow, 1915년 비평가 밴 윅 브룩스가 처음 사용, 프랑스의 지식인, intelligentsia 보다 적절한 표현)들은 유럽식 민족주의가 아닌 최초의 국제적인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렇게 실천을 했다.
- 복음주의 기독교의 영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박애주의 사회사업, 정치행위를 통한 사회개혁, 평화주의, 대중 선거의 중추를 이루고 있고 빈자에게 친절과 선의를 나타내고 구체적인 행위로 표현한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고유한 미국문화가 있다면 이것이 바로 고유한 미국문화였다. 기업 활동에 무한한 자유를 허용한 나라가 미국이고 전체주의 사회와 거리가 멀었다. 미국의 금주령을 둘러싼 복잡, 미묘한 사건의 전개가 부패와 폭력(불법이라는)을 불러왔다. 그러나 금주령이 기업과 시장이라는 측면에서는 매우 서투른 일종의 사회공학(제조, 운반, 판매 등의 차원에서)이었지만 사회공학의 목표는 여러 인종이 뒤섞인 사회를 법을 통해 질적으로 동일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레닌식의 잔혹행위나 무솔리니의 폭력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러한 미국의 기업가 중심의 시장 시스템은 피부색과 출산에 관계없이 모든 인종과 민족 집단을 하나로 묶어준 것이다. 미국 내의 복잡다단한 인종의 문제는 자유로운 기업가 중심의 경제 시스템 하에서 미국 땅에 적창한 것이다.
2) 공화당의 시대
- 마르크스가 예언한 대로 미국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미국에서 좌파들은 정치세력화를 하는데 실패를 했다. 이러한 예는 민주주의 산업국가에서 미국이 유일하다. 이미 1920년대부터 미국의 정치상황에 예견이 되어 있었다. 공화당은 은 진보적 자본가 계급의 당이며 사회적 보수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대표하는 당이었다. 공화당은 백악관과 상원을 완전히 장악을 하였고 하원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 하딩 대통령은 정부가 자유로운 기업경영의 수레가 돌아갈 수 있도록 그냥 놔둔다면 이러한 문화적 우월성이 저절로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은 쿨리지 대통령의 생각과 말이다. 많은 이윤은 많은 봉급을 위미한다. 정치와 경제는 독립적이고 분리된 채 남아 있어야 한다. 정치는 워싱턴에서 하고 경제는 뉴욕에서 하면 된다. 멍청하고 탐욕스런 사람은 그 둘의 침투를 허용한다. 경제가 이윤과 투자를 증대하고 임금을 향상시키고 가능한 낮은 가격으로 질 좋은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국가 구조를 개선해야 하는 것이다. - 국가 구조의 개선은 정치의 영역이다.
3) 짧은 번영
- 1921년의 지수가 58이던 것이 1929년에는 110이 되었고 국민소득도 8년 사이에 522달러에서 716달러가 되었다. 미국인들은 보험에 가입을 했고 저축을 했고 주식투자를 했다. 그 주식의 구매자가 가정주부, 점원, 공장노동자, 상인, 운전사, 기술자, 기계공, 공사장 감독 순이었고 그들은 주택을 구입하고 차를 장만했다. 미국 여성들의 여가활동이 증가하고 대부분의 자선사업도 그 결과였다. 가정의 풍요는 급진적인 정치운동과 노조운동의 쇠퇴를 가져왔다. 복지 자본주의를 실현했고 문화해방이 되었으며 문학적으로도 예술 및 역사 보존운동이 일어났다. 1920년대는 미국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 그러나 1920년대 말에 미국은 사회적 깊이와 복잡성을 얻었고 이는 시시한 번영이라는 생각에서 나왔다. 유럽의 문화적 탯줄이 없이 자란 미국의 문화에 밀도를 더해갔다. 이때에 미국이 경험한 번영의 문제는 속물적이었다거나 부도덕했다기보다 덧없이 끝나버렸다는 데에 있다. 이 번영의 시기가 10년만 더 지속되었다면 현대사는 크게 달라지고 인류는 더 행복했을 것이다. 경제적인 침체가 예견되었으니 쿨리지는 그저 1920년도의 불황 정도라고 바라보았다.
- 짧은 번영이었다.
제7장 : 대공황
1) 주가 폭락의 원인
- 미국 경제는 이미 1929년 6월에 성장을 멈추었고 주식시장의 상승세는 9월 3일 끝이 났다. 10월24일 유명인사 11명이 목숨을 끊었고 10월29일 검은 화요일이 찾아왔다. 증권거래소의 대붕괴는 무미건조한 경제사를 산 역사로 바꾸어 놓았다. 대공황의 원인과 극복방법은 무엇인가? 마르크스주의 결정론자들은 교만과 사악함에 대한 인과응보라고 도덕적 처방을 내렸으나 실제로 어떠한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 원인의 하나는 미국의 고립주의라는 것이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미국이 케인즈 식 국가지원은 거절했지만 세계 경제를 위하여 일정부분 책임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 미국은 높은 관세를 유지하는 나라였고 제조업체협회나 노동총동맹의 요구에 굴복하므로 이것은 미국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1차 대전 이전에 만들어진 연방준비은행을 통하여 의도적으로 통화량을 늘려 세계경제의 번영을 누리고자 했으나 미국정부와 금융계는 이자율을 강제로 인하했다. 즉 국내 산업은 높은 관세에 의해 보호를 받았고 수출산업은 저리의 융자금을 받았으며 투자 은행가들은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채권을 발행하였다. 결과는 모든 피해를 대공황의 희생자로서 국민이 보게 된 것이다. 게다가 후버는 외채시장을 후원했다. 그러나 외채를 발행한 국가가 채무불이행을 선언하였다. 정부의 지나친 간섭이 낳은 결과이다.
- 11월13일 혼란이 끝나갈 무렵의 주가는 452에서 224가 되어있었다. 시장은 투기요소를 제거하고 건전한 주식만 남겨놓은 것이다.
2) 개입주의자 후버
- 후버는 대통령으로서 공공사업에 엄청나게 개입을 했다. 마지막 위기는 미국의 보호주의 정책이 부메랑을 맞았을 때 찾아왔다. 대공황은 유럽으로 퍼졌고 유럽 전역에 있는 은행들이 파산을 했다. 산업생산지수가 급속도로 하락을 했지만 평균 실질임금은 증가했다. 단지, 희생자는 임금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실업률은 증가했고 농가를 제외하고는 전 국민의 1/3이 소득이 없었다. 시카고에서는 교사에게 급료를 지급하지 못해 학교가 1년간 문을 닫기도 했다. 그러나 대공황 시기에 쓴 제임스 터버의 “뉴욕의 세 번째 겨울”이라는 기사에게서 그는 빈부의 극명한 대조를 보았다.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기업은 가격을 내리고 적절한 사업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장의 조건에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소매업이 불황의 피해를 가장 적게 보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우리의 IMF 외환위기 때에 살아남은 자에게 다시 기회가 오도록 만드는 시장의 자체 구조조정이 그것인 것 같다).
- 당시에 책은 안 팔렸지만 더 많은 사람이 이전보다 심각한 책을 읽었다. 젊은 지식인들은 부정을 일삼던 우둔한 대기업들의 몰락을 보며 매우 기뻐했다. 1930년대 초 계획경제는 새로운 세계관이 되었다. 이때 나온 많은 책들이 후버방식의 조합주의 방식의 계획화가 새로운 사회의 헌법이 될 것임을 예언했고 국가가 무책임하고 무능하고 완고하고 비조합주의적인 개인주의를 더 이상 경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 지식인 대부분이 좌파로 기울었다. 좌익은 2만 명의 참전용사로 하여금 워싱턴 한복판에 판잣집으로 야영 촌을 만들고 참전용사 수당을 이용한 대출금을 대폭 올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후버는 군을 동원하여 이를 철거하였고 좌파는 이릉 이용하여 엄청난 선동을 하였다. 이를 테면 기병대가 사람을 짓밟았다거나 탱크로 밀고 독가스를 살포했다거나 총검으로 소년을 찔렀다거나 등이었다. 이러한 선동으로 후버를 패배하고 교회의 지지세력은 금주를 지지하지 않는 루스벨트에게 반대하고 있었다.
3) 루즈벨트와 뉴딜
- 루스벨트는 상류계급으로 대지주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정치적 보수주의와 정통파 경제 이론, 반제국주의가 뒤섞인 세계관을 발전 시켰는데 1932년에는 경험 많은 행정관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원더보이로 비치지는 않았고 어느 면에서도 좌파 지식인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일부 지식인들은 그가 위엄이 없다고 평을 했다. 후버와 루스벨트는 서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역사에 영향을 미쳤다. 둘은 서로 공적인 문제에 협력을 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것이 루스벨트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 루스벨트는 직관력이 있었다. 그는 어떤 쪽에서는 연방정부의 지출을 확대하면서 다른 편을 삭감(상이군인의 연금을 반으로, 교사의 급여를 삭감)을 했다. 케인스는 정부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루스벨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정책은 대부분 후버의 정책의 연장이었다. 뉴딜정책은 후버의 정책을 대규모로 확대한 것에 불과하다.
- 후버-루스벨트의 개입주의는 연속선상에 있다. 루스벨트 지지자는 뉴딜 정책이 경기회복을 가져왔다고 하지만 후버 지지자는 경기회복이 지연되었다고 주장한다. 1939년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뉴욕 증권거래소를 기쁨과 혼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케인스도 전쟁이 경기회복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증언한다. 개입주의 효과가 나기 위해서 9년의 시간과 전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정치적인 성공은 번드르르한 외관에 지나지 않았고 그의 백악관 생활에는 어두운 구석(불륜, 부도덕한 권력 이용)이 많았다. 특히 전문위원회의 설치는 지식인의 안주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4선을 했다. 그 때 조차도 젊은이, 진보주의자, 지식인들의 지지가 대단했다. 그는 1930년대의 시대정신에 딱 들어맞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지나친 기대가 쉽게 신념의 상실로 바뀌는 천년왕국의 사회다. 1930년대 초에는 미국 밖으로 이민 나가는 사람이 더 많았다. 영국의 공산주의자 스트레이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에트 영토로 가는 여행은 죽음을 넘어 삶으로 가는 길이다”라고 했으니 이 얼마나 끔찍한 모순을 담고 있는 것인가?
제8장 : 악마의 횡포
1) 트로츠키의 정치적 위기
- 미국의 지식인들이 계획경제의 영적인 양분과 지침을 얻고자 유럽의 전체주의에 눈을 돌리고 있던 순간 유럽은 잔혹함과 황폐의 시간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스탈린에 의하여 농민 5백만 명이 학살을 당하고, 천만 이상이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더구나 히틀러라는 제자까지 얻은 상태이다. 레닌에 의하여 완성된 전제 체제를 이어받은 그는 독재 권력을 위하여 잠재적인 적을 처단하는 일만 남았다. 그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제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 레닌이 병상에 있는 동안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중도파 행세를 하며 서기국을 장악하고 중앙위원회를 자기 수하로 채워나갔다. 그런데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네 명의 장애물이 있었다. 하여튼 그들에게는 도덕성이라는 것이 없었다. 스탈린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대표하지 않았고 트로츠키는 그를 “극단적인 관료”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레닌과의 노선을 문제 삼아 트로츠키를 제거하고 군대통수권을 박탈한다. 스탈린은 부하린을 이용하여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공략하여 당에서 제명했으며 좌파의 공격을 받자 좌파의 주장대로 농민을 압박하여 우파인 부하린과 우파를 몰락시킨다.
- 스탈린의 공포정치는 이미 완숙기에 접어들었다. 1929년 5월과 7월 사이 스탈린은 첫 조작재판을 시작했고 예브도키모프의 대본에 따라 아들을 동원하여 아버지를 처형한다. 멘젠스키와 몇 명의 정치국원이 반대했으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스탈린은 영화감독 같이 시나리오대로 공포정치의 전횡을 보였다.
2) 농업 집산화와 계획경제
- 스탈린은 대규모 사회공학을 실천하기 위하여 농민을 곤란에 빠뜨렸다. 레닌의 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농민이다. 그리고 나중에 레닌을 거부하여 신경제정책이라는 굴복을 강요한 것도 농민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권력을 업신여긴 이들에게 복수를 할 때가 스탈린에게 온 것이다. 스탈린의 하는 일은 어디에서도 근거가 없는 괴물 같은 것이었다. 노동자를 위하여 농민은 식량을 확보하는 대가를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자발이 어려우니 강제해야 한다. 1927년에 흉년이 들어 1928년에는 식량이 없었기에 무장한 노동자 3만을 시골로 파견하여 약탈사건을 재연했다. 씨앗까지 빼앗기므로 1928년은 더욱 피폐했으며 스탈린은 외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예술품을 비밀리에 서방으로 판매를 했다.
- 스탈린은 농민을 집단농장으로 몰아넣었다. 이렇게 농업의 집산화는 강제로 이루어졌다. 이는 17C 독일의 30년 전쟁 이후 처음 겪는 재앙이었다. 경찰과 군부대가 농민들을 둘러싸고 강제로 트럭에 태워서 보냈고 저항하면 총으로 쏘아 죽였는데 나중에 히틀러가 유대인을 체포할 때 이 방법을 그대로 원용한다. 스탈린이 이 때 살육한 농민의 수가 아직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농민에게는 로마제국 말기나 봉건시대와 다를 것이 없었고 이는 차르시대보다 더 했으며 1970년대까지 변함이 없었다. 이는 인간이 만들어 낸 유일한 기근이었고 농업집산화와 계급 청소의 시기(1929~1936)에 1,000만 명 이상의 남녀노소가 비자연사를 당했다. 이에 반대한 사람은 스탈린의 두 번 째 부인 ‘나데주다’로서 권총 자살을 하게 되며 스탈린은 가정사의 관리를 정치보안부에 맡겼다.
- 소련의 계획경제는 서류로 꾸민 일이었고 야만적인 공상이었다. 이러한 레닌과 스탈린의 정책이 지하자원과 팽창하는 인구와 산업기반을 영구히 망쳐놓았다. 그럼에도 댐, 제강, 운하, 광산 등에서 진보는 있었다. 노예노동의 결과였다. 나치의 기록에 따르면 강제수용소의 사망률이 10%인데 러시아는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용의주도한 조작재판을 통해서였고 재판 없이 대규모의 행방불명이 횡행했다. 특정 직업에 속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처리했으며 이는 스탈린주의 국가 존속을 위한 망상과 히스테리를 조성하는데 필요했다. 이는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외국인 방문자들도 사업가와 지식인으로 사업가는 돈 버는데 열중했고 지식인은 러시아를 찬양하러 갔었다. 버나드 쇼는 “러시아에서는 범죄자가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정상인이 된다.”고 했다. 이러한 찬사는 부패 혹은 허영심 아니면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30년대는 영웅적인 거짓말의 세대였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자유주의를 산산조각 낼 망치와 모루였다. 레닌주의가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낳았다면 스탈린주의는 나치의 괴물국가를 낳은 것이다.
3) 히틀러와 나치
- 1924년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히틀러가 석방이 되었다. 이때는 스탈린이 레닌국가주의로 러시아에서 위치를 공고히 했을 때로서 어두운 그림자가 넓은 영역으로 퍼져나가므로 히틀러가 고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력으로 힘드니 대중 정당을 만들어 공화국 안으로 침투하려고 태동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괴벨스는 민족주의적이며 반자본주의적인 독일 혁명을 선동하고 있었으나 히틀러는 이를 반유대주의 혁명으로 바꾸라고 설득을 했다. 하지만 이때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전성기이므로 히틀러에게 유리할 것은 없었으니 나치당을 레닌 같이 최고의 중앙집권형태로 하여 권력의지를 불태웠다. 히틀러는 결정권을 주지 않았지만 폭력과 활동에 무한한 자유를 주었다.
- 1925~1929년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전성기였지만 스탈린주의로 인한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이 거리로 나서며 폭력이 증가하자 이에 대적할 강력한 권력이 필요했고 히틀러는 이를 편승했다. 독일인들은 제3의 길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 내의 실업률은 높았고 1931년의 실업자가 600만 명을 넘었으며 월스트리트의 붕괴는 설상가상이었다.
- 히틀러는 사람들의 공포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았다. 1929년이 되자 히틀러는 대중에게 충분히 명망을 얻었다. 1931년 1월30일 히틀러는 독일의 총리가 되었고 이날은 독일과 전 세계가 돌이킬 수 없는 날이 되었다. 일단 권력을 잡으면 죽어 나가지 않는 권력을 놓을 수 없다고 괴벨스는 말했다. 군중은 기뻐했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에게 정치는 못마땅한 것이었는데 히틀러가 그런 정치를 끝장내겠다고 하니 말이다. 나치는 고위 경찰간부를 물갈이했고 비밀국가경찰과 게슈타포를 조직하여 확대했다. 괴링은 비나치조직을 모두 박멸하라고 경찰에게 말했고 헌법을 개정하여 언론의 자유 등을 제한했으며 사회민주당과 공산당 의원을 체포하니 모두 도주를 했다. 저항은 약하거나 없었다. 히틀러가 독일의 민주주의를 박살내는데 단 5개월이 걸렸는데 이는 레닌과 유사하다.
4) 친위대와 게슈타포
- 괴링은 히틀러의 엄청 신속한 하수인이었다. 히틀러는 똑같은 기관을 여럿 만들었다.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모든 권력가들의 동일한 증상). 하인리히 힘러를 통하여 친위대를 만들었다. 인종청소의 시작이었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통하여 보안대의 책임자로 앉혀 룀의 돌격대를 감시했다. 그들은 존경할만한 시민을 가장하여 모든 무절제, 거짓말, 법률위반 행위를 비난하는 것에 익숙했다. 히틀러는 잔인한 행위를 즐겨하는 사디즘 환자였다.
- 히틀러는 경쟁관계에 있는 3개의 조직(친위대, 돌격대, 괴링의 경찰과 게슈타포)과 중요한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는 두 개의 부서를 이용하여 매우 독특한 방법으로 치안을 유지했다. 히틀러의 측근인 루돌프 헤스, 마르틴 보르만, 괴링, 괴벨스는 끊임없이 서로 대결했고 히틀러는 이를 장려했다. 히틀러는 어느 기관이든 저항의 기미가 보이면 경쟁기관을 만들었다.
- 히틀러의 국가는 조합주의는 아니었다. 권력이 조직에 분산되는 조합주의와 달리 히틀러는 누구와도 권력을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히틀러는 정책에 있어 일관서잉 없고 늘 주저했다. 가장 중요하게 여긴 유대인 정책에서조차 그러했다. 히틀러에게는 특별한 경제정책이 없었다. 그럼에도 경기회복의 덕을 보았다. 그는 행운아였다. 그것은 독일 산업의 튼튼함 때문이었다. 그는 당이 정부의 다른 영역과 공공정책에 개입하는 것을 허락했으나 산업과 군대만은 예외로 했다.
5) 숙청의 바람
- 1930년대 중반에 이르자 히틀러는 야만적이고 비양심적이지만 독일인 대다수의 지지를 받는 정권을 이끌고 있었다. 독일의 노동자들은 시민의 권리보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원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독일을 다시 전쟁으로 몰고 갈 때도 지속이 되었고 아마도 가난한 최하위층의 독일인들의 호응이 가장 컸을 것이다. 교회에서 배운 절대적인 도덕규범이 아닌 상위의 법에 복종한다는 헤겔식 사고방식을 마르크스와 레닌은 계급으로 개념정립을 하였지만 히틀러는 그것을 인종으로 대체했다. 이는 정치적 그레셤의 법칙을 유도하여 두려움이 인도주의적 두려움을 몰아내고 상대방을 끝없이 타락시켜 끝없는 악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 히틀러는 독일민족의 의지를 대표하는 인물은 자신뿐이라고 생각을 했으나 룀의 나치 돌격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100만의 돌격대(예비 350만)를 견제하기 위하여 정규군을 높이 평가했다. 1933년 3월 힘러를 승진시켜 다음 해에 룀을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 힘러가 정치 경찰의 권력을 독점하자 히틀러는 숙청작업을 진행했다. 괴링, 국방장관 블롬베르크, 정치보좌관 폰 라이헤나우 등이 합세하여 7월 2일 룀을 총살하였다. 돌격대와 관계없이 라이벌과 귀찮은 자들 그리고 위험한 핵심 인물 150명 정도를 학살하고 8월 2일 힌덴부르크가 죽으므로 하루 전에 發表한 법령을 통하여 히틀러는 총통 겸 제국 총리가 되었다.
- 이에 용기를 얻어 스탈린도 그의 정적을 공격한다. 키로프 사건으로 100명이 넘는 반동분자가 총살을 당하고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수용소 군도로 영원히 사라졌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키로프가 죽고 2주가 지나자 스탈린은 예조프가 선발한 2-300명의 열성당원을 동원하여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을 처형하고 그 일파의 2/3를 처형했으며 1938년 후반까지 비밀경찰 3천 명, 지방검찰관 90%, 장교 3만 명이 살해당하고 레닌그라드에서 열린 17차 당 대회에 참가한 대의원 150명 중 둘 만 남고 모두 살해당했으니 그 수가 대략 100만 명 정도였다. 스탈린은 이러한 일에 연루된 예조프도 숙청하고 스탈린의 사망 이후 모든 지도자, 말렌코프, 흐루쇼프, 코시긴, 브레즈네프 등이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이런 일을 벌인 인물들이었다. 특히 모스크바로 도피해온 외국의 공산주의 지도자들도 대량으로 학살을 당했고 오히려 자국의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 아서 케스틀러의 정오의 어둠(Darkness at noon, 1940)을 읽어보면 이러한 학살과 살육은 스탈린의 거물급 희생자들이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상대적 도덕론에 사로잡혀 거짓 증언을 꾸며 낸 결과였다. 이 시대에 러시아 인구의 10%가 스탈린이 부과한 참회과정을 거쳐야 했으니 마구간까지 감옥으로 바꾸어서 눈알을 후벼 파내고, 고막에 구멍을 내고, 사람을 못 상자 안에 밀어 넣는 고문을 가했다. 스탈린이 대숙청을 밀어붙이는데 히틀러의 사례가 도움을 준 것은 명백하다. 그러면서 서로 가르침을 주고받았다. 힘러 역시 무서운 속도로 강제수용소를 세워났으니 1933년 말 이전에 수용소가 100개에 달했다. 강제수용소는 경제적 목적에 이바지했다. 그러면서 학살을 자행했으니 콜리마 수용소에서 4만 명이 학살을 당했다. 그들은 휴일 없이 하루에 16시간 씩 영하 60도가 넘는 곳에서 강제노역을 했는데 목격자들은 20-30일만 지나면 몸이 망가졌다고 증언을 한다. 스탈린에 의하여 죽은 사람이 1,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번에는 스탈린의 대규모 잔학행위가 히틀러를 부추겼다. 독일이 서유럽에 가깝고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뽐냈으며 망명지식인들이 이 실상을 세상에 알렸기 때문에 히틀러의 잔학 행위가 더 알려져 있다. 히틀러와 그 추종세력은 공개적으로 책을 불태우고 그림을 팔아먹었다. 지식인 수천 명이 강제로 망명을 당했다. 그런 와중에도 히틀러를 찬양하는 지식인들(알려진 인사로 장 콕토, 윌리엄 예이츠, 토머스 엘리엇, 에즈라 파운드, 오스발트 슈펭글러, 마르틴 하이데거 등)의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식인 좌익으로 선회했다. 그러나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폴란드, 헝가리, 오스트리아, 터키, 그리스, 루마니아, 일본 그리고 많은 나라에서 파시스트에 준하는 정권이 수립되었고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나라가 스탈린의 소련이라고 믿었다. 그 만큼 당시의 지식인들도 스탈린 체제의 본질을 모르고 있었다. 이렇듯 스탈린은 계급에, 히틀러는 인종에 근거했지만 이들은 똑 같이 무한한 영토정복의 욕구를 불태우고자 했고 서로 경쟁하듯이 이들의 권력시스템은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출현은 세계적인 침략시대의 개시를 알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는 온통 광기의 세상이 되었고 그것은 내가 세상을 알기 시작한 60년대에서 불과 한 세대 전의 이야기였다. 나는 서구문명이 엄청나게 도덕적이고 민주적인 것인 줄 알았고 우리의 해방 이후 87년까지가 매우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지 알았는데 그렇게 큰 차이가 없고 우리의 殺戮歷史는 6.25를 일으킨 공산세력에 의한 것이 그에 유사할 뿐 남한에서 이루어진 모든 사건사고는 鳥足之血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제9장 : 침략의 절정
1) 일본의 만주침략
- 한 마디로 요약하면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서구의 경제력이 파탄에 가깝게 되었으므로 1930년에 미국, 영국, 일본은 런던군축조약에 서명을 하였다. 군사력 역시 약화되어 가고 있었으니 역설적으로 이 조약에 의하여 일본은 서구와의 관계를 끊고 독자적인 자국이익을 추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31년 9월 일본군 수뇌부는 문민내각의 명령을 무시한 채 만주사변(1931년9월18일)을 일으켰다. 국제연맹 조사단이 일본을 비판하자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1930년대에 뚜렷해진 미국의 고립주의는 일본을 방치하게 되었고 루스벨트가 세계경제회의 협상안을 거부하자 1930년대는 무력의 독단에 맡겨 돌아가게 되었다. 민주주의 국가가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질서에 이탈리아, 독일, 일본, 소련 등이 일종의 지정학적인 게임을 벌였다. 독일, 소련, 이탈리아에는 폭군이 있었지만 일본은 지도부가 없었다. 천황조차 군부를 무서워하는 일본에는 아라끼 사다오 장군이 있었다. 유럽 국가였다면 그는 독재자가 되었을 것이지만 일본은 당파나 파벌의 규율에 복종하는 나라였기에 일본의 지배계급은 집산주의 쉽게 빠져들었다. 일본은 런던군축조약을 파기하고 군비확장에 착수했다. 일본에서는 국가는 하나의 실체가 아니고 경쟁하는 파벌들의 집합이었다. 파벌들은 문제를 살인으로 해결하였다. 군부도 분열되어 있어 해군은 남진을 육군은 대륙진출을 바랬다. 한마디로 1930년의 일본을 통치한 것은 무정부 상태의 공포였다.
- 1930년대 중반에 일본은 폭력적인 반체제 투쟁이 시작되었다. 2.26반란이 실패로 끝났지만 이들은 꼭두각시 천황을 내세우고 마르크스주의와 황도를 결합한 공산주의를 들여오려고 했고 소련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의 판단이기도 했다. 이들은 일본이 더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하기를 원했고 북진을 원했지만 만주에서 북진을 포기하고 남진을 택했다. 중일전쟁(1937년7월28일)에서 이득을 본 측은 소련과 중국 공산당이었다. 국민당의 장제스가 중국공산군을 궤멸하기에 이르렀지만 공산당은 대장정이라 불리는 행군을 감행해서 1936년 12월 연안(延安)에서 끝을 내고 지휘관인 장궈타오가 서강(西江)으로 향했으나 도피자의 누명을 쓰자 마오쩌뚱이 저우언라이(주은래)를 보좌관으로 두면서 그는 정치 및 군사의 실권자가 되었다.
- 중일전쟁에서 최대의 수혜를 본 소련과 국경선에서 일본이 자주 무력 충돌을 하였다. 하지만 중국과의 전투가 있어 병력을 할애할 수 없었던 일본은 1939년 전투에서 소련에 처음으로 패배의 잔을 든다. 한편 다음으로 수혜를 본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을 누르고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계기를 잡고 서북부에서 게릴라전으로 농민군들 사이에서 군사적, 정치적 입지를 확대했다.
- 미국은 중국 편에서 일본을 나치나 파시스트와 같다며 미워했다. 하지만 민간 각료와 상의가 없는 일본 군부는 1937년 중국의 수도 난징(남경)을 함락했고 역사상 유래 없는 난징 대학살을 4주간 자행했다. 약 2만 명의 젊은이들이 기관총으로 학살이 되었고 1938년 2월 6일까지 최대 30만 명의 중국인이 사망했다. 1938년 3월 의회에서는 모든 권력을 군부에 넘겨주고 “국가총동원법”을 통과시켰다. 중국의 황하와 양자강을 통제하고 중국경제를 관리하기로 했지만 일본은 왜 전쟁을 하는지도 몰랐다. 전쟁이 일본에 번영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고 그 반대였다. 일본은 물자가 부족하여 배급제를 실시했는데 1918년의 독일 보다 더 비참했다. 일본은 주변국을 적으로 삼고 법치를 포기하고 전략도 없이 무력으로 역경을 헤쳐 나오려 했다. 일본 스스로 키운 결과였고 여기서 우리는 1930년 말 상대주의 도덕관에 따른 패악의 예를 볼 수 있다.
2) 스페인 내전
- 무솔리니는 정부전복의 영감을 레닌에게서 받았다. 교양과 품위를 겸비한 인물임을 자부했던 그는 1934년 나치에 대하여 100% 인종차별주의, 反문명주의라고 비판을 했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타락하고 있었다. 룀의 숙청사건에 놀랐고 일본의 만주정복에 고무되었다. 그는 영국이 북유럽에서 독일을 억제하고 극동에서 일본을 견제하려면 지중해를 지키는데 역부족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에티오피아 문제를 재량으로 처리하고 싶었다. 1935년 10월 3일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국제연맹도, 영국도, 프랑스도 군사적 행동보다는 경제적 제재를 가하기로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독일은 무솔리니에게 구애를 펼쳤고 1937년 9월27일 그는 베를린에서 히틀러의 칭송을 듣고 히틀러를 본받아 에티오피아에 만족하지 않고 병합할 만한 다른 영토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니스, 코르시카, 튀니스, 알바니아에 대한 영토권을 주장하고 1938년 11월 인종정책에 대한 소신을 뒤집고 反코민테른 협정에 동참하고(1937년11월 6일) 국제연맹을 탈퇴(12월11일)했다.
- 그는 1939년 4월 유럽침공에 착수하고 히틀러와 이념적 대리전에서 손을 잡고 스페인을 악행의 대상으로 삼았다. 스페인은 자기만족에 도취되어 전체주의 이론을 가장 혐오한 나라였지만 오히려 이로 인하여 더 비극적인 내란을 맞이하였다. 스페인의 사회주의자 중 노조 지도자인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는 여전히 공화주의 전통에 머물러 있었으며 1931년 스페인은 왕국에서 공화정으로 평화롭게 이행을 했다. 사회주의 장관들이 무정부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일으키는 정치적 파업이나 농촌의 폭동을 포병대를 투입해서라도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우익의 군사쿠데타는 실패했다(1932년 8월). 그런데 극좌파 조직이 당에 침투하여 카바예로는 좌경화가 되었다. 농촌의 위기가 고조되어 지주는 두려움에 농민은 굷주림에 미쳐가고 있었다. 파업이 일어나고 광부들이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하여 2주를 버티었다. 이에 진압부대가 투입이 되었는데 그 책임자가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었다. 그는 쿠데타를 반대하였지만 상황이 달라지고 스페인이 위험하다고 판단을 했다. 먼저 폭력을 쓴 것은 좌파였고 우파가 적극 대응했으나 1936년 선거에서 좌파가 승리를 했다. 그러나 결선투표를 하기도 전에 좌파는 내각을 구성하였다. 좌우가 엇비슷한 상황에서 도시에서는 인민전선의 청년들이 판을 치고 농촌에서는 무정부주의자들이 농민의 토지를 점거하고 공장에서는 반정부 파업이 일어났다. 이들은 내란기간에 스탈린식 테러를 자행했다. 5월이 되자 무정부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기 시작했다. 내란은 7월17일 시작되었다.
3) 프랑코의 승리
- 좌우가 동등하게 대립되던 민심은 내란이 되었다. 1930년대에 일어난 세계적인 사건 가운데 스페인 내란 같이 잘 못 알려진 것은 없다. 스페인 내란은 선악의 투쟁이 아니라 총체적인 비극이었다. 반란군은 남부와 서부를 장악했지만 마드리드를 손에 넣는데 실패했다. 정부군은 북부와 동부를 방어하고 있었다. 서로 반대파를 살해했다. 공화파는 성직자를 증오했다. 주교 20%, 수사 12%, 사제의 13%, 수녀 283명이 살해당했다. 좌파는 약 55,000명을 살해했다. 총살, 사지절단 등으로 민족주의자들이 살해한 인원은 그라나다에서 8천, 나바레에서 7~천, 세비야에서 9천, 바야돌리드에서 9천, 사라고사애서 2천, 발레아레스에서 3천 등이고 장군, 의운, 주지사, 의사, 교사도 포함되었다. 개인을 처벌한 것이 아니고 계급을 처벌한 것이다.
- 외국의 지원이 없었으면 프랑코의 쿠데타는 실패했을 것이다. 이탈리아, 독일의 공군지원이 프랑코 장군에게 있었다. 이로서 전세가 역전이 되어 프랑코는 국가수반 겸 대원수로 임명이 되었다. 공화파나 민족주의파가 거의 동등하게 외국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민족주의파는 독일, 이탈리아로부터 막강한 무기와 포르투갈, 아일랜드, 프랑스(소수지만), 백러시아, 영국, 미국, 중남미, 모로코로부터 병력을 지원받았고 공화파는 소련, 프랑스의 무기 지원을 약 4만 명의 외국인의 병력지원을 받았다. 외국의 지원이 승패를 가른 것은 아니고 프랑코 장군의 능력과 판단력이었다. 프랑코는 결코 역사가로부터 호의를 얻을 수는 없지만 그는 가족의 자제심을 한 몸에 갖고 태어나 33살에 장군이 되었고 모로코에서 전투 경험이 많았으며 전투에 대한 견해가 진보적이었고 그가 새운 육군사관학교는 가장 근대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프랑코의 철학은 자유주의든 전채주의든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영국의 웰링턴 공작과 유사했다. 프랑코는 가혹했지만 공정했기에 인기도 좋았다.
- 그를 쿠데타의 길에 들어서게 한 것은 의주 즉 조국애였다. 그는 신앙인이었다. 그는 정치를 증오했다. 그 이유는 자유주의자는 부패하고 이기적이었으며 사회주의자는 妄想家였고 자유주의자보다도 더 나빴기 때문이다. 그는 팔랑헤당과 카를로스주의자 세력을 통합해 자기 밑에 두었다. 그는 파시스트도 아니었고 유토피아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정치를 배제했기 때문에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 독일은 2억2,500만 달러의 채권이 스페인에 있었고 이탈리아는 2억 7,300만 달러를 스페인으로부터 받기로 했다. 따라서 두 나라는 스페인 내란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프랑코가 승리하기를 바랐고 그대로 되었다. 그런데 공화파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보유하고 있던 700톤의 금(7억 8,800만 달러)을 2/3를 스탈린에게 넘겨주었다. 스탈린은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의 승리에 대한 관심이 절박하지 않았다.
4) 탄압과 폭격
- 스탈린은 금으로 무기대금을 즉시 받으며 한편으로 무기 공급에 대한 정치적 대가를 요구했다. 스페인 공산당이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고 소련에 의해 통제되는 집단이었다. 공화파의 카바예로 총리는 스탈린에게 거부하는 몸짓을 보이다가 스탈린으로부터 협박을 받고 공화파 장군을 해임하라는 요구를 거부하며 소련 대사를 집무실에서 내쫒았다. 그러나 결국 스탈린에 의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이 공화파 스페인을 장악했다. 스페인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내란이 일어났을 것이 분명하다. 소련에서 숙청이 일어나는 대신 스페인에서도 숙청이 진행되었다. 외국인도 많이 숙청이 되었지만 조지 오웰과 빌리 브란트는 이 비참한 운명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스페인 내란이 있었지만 이는 스탈린의 벌인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사건들의 여파였다. 바르셀로나 학살의 비명소리는 엄청났다.
-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서유럽 지식인의 순진함과 우매함 그리고 거짓과 부패가 스탈린주의가 전파되는 것을 도왔다. 간신히 도망친 조지 오웰이 스페인의 실상을 고발하려 했을 때, 좌파 지식인들은 그러한 객관적인 진실을 거부했다. 그 이유는 스페인 해방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일, 이탈리아, 소련은 새로운 군사 장비를 시험하는데 스페인을 활용했고 작가들은 소설과 시의 소재를 얻기 위하여 스페인을 갔다. 헤밍웨이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위하여 스페인을 갔다. 앙드레 지드는 “소련에서 돌아와”에서 소련을 비판하였기에 공개적으로 ‘파시스트 괴물’이라는 호된 비난을 받았다.
- 스탈린인 이미 전쟁에 싫증을 느꼈고 스페인 내란의 가치를 다 짜낸 다음이었으며 금도 받았다. 그는 원조를 중단했고 프랑코는 마지막 카탈루냐 공격을 개시했고 1939년 1월28일 바르셀로나, 3월28일 마드리드를 점령했다. 마드리드가 함락된 날 히틀러는 1934년에 체결한 독일과 폴란드의 불가침 조약을 파기한다고 선언했고 이는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뒤였다.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것이었다. 프랑코는 이에 야만적으로 대했다. 즉 스페인의 문을 닫아버렸다. 그는 스페인을 타락으로 이끄는 파멸의 과정에 마침표를 찍으려 했다. 집산주의라는 몸부림치는 사지를 잘라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스페인을 현재의 세계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그 후에 몰아친 끔찍한 전쟁에서 스페인을 어느 정도 보호를 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제10장 : 유럽의 종말
1) 쇠퇴의 징후
- 침략의 시대는 전쟁을 불러올 것이 분명했다. 1930년대에 일어난 일들이 20세기 후반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1940년 4월 5일 괴벨스의 극비 기자회견의 내용을 보면 전쟁을 예고하는 것이지만 히틀러의 생각은 국민이나 장군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 했다. 그가 나의 투쟁에서 표현한 것을 보면 독일의 유럽이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독일의 근거지를 포위될 위험성이 있는 중부유럽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1928년에 쓴 “비밀의 책”에서 보면 유대인의 말살이라는 정화과정이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인 인종사회주의를 추구한 것이었다. 그의 인종이론의 특징은 정화를 통해 독일이 최강대국이 되며, 유대인의 인종오염이 볼셰비키주의가 동일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의 전체 계획은 1. 정화작업, 2. 베르사유조약 파기, 3. 소련 침공으로 제국건설, 4. 아프리카의 식민지화 및 해군육성, 5. 미국과 패권전쟁으로 나폴레옹 이후의 가장 대담한 생각이었다. 그는 기본계획이 없다고 할 정도로 상황에 맞게 변신을 하며 열정적이었다.
- 미국은 루스벨트 이후에도 보호무역 정책을 채택하고 1935년 이후에는 고립주의를 공식화 했다. 그는 1945년 죽을 때까지 외교정책에서 경솔함이 많았다. 루즈벨트 행정부는 독일에 대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대항할 수 있도록 외교, 군사적 지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독일에 대하여 31개 국명을 거론하며 침략을 하지 말라고 했고 영국과 함께 프랑스에게 군축을 요구했다. 그 동안 독일은 군비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1930년대 들어 영국도 쇠퇴의 기미가 있었다. 처칠은 인도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는 1935년 인도통치법(인도 자치연방제 실시법)을 반대하였으나 이법은 통과가 되었다. 그는 영국의 생존을 위하여 군비를 확장하고자 했으나 이 또한 희망적이지 않았다. 영국의 좌파 지식인들은 애국보다 스탈린에게 구애를 했다.
- 각계각층의 박애주의자들도 전쟁에 대비하는 정책을 반대했다. 히틀러가 사악한 짓을 벌이고 있다는 증거가 있음에도 그저 국내용이라고 일축했고 대주교 템플은 히틀러가 평화에 기여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합리화의 뒷면에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비겁함이 숨어있었다. 하지만 1935년 영국의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했다. 그런데 1938년 말까지 영국이 독일에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히틀러는 행동에 나섰다.
2) 독일의 공세
- 1935년 3월18일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무장해제 조항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겁을 먹은 영국은 영독 해군 협정을 체결하여 독을의 해군을 증강권한을 주고 이에 프랑스는 분노했다. 더구나 영국의 외무장관 이든은 독일의 잠재적인 파괴력을 알지 못했고 영국의 언론도 무지했다. 에티오피아 사태로 인한 영불의 반목은 히틀러에게 이득을 주었다.
- 1937년11월 5일 히틀러는 전쟁의 의지를 내보였다. 이에 소극적인 장군들이 해임되고 히틀러는 육군 장관 자리에 올라 군대의 수반이 되었고 전권을 나치가 장악했다.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침고하고 4월에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명령했다. 영국은 주저하고 있었다. 히틀러 현상을 공산주의의 확장이라는 소련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침공으로 무장을 갖추게 된 독일군 80개 사단이 프랑스를 겨누게 되었다. 그러나 1938년 말은 히틀러 인생의 분기점이었다. 국민의 마음이 비었지만 그는 스탈린의 통치방식을 닮아가고 있었다. 1939년 3월 프라하를 점령하고 리투아니아로부터 메멜 지방을 빼앗았다. 9월에는 폴란드 침공을 정당화 하는 연설을 했다. 이에 영국에는 전쟁에 돌입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하지만 폴란드는 소련 침공 루트이므로 히틀러는 영국과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소련을 전격적으로 침공하여 방대한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하여 장기적이고 전 세계적인 전쟁을 수행할 힘을 축적하기 위하여 비스마르크가 치른 1860~70년대의 전쟁 같이 단기적이고 국지전에 제한하여 소모전을 피하기를 바랐고 2개 이상의 전선을 피해야 했다.
3) 사탄과의 계약
- 1939년 4월28일 히틀러는 불가침 보장을 요구하는 루즈벨트의 허무맹랑한 연설을 비난했고 그는 독일의 이익만을 위한 행동지침을 선언했다. 스탈린은 독일의 침략을 두려워 해 애가 탔다. 스탈린은 이에 대비해야했다.
- 첫 번째 협약은 1939년 5월22일, 히틀러와 무솔리니 사이의 “강철동맹”이다. 이는 히틀러의 프라하 점령이 있자 무솔리니는 알바니아를 침공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군사사절단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이들 세 나라의 연합이 폴란드 침공 후에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한 긴급수단이었다.
- 다음은 1939년 8월23일 스탈린과의 협상 타결로 이루어진 독소불가침조약이다. 이는 실상 폴란드 침공 조약이다. 9월28일 독소국경 및 우호조약에 따라 폴란드의 분할이 실시되고 국경이 확정되었다. 이로서 소련은 핀란드, 발칸반도, 루마니아 일부에 대한 처분권을 얻었다. 그러나 침공을 당한 폴란드는 영국에게 호소를 했고 프랑스도 마지못해 동참할 것이라고 보았기에 히틀러는 계획을 수정했다. 독일국민은 원하지 않았지만 히틀러는 이를 전쟁의 시작이라고 보고 독일 병원의 중환자를 모조리 살해하라고 지시하며 10월17일에 카이텔 장군에게 폴란드를 러시아 침공의 전초기지로 삼으라고 명령을 한다. 스탈린은 안심하는 착가에 빠졌고 히틀러는 서구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하여 10월 1일 공부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독일군이 서부로 이동을 했다. 프랑스는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꼴이 날까봐 주저하고 있었다.
4) 이상한 패배
-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투를 피하고 이상한 군사행동을 하여 히틀러를 이롭게 했다. 히틀러는 원래 11월12일 프랑스를 침공을 지시했으나 프랑스가 오락가락하여 노르웨이를 침공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1940년 5월10일에 프랑스를 공격하여 6주 만에 대성공을 거두고 6월22일 휴전협정을 맺었으며 독일을 지원하여 프랑스와 싸운 이탈리아와는 6월24일 휴전협정을 맺었다. 휴전협정의 비시 프랑스(Vichy France : 나치의 지배를 받던 프랑스의 괴뢰정권) 측 서명자는 필리프 페탱 장군이었다.
- 페탱의 협정을 거부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샤를 드골이다. 영국은 8월5일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 세력과 협약을 맺었다. 페탱은 영국과 관계를 끊었고 비시 정부는 나치의 품으로 들어갔다. 스페인에서는 히틀러는 재미를 못 보았다. 프랑코가 참전을 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코는 참전의 대가로 히틀러에게 엄청 많은 것을 요구했다. 히틀러는 하사관으로 우습게 본 것이다. 프랑코가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부수적인 이유는 영국이 강화를 원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영국의 적의를 모르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영국으로부터 강화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5) 처칠의 전쟁결의
- 영국은 1940년에 더 호전적으로 변했다. 프랑스가 페탱과 정적주의를 택한 반면, 영국은 처칠과 영웅주의를 선택했다. 이 당시 영국의 경제가 침체기를 벗어나고 있었다. 산업생산이 엄청났으며 이는 전시 생산능력과 연결이 되었다. 이해 5월 7일 처칠은 영국총리 겸 국방장관이 되었다. 그는 낭만주의자였고 전쟁을 주장했지만 비현실적이지 않았다. 영국이 영연방의 지원을 받아도 독일을 이기기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미국의 참전을 예상하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프랑스가 독일로 넘어가자 처칠의 정치적 입지는 강화되었다.
- 처칠의 결정은 양차 대전에 있어서 오판을 반복했다. 하지만 앞으로 닥칠 많은 재난에도 불구하고 처칠의 권위는 도전받지 않았다. 1945년 포츠담 선언 때까지 영국이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위상을 유지한 것은 처칠 때문이었다. 하지만 구시대의 유럽은 1940년 여름에 끝이 났다. 영국 남부를 공격하려던 괴링의 공군은 실패를 했기에 히틀러는 서유럽 전선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고 이탈리아는 처칠의 영국에 의외로 약한 군대였다. 처칠은 독일본토를 무차별 폭격을 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일반 시민을 죽이는 전략적 폭격이 전체주의 사회의 도덕적 상대주의가 합법적 강대국의 의사결정 과정에도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이 일은 우리 시대의 도덕적 타락의 결정적인 단계를 보여준다.
- 영국은 전제적 경제정책의 독일과 장기전에 자신이 없기에 自暴自棄한 상태였고 이러한 연합국에 루스벨트는 동정을 표했지만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다. 1940년 말이 되자 영국은 곡간이 바닥이 나갔다. 이에 미국이 1941년 3월11일 무기대여법을 통과 시켰다. 이로서 미국은 영국에게 무기를 무제한 제공을 하게 되었으나 실제로 영국은 돈을 지불했다.. 처칠에게 이 무기대여법은 힘이 되었고 중요했다. 처칠은 1941년 초에 구시대 유럽의 합법적인 체제는 사라졌으며 어느 정도 법적 질서의 회복을 기대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히틀러의 오판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처칠의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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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타임스 2권의 목차
제11장 분수령
- 독일의 러시아 침공
- 실패의 원인
- 스탈린의 생존 전쟁
- 일본의 전쟁 계획
제12장 초강대국과 대량학살
- 정보와 물량의 승리
- 최종적인 해결책
- 원폭 투하와 도쿄 재판
제13장 강제된 평화
- 냉전의 시작
- 중국의 공산화
- 티토 소동과 한국전쟁
- 스탈린의 뒷모습
- 매카시즘과 아이젠하워
제14장 반둥 세대
- 간디와 네루
- 제3세계의 환상
- 수에즈 위기와 국제연합
- 알제리와 프랑스
제15장 야만의 왕국
- 식민지 해방의 바람
- 식민지주의와 사회공학
- 아파르트헤이트의 기원
- 아프리카 신생국의 참상
- 늘어나는 폭력 사태의 비극
제16장 거대한 사회 실험
- 마오쩌둥과 사회 개조
- 문화대혁명의 등장과 파국
- 멜로드라마의 비극적 결말
- 인도와 파키스탄
제17장 유럽의 부활
- 데가스페리의 시대
- 아데나워의 독일
- 드골과 프랑스의 부활
- 처칠과 영국 경제
- 전후 유럽의 발전
제18장 미국의 자살 기도
- 선린정책과 페론주의
- 쿠바 혁명과 미사일 위기
- 베트남전쟁
- 위대한 사회의 비극
- 언론과 닉슨 행정부
- 외교 정책의 변화와 그 영향
제19장 1970년대의 집단주의
- 반기업 풍토와 달러의 약화
- 오일 쇼크와 세계은행
- 미국의 침체와 소련의 계층사회
- 탄압과 테러
- 냉전과 테러리즘
- 집단주의와 결정론
제20장 자유의 회복
- 변화의 바람
- 이슬람 근본주의의 부흥
- 테러와 내전의 역사
- 인구와 식량 문제
- 이웃에게 배우는 교훈
- 대처와 대처리즘
- 레이건 정권의 성과
- 탈냉전의 시대
- 과학 발전과 인류의 미래
옮긴이의 말
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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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타임스 2권에 대하여 먼저 읽은 분들의 독후감을 아래와 같이 참조한다.
<Blog, 그노마>에서 인용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옳다는 것이 입증되면서 20세기는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20세기의 특징은 상대주의의 시대였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은 1886년의 일이지만, 그것이 명확해진 것은 상대성이론이 증명되면서다. 뉴턴의 절대 우주는 불가피하게 과거의 유물이 되었고, 절대적 시공간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으므로 신으로 표현되는 절대가치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 절대적인 것이 없다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사람들은 갑자기 딛고 서있던 발판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 20세기에 등장한 수많은 이데올로기는 이런 상대주의의 불확실성의 결과였다. 민족주의를 필두로 여러 형태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국수주의, 집산주의, 파시즘, 대중주의, 식민지주의. 탈식민지주의, 종교적 근본주의와 분파주의, 정의주의 등 수많은 사상과 이념이 출현했다. 사람들은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종교처럼 신봉했고 실천에 옮겼다. 따라서 20세기는 정치적 실험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런 이데올로기를 다른 사람의 두뇌에 억지로 심으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폭력을 불러왔다. 1,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하여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문화대혁명 등 인간의 광기는 1억2천만 명 이상의 목숨을 희생시켰다. 소련 및 동구권의 몰락과 함께 큰 줄기가 막을 내리기는 했지만.
- 이 책에서 새롭게 얻은 내용은 그간 알고 있던 것들을 다수 깨부순다. 스탈린의 무자비한 살육습관은 왜 멈출지 못했는지, 히틀러가 왜 소련을 침공했으며,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무엇 때문에 대공황이 발생했는지, 히틀러나 무솔리니, 레닌, 마오쩌뚱, 간디, 테레사 수녀 등이 포장되고 선전된 모습과 달리 실제 어떤 인물인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또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성립과 민족 간 전쟁, 남미의 부흥과 몰락,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 이라크 전쟁, 이스라엘과 중동의 팔레스타인 전쟁, 그 외의 국가에서 벌어지는 인종분쟁과 정치적 갈등이 상세히 드러난다.
- 스탈린과 히틀러는 저열하기 짝이 없는 개인적인 편견과 독단적인 비전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자국민을 파멸로 밀어 넣고, 주변국 국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2차 대전의 전개 양상을 보면 <삼국지>를 다시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협력과 배신을 반복하는 사이 프랑스와 영국은 자국을 방어할 준비를 하지 못한 채 독일의 공격을 받았다. 프랑스가 항복하고 영국마저 무너지기 직전 히틀러가 갑자기 소련을 공격하기 위해 주력군의 방향을 동쪽으로 향함으로써 영국은 위기에서 벗어난다. 2차 대전 기간 내내 미국은 소련에 식량과 무기를 공급했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적대적으로 변하여 냉전이 시작된다. 적이 동지가 되고 동지가 적이 되는 <삼국지>와 닮은 모습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 일본은 언제나 은혜를 배신하고 강자에 빌붙어온 비열한 민족성이 드러난다. 일본은 한반도에 백제가 강했던 시대에는 백제와 교역을 함으로써 문명의 기초를 다졌지만 신라가 강해지면 백제를 배신하고 신라에 붙었다. 중국이 통일국가를 이뤄 강성할 땐 조공을 보내 머리를 조아리다가, 허약한 구석을 발견하면 곧바로 배신하고 정복을 꿈꿨다. 아편전쟁 이후에는 중국을 짓밟고 당시 최강대국인 영국에 추파를 던져 영일동맹을 맺음으로써 러일전쟁마저 승리한다. 만약 영국이 영일동맹에 따라 수에즈 운하에서 러시아 발틱 함대의 통과를 저지함으로써 지중해를 되돌아 아프리카 남단으로 우회하도록 하지 않았다면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기는 불가능했다고 본다. 1차 대전 후에는 영국보다 히틀러가 더 강해보이자 일본은 곧바로 영국을 배신하고 독일과 협정을 맺고 2차 대전을 일으킨다. 잘 알다시피 2차 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최강으로 등극하자 미국에 무릎을 꿇고 일본 처녀들의 정조까지 바쳐 달러를 벌기로 '경제적 동물'을 자처한 민족이 일본인들이다. 상세한 내막을 알고 보면 일본의 국민성은 더욱 역겹다. 미국의 힘이 약해지고 더 힘센 나라가 등장한다면 일본이 미국을 배신하는 건 순식간일 것이라는 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 이 책의 대부분은 미국과 유럽의 흐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부분적으로 소련과 중국, 일본, 남미와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를 포함시키기는 했지만 백악관의 내막은 초침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반면, 동남아시아 등 제3세계 국가의 흐름은 80년의 역사가 잠깐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미국의 여론과 대학생들의 문화, 인종차별, 석유재벌의 활동은 자세히 다뤄지지만 다른 나라의 거대기업은 규모가 더 클지라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중국의 마오쩌뚱에 관해서는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함으로써 마오쩌뚱의 어리석음과 중국 인민들의 무력함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저자가 중국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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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스토리, 오늘오늘오늘인생>에서 인용
- 사실상 완료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일본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것은 미국의 비인간적 핵 실험에 불과했다는 견해와 상반된다. 원자폭탄을 썼기에 전쟁이 끝났다는 얘기다.
일본 정부는 공개적으로 스위스 대사관을 통해 세계를 상대로 항의문을 보냈다. 20년간 국제법을 무시해온 그들이 미국 정부가 국제법을 무시했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그들은 특히 히로시마에 투하한 새로운 폭탄의 무자비함에 대해 얘기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뒤로는 다른 일을 꾸미고 있었다. 그들은 은밀하게 원자폭탄 프로그램의 책임자였던 니시나 요시오를 도쿄로 불러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이 진짜 핵폭탄인지, 만약 그렇다면 6개월 내에 똑같은 폭탄을 만들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따라서 원자폭탄 하나로는 충분치 않았다는 게 분명해진다... - 111p
이런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고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본토가 아니라도 만주에서 엄청난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고, 재래식 폭탄을 사용한 폭격은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이미 폭격은 하루에 티엔티 1만 톤의 위력으로 핵폭탄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따라서 핵무기가 사용되어 연합군 병사들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목숨을 구했다고 볼 수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죽은 사람들은 사실 영미 과학 기술의 희생자라기보다 극악한 이데올로기에 마비된 정부 시스템의 희생자였다. 일본은 그러한 이데올로기 때문에 절대적인 도덕적 가치 뿐만 아니라 이성마저 달아나버렸던 것이다. - 113p
- 추앙받는 간디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묘사하고, 또한 인도 현실과 괴리된 인물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만성적인 변비를 물려받았다. 그래서 신체 기능에 집착했으며, 음식물의 섭취와 배설에 큰 관심을 보였다. 간디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시중드는 여인에게 이렇게 물었다. "자매여, 오늘 아침 대장 운동은 어땠는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변비와 우리의 문명'이었다. 그는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는 이른바 바라흐마차리아를 실험하며, 단순히 온기를 얻기 위해 벌거벗은 여자들과 함께 잠을 잤다. 중년이 된 뒤로는 1936년 잠을 자고 있을 때 단 한 번 사정했다. 그때 나이 66세였고, 이 때문에 큰 정신적인 혼란에 빠졌다.
간디의 기행은 신성한 기인을 숭배하는 인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인도의 문제나 인도의 소망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물레를 돌리는 일은 직물을 대량 생산하는 나라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가 생각한 식량 정책을 추진했다면, 아마 많은 인도인이 굶어 죽었을 것이다. 사실 간디의 아슈람은 퍽 비싸게 먹히는 그의 '단순한' 식사 취향과 수많은 '비서'와 하녀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돈을 대주어야 했다. 그를 곁에서 지켜보았던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간디의 가난한 생활을 유지하는 데는 엄청난 돈이 든다" 간디 현상에는 20세기적인 사기의 냄새가 강하게 풍긴다. 그의 방식은 극도로 자유로운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 196~8p
- 허울 좋은 민주주의에서 시민은 주인일까?
식민지 해방 과정에서 이어져 내려온 이런 통념과 여기에 따라오는 복잡한 법률은 '진정한' 국민과 '정치적' 국민 사이의 괴리를 넓혀 놓았다. 게다가 '정치적' 국민을 매우 좁고 분파적인 개념으로 한정지었다. 따라서 脫식민지화 과정의 수혜자는 투표 조종자들이다. 여기에는 거대한 기만의 씨가 뿌려져 있다. 직업 정치가들은 국가를 표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보통 사람들은 국가를 정의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진정한' 국민에게 민주주의는 법치보다 중요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형식이고 법치는 내용이다. 식민지를 경험한 국민들에게 독립이 주어졌을 때, 그들은 정의가 주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얻은 것이라고는 정치인들을 뽑을 수 있는 권리가 전부였다. 물론 식민지 시대에는 정치적 평등도 없었다. 기껏해야 법 앞의 평등을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권력 이양의 과정에서 투표권이 진보의 척도가 되었고, 법은 그저 되는 대로 방치되었다. 그리하여 대다수의아프리카인은 오랜 독립 과정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 272p
- 70년대 국제적 테러리즘 증가의 지역별 요인을 설명하고 있다. 나치 친위대의 테러리즘이 철학적 토대를 실존주의에 두고 있다고 분석한다. 색다른 시각으로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하지만 실제로 1970년대의 세계는 핵전쟁의 가능성보다는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폭력이 증가하는 현실에 혼란을 겪어야 했다. 1970년대 30차례 이상 재래식 전쟁이 일어났다. 대부분은 아프리카가 전장이 되었다. 또 인명의 희생은 더 적지만 정치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세계를 더 큰 혼란에 빠뜨린 것은 국제적인 테러리즘의 증가였다.
이 새로운 현상에는 전통적인 폭력의 네 가지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우선 회교도의 정치 종교적 테러리즘 전통이다. 두 번째 러시아의 테러리즘 전통이다. 레닌은 이를 국가 테러리즘으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국가 테러리즘은 국내에서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 수출되기도 했다. 세 번째 유럽, 특히 독일에는 폭력을 도덕적으로 합리화하는 전통이 존재했다. 독일의 테러리즘 전통은 실존주의에서 철학의 옷을 입었다. 실존주의는 전쟁이 끝난 뒤 사르트르가 널리 퍼뜨렸다. 사르트르는 평생 동안 폭력에 매료되어 살았고, 제자 프란츠 파농은 1961년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사람들'을 출판했다. 이 책은 테러리즘의 안내서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책이다. 네 번째 지중해 해적들의 비정치적인 폭력의 전통이다. - 600~1p
- 구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사실을 부정하고 이론적 세계를 중시하는 엘리트주의적 사상이라며 비판한다.
모든 구조주의자들에게 공통적인 것은 인간의 속성과 활동이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마르크스주의의 가정이다. 과학 법칙이 무생물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과 비슷했다. 따라서 이런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사회 과학의 역할이었다. 사회는 사회 과학이 발견한 법칙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이 새로운 形態意志적 유토피아는 그 여정의 끝에 강압적인 사회공학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구조주의의 전성기는 미국이 쇠퇴하고 소련의 세력과 영향력이 꾸준히 확대되고 있던 시기와도 일치한다. 구조주의는 그 원류인 마르크스주의처럼 反경험적이고 실제 세계보다는 이론 세계를 옹호하고, '설명'을 위해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구조주의는 국제연합이라는 가상의 카드로 만든 집에 잘 어울렸다. 이곳에서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북반구가 남반구였고, 남반구는 북반구였으며, 부가 빈곤을 낳았고, 시온주의는 인종주의였고, 죄를 저지른 건 전부 백인이었다. 국제적인 부정과 불평등의 사악한 하부 구조였던 다국적기업은 본질적으로 구조주의식 개념이다. 구조주의는 마르크스주의처럼 영지주의의 한 형태다. 엘리트들만 알 수 있는 비밀스런 지식의 체계가 구조주의였다. - 616~7p
- 마르크스와 레닌의 무관심에 따라 소련의 농업 정책이 실패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소련이 처한 모든 곤란의 뿌리에는 조작된 통계 증거에 근거를 둔 이론과 완전한 무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누구도 농업에 관해 분별 있는 견해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르크스와 레닌 둘 다 농업에는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본질적으로 도시에 맞는 종교다. - 671p
- 일본의 경제 성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며 예찬하고 있다. 시장만능주의 같다.
일본이 이룬 기적에 정말 기적 같은 일은 없었다. 일본은 애덤 스미스 경제 이론을 그대로 보여주는 실례일 뿐이다. 물론 여기에 케인스주의가 어느 정도 가미되어 있기는 했지만...
하지만 일본 정부가 가장 잘한 일은 애덤 스미스의 모델에 따라 강력한 내부 경쟁의 기틀을 세우고 기업에 자비로운 풍토를 조성한 것이다. 일본 기업은 의인화의 원칙과 새로운 반집산주의 가족 중시 사상으로 산업 공정을 인간적인 과정으로 변모시키고, 이를 통해 계급투쟁의 파괴적인 영향을 줄일 수 있었다. - 682~3p
- 시장 경제 체제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는 민주화를 도모한다고 보고 있다.
시장 경제 아래서는 원칙적으로 국가가 거대한 의사 결정 영역에서 손을 떼고 개인에게 결정권을 위임한다.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는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시장의 자유는 정치적 억압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이것이 타이, 대만, 한국의 사례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다. - 691p
- 경험론적 과학으로서 자연 과학이 사회과학에 비해 우위에 있다는 견해인 것 같다. 형이상학과 경험 과학의 권력 주고받기 패턴이 반복되는 것 아닐까?
에드워드 윌슨의 저서는 곤충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방대하고 상세한 경험적 연구를 근거로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의 법칙과 비슷한 일반 이론이 태어날 시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동안의 생물학적 성과가 시사되는 바는, 그 과정이 형이상학이 아닌 경험론적 과학을 통해, 칼 포퍼가 대단히 명석하게 규정한 방법론을 통해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 포퍼의 방법론에 따르면, 이론은 매우 한정적이고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자료로 논박이 가능해야 한다. 그것은 마르크스, 프로이트, 레비 스트로스, 라캉, 바르트, 그 밖의 예언가들이 얘기하는, 검증할 수 없으며 언제든 자기 합리화가 가능한 만능 이론과는 다르다. - 758~9p
- 책에서 줄곧 논의된 20세기 역사의 부정적 근원을 지적하고 있다.
20세기가 끝나면서 인류는 분명 몇 가지 교훈을 얻었다. 하지만 파멸적인 실패와 비극을 가능케 했던 근본적인 악 - 도덕적 상대주의의 등장, 개인적인 책임감의 소멸, 유대 기독교적 가치의 거부, 인간이 지적 능력을 통해 우주의 모든 신비를 해결할 수 있다는 오만한 믿음 - 이 사라져가는 과정에 있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21세기가 과거와 달리 인류에게 희망의 시대가 될 수 있을지는 여기에 달려 있다. - 7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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