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영등포의 삶

[스크랩] [집으로 가는 길 - 도림로]

영등포로터리 2016. 5. 3. 22:34

[집으로 가는 길 - 도림로]

도림로의 시작은 남구로역이며 그 끝은 영등포구 구민체육센터에서 좌측으로 구부러져 경부선을 넘고 문래공원을 지나 다음 삼거리로서 문래동이다. 남구로역은 새벽에 인력시장이 형성이 된다. 그런데 다문화 현상의 영향이듯이 디지털로27길을 경계로 하여 가리봉동 측은 중국동포, 구로동 측은 한국인들을 위한 인력시장이 형성이 된다하여 이길을 두만강에 비유를 한다는 말이 있다. 이곳의 환경은 열악하였지만 구로구청의 노력으로근로자를 위한 쉼터가 마련이 되어 많이 개선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지하철 2번 출입구에 보면 노숙인이 누워있는 경우가 눈에 띤다.

디지털로27길 위에는 아주 오래 전 118번 버스 종점이 있었다. 내가 1975년 봄에 장발단속에 걸려 죽어라 도망치던 그 길이다. 내가 다시 이지역에 온 것은 한일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이었다. 그러나 그때도 이 지역에는 공중화장실이 운영되었고 그 배경에는 소위 벌집이라 일컬어지는 쪽방촌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략 대림역을 바라다 보았을 때에 남구로역이 시작되는 지점과 끝나는 지점 오른 쪽 주택가 일대였으며 지금은 그 일대가 모두 재개발이 되어 아파트 촌으로 변해서 구로디지털단지의 고층빌딩과 인접해 있다. 대림역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구로시장 입구의 맞은 편이 그 일대이다.

여기서 조금 더 내려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보성운수 차고지가 있는 이화아파트교차로에 다다른다. 이곳에는 곱창집들이 몰려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여기서 나랑 같이 곱창을 먹은 사람은 관계가 소원해지는 징크스가 있다. 어찌 보면 오월회(五月會 : 5월에 모임을 조직함)의 태동이 여기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초기 멤버였던 Y모 여인이 그렇고 지방의원이었던 C모 의원이 그러했으며 최근에는 미국에서 살면서 내가 본인의 직장 선배라고 하여 더운 여름 날 귀국하자마자 찾아와 곱창전골을 먹고 돌아간 사람이 정치적인 이념이 상이하다고 페이스북에서 절교를 한 Y모라는 후배직원이 그러했다. 참으로 기이하고 이상한 일이기도 하고 우연 같지만 묘한 일이기도 하다.

그곳을 지나면 도림천이 우에서 좌로 흐르고 그 위로 2호선 지상구간의 대림역( https://youtu.be/OlX4hjlFppA) 이 7호선과 환승역을 이룬다. 이 지역은 교통이 매우 편리한 지역이다. 가리봉동의 지구단위계획에 의거 지가가 상승하자 임대료가 비교적 싼 대림동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있었다. 얼추 10년 전쯤의 일이었지만 그들은 이제 이곳에서 명실상부한 타운을 형성한 중국동포들이다. 도림로 우측에는 대림2동의 중앙시장이 자리잡고 있는데 상당부분의 상권이 중국동포들에게 넘어가 있다. 그들의 점포용 간판은 네온사인을 방불케 하는 휘황찬란한 조명의 예술을 보여준다. 서울의 밤 어느 곳보다도 밝게 빛나는 상가의 거리이며 밤낮으로 주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포들이 모여드는 그들의 공간이 된 것이다. 다문화현상은 우리나라만의 것은 아니며 이미 세계적인 인종, 민족, 국민 간의 교류이자 왕래현상이다. 따라서 이런 현상을 배척할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세와 상호이해를 증진시키고자 하는 노력과 기술이 필요하다고 본다.

도림로 길가에는 도림천 쪽에서 보면 복지병원, 한국정형외과, 명지성모병원 등 크고 작은 병의원이 즐비하다. 그 맞은 편에는 서울시의 "남부도로사업소"가 자리잡고 있고 지역상인들의 금융기관인 전통의 대창신협(이사장:이일희)이 있고 사거리에는 서울시의 "다문화빌리지센터"있던 빌딩이 있다. 이 사거리가 우성아파트사거리이다. 북쪽으로 연하는 이길은 언덕이다. 아침에 반대편 차로에서 버스를 타고 지나다 보면 자칫 버스가 구르면 어찌하나 하는 정도로 가파른 고갯길인 것이다. 나는 이 사거리를 생각하면 2006년 지방선거에서의 유세장면이 떠오른다. 바로 우성아파트 상가 아래에 유세차를 대림역 방향으로 대놓고 유세를 하면 언덕 아래로 음량이 고스란히 전달이 되어 그 지역을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그 유세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다문화빌리지센터는 동 지역에 모여살게 되는 중국동포를 위한 행정적인 지원시설이었지만 행여 지역주민들로부터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 하여 내놓고 언급하기가 어려운 사업이었지만 당시에 나는 다문화현상은 그리고 같은 한민족의 혈통이라는 차원에서의 다문화는 어느것보다도 중요한 문제라 판단하여 더 많은 예산이 지원되도록 하였고 그 판단은 옳았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사거리로부터 좌측으로는 아파트 담장이며 우측에는 고갯마루를 넘어서며 이렇다할 시설이 없어 어두운 거리이다. 그 어두운 구간을 지나면 나오는 약국이 있는데 그 상호는 영인약국이다. 이 약국은 연세대 선배의 부인과 딸이 운영하는 약국이다. 이 선배께서는 내 기억으로 외환은행을 다녔는데 동문회 모임에서 만나면 매우 너그럽고 후배들을 늘 격려하는 말씀을 해주었었다. 이 약국을 기점으로 하여 길을 두개로 나눌 필요가 있다. 앞으로 진행을 하면 도림로지만 우측으로 들어가면 대림로22길이 있다. 이름하여 도깨비 시장골목이다.
먼저 우측으로 들어가보자. 우측에는 4개의 아파트 단지가 있다. 최근에 건축된 신동아 아파트, 갑을명가 아파트, 한신아파트, 온누리 아파트가 그것이다. 신동아 아파트는 내가 시의원으로서 아파트재개발이 신청, 승인, 건축, 분양된 것이기 때문에 나로서는 애정이 가는 아파트이다. 한 때 어머니가 이 아파트 뒤에 있는 주택에 1년 정도 거주한 적이 있다. 주거환경도 좋지 않은데에 모셔서 지금 같이 몸이 나빠진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면 마음 아픈 동네이다. 한신아파트는 묘한 인연이 있다. 어머니가 젊었을 때에 고향 증평에서 양장점을 운영한 적이 있는데 이때 동네 총각 아저씨가 놀러와서 예쁜 여종업원과 재미있게 지낸 때였다. 그 후로는 수십년간 연락을 모르고 지냈는데 그 아저씨가 한신아파트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로서는 이 얼마나 반가운 해후였던가? 결국 그 아저씨도 유명을 달리했지만 사람의 만남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닌 듯했다. 내가 2006년 지방선거에 출마를 하였을 때 지역의 연고가 없다고 하여 지역주민들로부터 많은 힐란을 받았다. 그런데 찾아보니 내가 군에 있을 때에 주민등록지가 대림동으로 되어 있었던 적이 있었다. 이유인즉 시집간 여동생의 시댁이 바로 대림동이었고 내가 주민등록을 이곳에 신고해놓고 군생활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가 외쳤다. "나도 대림동에 살았던 때가 있었다!!!"라고... 이 얼마나 웃기는 해프닝이었던가? 하지만 그때는 참으로 절실했던 나의 주거기록이었다. 도깨비 시장은 애환이 있다. 주택에서의 주거환경을 개선시켜드리려고 시장 내의 온누리 아파트로 집을 옮겼다. 하지만 이곳으로 옮긴지 몇 달만에 치매로 진단된 내 어머니의 일생이 나를 울린다. 그렇게 우울하여 나홀로 나가 앉아 술잔을 비우던 집이 있었다. 그 집은 잔비어라는 맥주집이었는데 나는 여기서 지난 날 치열했던 선거전에서 동지로서 만났던 랑과 란 그리고 향을 다시 만났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잔사모"를 조직했다. 이른 바 잔을 사랑하는 모임이었다. 이 대림로22길을 따라 내려가면 영등포구 장애인복지관이 나온다. 그곳은 신길로이며 좌로 틀면 또 많은 애환이 있는 영등포을 당협사무실이 있고 조금 더 가면 신풍역이 나온다.
다음은 영인약국 앞에서 직진을 하자. 이길은 대체적으로 어두운 편이다. 왼쪽에 은행이 있고 오른 쪽에는 도깨비시장의 출입구와 연결되는 지점에 영등포소방서 대림파출소가 있다. 길을 다라 내려가면 오른 쪽에는 이름지을 만한 특별한 인연의 가게는 별로 없다. 단지 좌측으로 보면 자주 들리던 곱창집 하나, 지금은 없어진 전집, 인테리어가 남달랐던 선술집이 있다. 그렇게 대방천로를 가로지르면 영등포 구민체육센터가 나오는데 좌측으로 가면 문래동이며 우측으로 가면 신풍역이다. 나는 최근에 이 삼거리를 "패자의 거리"라 부른다. 그 이유는 20대 총선결과를 보고 어느 당도 승리하지 못한 패자의 선거였다고 결론을 내었기 때문이다. 3당의 후보자가 당선과 낙선의 사례로 현수막을 내다 걸었으니 모두가 패자로 보인 것은 이번 선거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2016.05.03/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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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돌고도는 영등포 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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