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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탐욕의 역사]
- Philippe Gigantes 지음, 강미경 옮김
이 책은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개인적 혹은 집단적 탐욕에서 비롯되어 자행된 파괴적인 행동을 사례 별로 기록한 것이다. 모세, 예수, 부처, 무하마드, 노자, 솔론 등 설파한 가르침을 강조하며 그러한 가르침이 개혁정치를 위하고 민주주의 원리를 실천하도록 탐욕의 억제제로 사용되어야 하건만 이 세상은 악과 선이 혼합되어 공존하는 공간이다. 이 책을 보고 있노라면 인류가 그려온 역사라는 궤적을 모두 들여다보는 느낌이 든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 진 세계사를 다시금 떠올리며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고 당면한 문제를 푸는 해법을 잠시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의 권력을 다룸으로서 파괴자인 동시에 창조자였던 탐욕의 화신들을 만나는 것이다. 1부에서는 인류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위대한 인물의 가르침을 되짚어보고, 2부에서는 사회질서를 혼란시키는 주범인 탐욕가를 다룬다.
1부 : 규범을 창조한 사상가들
1. 모세 : 모세는 BC14C~13C를 산 사람으로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이라는 율법을 통하여 “권력과 부를 탐하는 자 혹독한 징계를 받으리라”라는 가르침으로 권력과 부를 탐하는 자들에 의한 착취를 제한하였다.
2. 솔론 : BC630~560년경에 그는 소득이 많은 자에게 차등세금을 부과하는 누진세를 처음 적용하며 부자의 땅을 몰수 하지 아니하고 가난한 자에게 정치권력을 나누어 주어 민주주의의 핵심을 최초로 구현하였다.
3. 플라톤 :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그는 노예제도를 지지하고 민주주의를 반대하였다. 그것은 민주정치의 꿀맛을 본 아테네가 부패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론에서 이상국가(理想國家)를 통치계급, 전사계급, 산업계급으로 구성하고 이상국가에서도 부를 위해 통치자는 시민을 억압하고 착취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훗날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독재자들은 플라톤을 많이 인용했다. 그러나 그는 철학사상과 정치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4. 예수 : 약 2,000년 전에 그는 복수의 신이 아닌 용서의 신을 세상에 선사했다. 용서를 강조하고 불신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하여 훗날의 종교인들이 유대인을 단죄하고 대량학살을 정당화 하는 일도 있었지만 그가 전한 하느님은 복수가 아닌 용서의 신이었기에 그는 2,000년간 사람의 마음을 샀다.
5. 브라만교, 부처, 노자, 공자, 무하마드 : 차이를 인정하면 갈등은 사라진다. 사실 유럽인과 미국인은 가장 탐욕스런 약탈자였다. 서양의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근거한 이 책도 유럽 중심적인 관점을 유지한다.
- 브라만교(힌두교의 전신) : 그들은 항상 좋은 것들을 차지했다. 카스트제도(브라만 : 승려/사상가/선생, 크샤트리아 : 귀족/전사, 바이샤 : 평민, 수드라 : 종)가 있었으나 현재는 민중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운동이 일어 인도는 희망적이다.
- 부처 : 강탈과 탐욕대신 용서와 사랑을 베풀라고 가르치다.
- 노자 : 정부가 생기면 탐욕가가 많아진다.
- 공자 : 잘못된 통치가 전쟁과 무질서를 부른다.(높은 도덕률을 요구)
- 무하마드 : 거짓말과 속임수 없이 물질을 추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지하드(聖戰)를 위하여 죽는 자는 천국을 간다(서구인과 종교적 적대감이 있다).
2부 : 규범을 파괴한 탐욕의 화신들
1. 아그리피나(1세기)
예수가 생존했던 시기는 로마제국의 부패와 잔인함이 극에 달했던 때로서 아그리피나는 황제 칼리쿨라의 누이로서 황제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해 권력의 자리에 오른 탐욕가이며 황제 네로의 어머니이다.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하고 네로를 황제로 등극시켰으나 아들인 네로와의 성관계설이 있을 정도로 복잡한 음모와 타락 그리고 부패로 로마는 멸망하게 된다. 네로의 폭정과 아그리피나를 보면 “그 어미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있다.
2. 에비타 테오도라
로마가 멸망을 하고 로마는 둘로 나뉘어 동로마는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에 두고 비잔틴제국(285년~1453년)이 되나 이는 후에 1,000년을 넘게 유지되다가 오스만 투르크에 의하여 멸망을 한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년~565년)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무희이자 창녀인 애첩 테오도라와 결혼을 하여 그녀는 황후가 되는데 그녀는 재판도 없이 사람을 처형하는 잔혹한 여인이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역시 야심가로서 혼외 아들을 처형했던 잔인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테오도라를 정치가로서 높이 평가를 한다. 즉 그녀는 야심 많은 황제가 사랑한 잔혹한 여인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법전을 마련했으며 이는 현재의 유럽, 라틴아메리카, 퀘벡, 루이지애나 법률 제정자에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3. 유럽을 향한 거침없는 진군(이슬람의 유럽 침공)
탐욕가들은 부와 권력을 위해서는 자신의 종족도 친척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을 치르고 이는 끝없는 살인과 방창한 부패를 만들어낸다.
635년에서 846년 사이에 이슬람은 10회에 걸쳐 유럽과 전쟁을 한다. 당근과 채찍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이슬람은 항복(降伏)자를 우대하며 자신들의 문명을 서유럽으로 전달하였으나 이 모두 탐욕의 범주 내에 있었다. 이러한 전쟁은 양쪽을 모두 약화시켰으며 13세기에 오스만 족이 정복을 하게 되고 1389년에는 발칸반도를 평정한다. 헝가리 왕이 서유럽 군대를 규합하여 오스만 족과 십자군 전쟁(1396년)을 벌렸으나 패하고 1453년 투르크 족이 비잔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여 그 후 5세기를 지배한다. 서유럽 침공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레판토 해전(1571년, 돈키호테의 세르반테스 참전)이다. 신성동맹이라는 反오스만 연합군이 3차의 시도 끝에 투르크를 굴복시키고 오스만의 깃발을 하강시킨다. 발칸반도는 5세기 동안 투르크의 지배를 받다가 해방이 되지만 유럽이기를 원하는 종족이 있고 보스니아, 세르비아 등은 지금도 분쟁을 벌리고 있다. 투르크를 섬겼던 발칸반도 내의 민족들은 끔찍한 삶을 살아야 했고 불가리아인과 비잔틴의 싸움에서 1014년 비잔틴이 승리하므로 바실리우스2세는 불가리아인 15,000명을 두 눈알을 뽑아(100번째는 눈알을 하나만 뽑아 안내인 역할을 시킴)서 불가리아도 되돌려 보냈다. 불가리아인과 같이 그리스도 교인이었던 바실리우스2세는 불가리아인의 도살자였다. 지금도 그리스인들은 어린 학생에게 바실리우스 2세의 칭송교육을 시키고 있으니 이곳은 동서교차의 잡탕인 것이다.
4. 성지탈환과 경제이익이라는 두 마리 토끼(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1095~1204)의 목적은 638년에 빼앗긴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으로부터 탈환하는 것이었다. 그 이면에는 서방교회가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회로의 분할이 있었다. 분할의 이유는 성자의 성령(filioque)을 신조에 삽입, 성직자의 결혼금지조항, 사제에게 수염을 깎으라는 문제였다.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1차 십자군 전쟁(1096~1099)을 일으켰다. 전쟁의 원인은 성지탈환과 함께 이슬람 상권이 지배하는 지중해 동부지역을 탐하는 경제적 요인이 있었고 또 하나는 비잔틴을 좀먹어 오는 이슬람의 퇴치를 해주면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회의 통합에 동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초기에 알베르 주교의 규탄을 보면 십자군이 유대인을 학살하는 잔혹함을 보였고 1099년 6월 7일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장악했으며 이들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 곳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살육을 저지르며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했던 것이다. 2차 십자군 전쟁(1147~1149)은 중동에 확보된 그리스도교 왕국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고 3차 십자군 전쟁은 황제의 전쟁으로서 1187년 10월 2일 이슬람의 살라딘 장군에게 오히려 예루살렘을 점령당하고 평화협정이라는 이름으로 몸값을 지불하고 학살을 면한다. 제4차 심자군 전쟁(1202-1204)은 소년소녀의 십자군이 결성된 전쟁이고 제5차 십자군 전쟁(1228~1229), 제6차 십자군 전쟁(1248~1254), 제7차 십자군 전쟁(1270~1272)을 치르고 1291년에 전쟁은 십자군의 패배로 종료된다. 십자군 전쟁은 전쟁과 약탈을 좋아 하는 자, 욕심 많은 성직자, 재물을 탐하는 탐욕가, 그 아래서 도적질과 강간, 살인, 약탈을 저지른 군인, 이들에게 사면을 내린 추기경 등이 벌인 전쟁이고 오히려 고대 부족사회로 회귀하였다는 평을 듣는다. 십자군은 이슬람의 위협을 받고 있던 비잔틴 제국을 이라크, 투르크, 팔레스타인, 레바논, 발칸, 시리아 등으로 찢어 놓았으며 4차 전쟁부터 비잔틴 제국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종교적으로는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회 사이에 서로의 인종적 증오심으로 잔학성을 보이며 혹독한 살육을 저지른 행위였다. 역사가는 이 전쟁을 다음과 같이 평한다. 봉건영주의 몰락으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고, 동서 간에 무역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비잔틴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교류증대를 가져왔고 이는 후에 르네상스의 발판이 되었다. 1254년부터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으나 이는 영토를 연결 짓지 않고 교황이 주관하여 황제로 등극을 하였으나 각자의 나라는 독립성을 유지하였으며 이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프란츠 2세(1792~1806)를 마지막으로 소멸된다.
5. 신대륙으로 눈을 돌린 유렵의 탐욕가들(라틴아메리카의 정복, 16C)
이 무렵 유럽에는 전쟁에 휘말렸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포도주 생산지를 둘러싼 백년전쟁(1337-1453)이 있었고 백장미의 요크가와 붉은 장미의 랭커스터가의 장미전쟁(1455~1485)이 이었으며 1469년부터 1679년 사이의 210년간에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덴마크, 영국, 프랑스, 독일, 헝가리, 아일랜드, 이탈리아, 몰다비아, 네덜란드, 노르웨이, 오스만 제국, 포르투갈, 폴란드, 러시아, 스코틀랜드, 에스파냐, 스웨덴, 베네치아에 권력과 재물을 위하여 약탈과 강간, 살인이 난무했다. 15세기에서 16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신흥 부르주아지 계급이 권력을 잡았다. 그들은 아메리카라는 대륙의 놀라운 발견을 한다. 에르난 코르테스(1485~1547)는 서인도제도와 멕시코로 가서 원주민을 살육하고 종교(카톨릭)를 앞세우다가 음모로 파멸을 맞이했고 프란시스코 피사로(1475~1541)는 파나마, 페루 등 잉카제국에서 역시 종교를 앞세우며 군인들을 살육하다가 잉카인들에게 처형을 당하며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죽는다. 이렇게 라틴아메리카를 삼킨 에스파냐는 총, 균, 쇠를 이용하여 멕시코 인구의 400만 명을 전염병으로 죽이고 원주민을 착취, 살해, 노예화, 처형, 강간을 하고 사제는 이를 사면한다. 부패와 폭력이 난무하였으며 19세기에 들어 본토와 독립전쟁을 하고 군사독재를 실시하며 폭력을 행사하고 매관매직, 부정부패, 수탈에 군(軍)조직을 이용한다. 이곳은 20세기 말까지 군사독재 지배를 받았고 메스티조(인디언 사이 혼혈), 물라토(흑인 사이 혼혈) 등 인종차별을 하였기에 사제들은 해방신학으로 돌아 교황청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민주주의 확립에 이들이 도움이 되는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6. 유럽의 근간을 흔든 종교개혁 : 프로테스탄티즘의 태동(1517~1610)
실질적인 종교개혁은 마르틴루터와 칼뱅에 의하여 주도 되었다. 그것은 일반 백성을 위한 존 위클리프의 성서번역과 민중이 권력자와 얀 후스는 고위성직자의 억압에 매인 것에 분노한 것이다. 하느님을 내세운 그들의 권력독점 때문이었다. 성 베드로 성당의 재건을 위한 재정확보를 위하여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을 루터가 반박을 하다가 파문을 당했으며 율리우스 2세 교황에 의하여 자행된 친족등용, 사생아출생, 잦은 정치적 변신, 축재 등이 그러한 원인이 되었다. 청교도주의의 칼뱅은 개인의 구원과 회심을 강조했다. 평신도들의 권한을 대폭 강화한 칼뱅주의자들도 부패의 씨앗을 안고 있었지만 긍정적인 영향도 많이 남겼다. 종교전쟁의 또 다른 얼굴은 세금 전쟁이었다. 세금을 거두기 위하여 전쟁을 했고 그 과정에서 강간, 학살, 시기, 약탈 등이 자행되었다. 앙리 4세는 세 번의 개종으로 실용주의를 선택했다,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파리를 얻기 위하여, 산업진흥을 위하여 개종을 했지만 개인적인 불성실, 음란, 성추문 등으로 칭송을 받지 못하고 피살되었다.
7. 모든 인간은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지닌다.(미국의 민주주의, 1783-1865)
앙리 4세가 죽은 뒤에도 유럽은 전쟁을 계속했다.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30년 전쟁(1618~1648)에 이어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1701~1714)이 있었으며 이는 약탈과 국가부침을 초래하고 세력판도를 바꾸었다. 그런 과정에 미국은 영국의 지배를 거부하였으며 유럽의 탐욕가들은 관심으로 미 대륙으로 전환하고 그 후 200년간을 미 대륙에서 야수처럼 행동을 했다.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도 그에 포함이 되었다. 초기 13개 주에 종교의 자유 법안이 통과되었으나 영국은 식민지인들에게 군 유지비용을 갈취하였으니 이에 전쟁이 시작이 되고 1776년 7월 4일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미국은 연합헌장을 제정하여 민주주의의 선례를 남겼으니 大역사가들은 밀수업자며 노예상인이었고 조지 워싱턴과 벤저민 프랭클린은 토지강탈자였다. 토머스 제퍼슨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는 솔론의 정신이 좋은 말로 묘사되어있어 파리조약에서 공인을 받아 정식으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독립은 백인만을 위한 것이었다. 인디언은 제외되었고 무자비한 존재로 명시되어있다. 미국은 유럽의 용기 있고 두뇌 있는 자들에게는 기회의 땅이었지만 아프리카에서 매매, 포획되어온 흑인들에게는 지옥의 땅이었다. 링컨은 1863년에 노예해방을 선언하였으나 남북전쟁(1861~1865)이 종료될 무렵 1865년 암살되었다. 그러나 노예해방의 이면에는 정치, 산업적인 요인도 있었으니 흑인의 인권 개선은 칼뱅주의자인 마르틴 루터 킹(1929~1968)이 앞장서서 쟁투를 하였으나 흑인과 인디언을 억압하는 것은 미국사회이므로 미국사회에서 인종차별이 종식되기 위해서는 갈 길이 아직은 멀다. 그래도 솔론과 예수에 근거한 정치발전이 미국에서 이루어진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8. 자유를 향한 혁명이 탄생시킨 독재자, 나폴레옹(프랑스 혁명과 그 이후, 1789~1821)
미국의 독립은 유럽 내에 해방전쟁을 불러 왔고 영국에 반발을 하게 되었다. 특히 프랑스에는 토지를 소유한 많은 귀족들이 교만한 독재자로 군림하였고 몽테스키외 같은 계몽사상가의 영향이 있었으며 프랑스 왕이 미국의 독립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기폭제가 되었다. 1788년 대기근으로 프랑스에 식량이 부족하여 1789년 7월14일 성난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독재의 상징이 무너진다. 그러나 그것은 단두대를 앞세운 공포의 구원이었다. 모든 국민이 자치권을 갖는다고 선언한 제헌의회의 입헌군주제로 가는 분위기 속에서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와네트는 단두대에서 처형이 되었고 수십만이 체포되고 수만이 단두대에서 처형이 되는 공포의 시대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위해 준비되어 갔으나 프랑스는 새 헌법을 통하여 미국과 유사한 정치체제를 구축해갔다. 나폴레옹은 자유와 평등을 전파시킨 탐욕가이다. 1769년 8월15일 코르시카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은 탁월한 지도자였다. 그는 유럽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여 프랑스의 국가제도를 적용하였으나 영구만은 안 되었다. 넬슨제독에게 패하고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1799년11월 9일 정부를 뒤엎고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프랑스 혁명이 미국의 독립운동과 궤를 달리하게 하므로 워싱턴은 민주주의를 지향했으나 그는 플라톤의 철인정치와 일맥상통하는 독재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에 난무하던 당시의 법과 관습에 일괄적인 논리와 질서를 부여한 공이 있다. 그는 군사적 천재로서 대륙에서는 승리를 했으나 넬슨(넬슨도 당시 유부녀와 정을 통함)에게는 연패를 한다. 그러나 유럽을 지배하고자 1812년 50만 대군으로 러시아를 침공하나 러시아의 초토화 작전으로 모스크바에서 퇴각하여 다음 해에 동맹군에 항복하여 1814년 4월 6일 지중해 엘바 섬으로 유배를 간다. 부르봉 왕조가 부활을 하나 이미 부를 축적한 일반 국민과 귀환한 귀족과 성직자와 충돌하고 나폴레옹은 1815년 5월 1일 다시 복귀한다. 그러나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 공작에게 패배를 하고 다시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귀양을 가서 52세를 일기로 사망을 한다. 그는 이러한 프랑스를 수습하던 탈레랑 같이 배신을 하거나 재물과 권력을 탐했던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탐욕가는 아니었다. 무고한 살상을 하지도 타국인이나 인종을 차별하지도 않았다. 그는 워싱턴 같은 민주주의자는 아니지만 유럽 전역에 개인과 양심의 자유, 법 앞의 평등,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는 법전을 남기어 유럽대륙을 변화시킨 프랑스 역사에 길이 남아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9. 영국식 민주주의를 세계에 전파하다.(영국의 평화 시기, 19C)
19세기에는 세계사에 커다란 두 가지의 발전이 있었다. 그것들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민주주의의 정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이념과 이해관계가 얽힌 복잡한 힘겨루기이기도 하다.
.산업혁명으로 기계화가 되면서 농민이 노동자화가 되는 과정이었고 이는 미국의 독립전쟁의 씨앗이 프랑스 혁명이라는 바람에 실려 유럽대륙에 파종이 되는 위험하고 불안정한 혁명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러한 민주주의 사상은 무정부주의자와 공산주의자에 의하여 왜곡이 되었다. 즉 탐욕의 기득권자가 새 물결에 저항을 하며 남의 나라를 착취의 대상으로 삼고 나치즘 및 파시즘으로 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량학살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1809~1865)은 1840년 사유재산을 불허하므로 부르주와지 민주주의와 노동자를 분리하였고, 칼 마르크스(1818~1883),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는 1847년에 공산당을 선언하므로 역사를 계급투쟁으로 정의하였다.
. 좌파의 위협은 프랑스를 프로이센과의 전쟁(1870)으로 몰고 부르주와지 공화국을 수립했으나 노동자에게 투표권을 불허하여 1871년 노동자는 “코뮌”이라는 자치정부를 수립하였으나 이들의 충돌로 코뮌 지지자 2만 명이 학살이 되고 7천 명이 유배를 가게 된다.
. 한편 프로이센 공화국에는 철혈재상으로 불리는 비스마르크 수상이 출현하여 공산주의자는 악마의 씨앗이라 부르며(왜냐하면 본인의 소유 땅을 지키기 위하여) 작은 전쟁을 치르며 게르만 통합을 성취한다. 좌파의 증가로 그는 산재, 연금, 무상의료 등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하며 1890년 75세로 사임을 하지만 회고록에서 통일된 조국 독일에 애국주의를 고취하여 훗날 히틀러의 각광을 받는다. 하지만 새뮤얼 존슨은 “애국주의란 악인 내세우는 최후의 보루”라고 말한다.
. 그러나 주변국에서는 나름대로 민주적 제도가 확립되어 갔고 영국은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세계최강의 강국으로 부상하며 이 시기 100년간이 영국의 평화시기로 불린다. 산업혁명은 영국의 탐욕적인 신흥부호와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합작품이다. 신흥부호는 돈을 벌었지만 공장 근로자와 광부의 삶은 열악했다. 노동자의 움직임은 사회불안의 요인이 되고 시위가 촉발이 되어 “피털루 학살”이 자행되었고 소작인들은 쫓겨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 영국이 민주주의 기원이라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의회는 표의 등가성이 심히 불평등한 하원의원과 세습귀족의 상원의원이 있어 워털루 전투 이후 70년 만에 민주적인 투표를 시행하였으나 그 속도가 늦어 그 틈에 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영국의 신흥부자들은 과거의 부자만큼 무자비하고 탐욕스러웠다. 영국은 인도에서 무자비하게 세포이를 진압했고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제압했고 벨기에는 콩고를 점령하였다. 덩달아 미국은 일본을 개항시키므로 일본의 근대화를 가져왔고 그 결과 일본은 조선 침략을 하였다. 하여튼 유럽국가의 비유럽국가에 대한 오만과 독선으로 극에 달했다. 이를 그리스도교의 포교기회로 삼고 수많은 애국주의자들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식민지인을 물론 자국의 빈자에게도 잔인했고 어린아이까지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던 탐욕가들이었다.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1820~1903)는 다윈 이전에 적자생존 논리를 피면서 부자를 옹호하였고 1893년 존 록펠러도 이에 동조하였다. 노동자는 자본가에 맞서서 노조를 결성하였지만 노조 역사 탐욕가로 양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영국은 이때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관공서 서비스를 개선하였으며 이로 인해 인도에서도 민주주의 뿌리가 내리기 시작했고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에 영국의 후손이 정착하여 세계대전을 치르며 독재와 싸움을 하여 민주제도를 정착하였다. 영국은 입헌군주제의 본보기를 보였고 BBC설립으로 언론의 발전에도 기여해온 것은 사실이다.
10. 과학과 문명의 발전이 야기한 20세기의 그림자
20세기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고 냉전으로 접어들어 기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공포의 전조를 보였다. 자동화기의 등장은 대량살상의 가능성을 열어준 문명의 이기(?)이다.
. 발칸반도는 독립 쟁취를 위한 대립과 갈등으로 전쟁을 하게 된다. 발칸은 화약고 이다. 발칸 전쟁은 1차 세계대전의 서곡이며 그 양상이 매우 복잡하다.
. 1914년 1차 세계대전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를 계승할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인에게 암살을 당하며 유럽 각국의 이해관계로 전쟁이 발발한다. 100만 명 이상이 살육을 당하고 1차 대전 중에 자동화기에 의한 사상자 수가 850만 명에 이른다. 1917년 4월 미국이 개입하고 1918년 11월11일 11시에 휴전이 되나 영국의 야전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는 보병위주의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여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는 금화 50만 파운드를 그 대가로 받았다.
. 1차 대전 후, 서구 열강은 러시아를 공격하여 레닌 정권 전복을 시도하나 땅을 나누어 주겠다고 약속한 레닌에 속은 러시아 농부와 군인들을 이기지 못한다. 레닌 역시 농민과 노동자를 무참히 학대하고 착취하여 공산주의 정권을 세운다. 그리스는 터키를 침공하여 투르크 족의 영토를 빼앗아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붕괴되어 지금의 터키가 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해제가 된다. 독일은 전재의 패배로 식민지를 상실하고 전쟁배상금에 시달리다가 1933년 히틀러를 배출하게 되고 승리한 연합국인 영국과 미국은 세계무역의 주도권과 중동석유개발권을 둘러싸고 갈등하며 이는 미국의 번영을 가져오나 미국은 1932년 경제공황을 겪으며 만개가 넘는 은행이 도산을 하게 되고 노동자의 1/4이 실직을 하게 되며 이로 인하여 전장의 소녀들은 깡통 하나에 몸을 팔게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1932년 대규모 공공사업을 전개한다.
. 2차 세계대전 : 1933년 독일의 수상이 되는 히틀러가 민주주의를 폐지하고 공공사업으로 경기침체를 극복하여 했던 그는 영토에 참욕이 있었기에 전쟁의 배상을 중지하고 군대를 재무장 시켰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차지했으며 폴란드를 침고해서 반분하자고 러시아에 제안을 한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1939년 9월 1일 선전포고를 하나 이듬해 봄에 독일이 네덜란드, 벨기에, 덴마크, 노르웨이, 프랑스를 장악하고 1941년 소련을 침공하여 나폴레옹의 실수를 반복한다. 영국의 처칠 수상이 독일과 외로움 싸움을 하지만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전쟁에 개입을 하여 1940년10월 그리스를 침공한다. 동양에서는 일본이 1937년 중국을 침공하며 독일과 동맹을 맺고 1941년 인토차이나, 1941년 12월 7일 미국의 진주만을 공습한다. 그러나 1943년 1월31일 독일이 소련의 스탈린그라드에서 굴복을 하고 소련은 1943년 7월 5일 쿠르스크에서 탱크 전을 벌이며 베를린으로 진격한다. 이를 위해 스탈린은 무고한 국민을 살해한다. 이에 연합군은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을 하고 1945년 5월 독일의 항복을 받아낸다. 히틀러는 600만 명을 가스로 살해하는 홀로코스트 만행을 저지르고 포로와 부녀자, 아동을 무참히 살해하며, 부녀자 강간을 일삼고 무차별 폭격을 가해 군인 1,400만 명, 시민 2,700만 명, 미군 약 30만 명이 희생된다. 1945년 일본이 원폭투하로 항복을 하지만 일본은 150만 명의 군인과 30만 명의 시민이 희생된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 전에도 수백만 명을 학살하였지만 스탈린은 5,000만 명을 넘게 살해한다.
.시한폭탄 같은 중국 :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반도에서는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3년간 전쟁을 한다. 중국은 공산화가 되며 東유럽국가들은 소련의 위성 공산국화가 된다, 소련은 군대/군수산업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엉터리였다. 그것은 탐욕가가 국가를 통치한 결과이며 배신, 부패 등 인간의 본성에 역행하여 소련은 붕괴된다. 1980년대 말 고르바초프가 북유럽방식의 사회주의로 전환하고 非러시아 민족을 해방시키지만 그의 주변에 민주주의자가 없어 구체제가 무너지고 러시아로 재편되며 그 이후에 푸틴이 권력을 장악한다. 한편 중국은 장개석이 모택동에게 대만으로 밀려나고 1950년 한국전쟁에 개입하며 1962년 인도를 공격한다. 모택동은 불가능한 개혁을 위하여 살육, 재산몰수, 지식인 탄압, 강탈을 일삼고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을 한답시고 2,300~3,500만 명의 인민을 사망케 한다. 그는 사치와 호색으로 살다가 사망하며 이후 등소평이 개방정책을 실시하여 경제성장을 이룩한다. 유럽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은 공산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12억의 인구로 환경파괴를 일삼는 시한폭탄의 독재국가일 뿐이다.
11. 인공위성을 통한 세계화 혹은 미국화
. 지구촌 21세기 : 미국은 세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나라이면서 세계의 문제를 야기하는 나라이다. 다국적기업으로 인하여 후진국의 국민들 때문에 선진국민이 일자리를 잃고 사회보장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른다. 아직도 남아있는 인종차별의 문제 등을 보면서 선진국도 해결 못하는 일들을 후진국인 우리가 어찌하겠는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을 할 수도 있다.
. 수백 년 이어진 종교분쟁의 깊은 골-아일랜드 : 영국의 침공으로 병합이 된 아일랜드는 1846년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200만 명이 상이 이민을 떠났다. 남 아일랜드의 카톨릭 신자들은 투표권도 없었고 공직자로 나갈 수도 없었다. 프로테스타트의 북아일랜드와 갈등이 있으나 최근 통일을 희망한다.
. 인종청소라는 미명하래 자행된 학살로 발칸반도 문제, 미국기업과 결탁한 독재자들이 득실거리는 라틴 아메리카, 패권주의에 맞서 싸워온 베트남(민주주의보다 외국세력을 몰아낸 민족), 킬링필드라 불리는 폴 포트의 200만 명 학살의 캄보디아, 서구 민주주의 없이 근대화를 추진하여 경제를 향상시킨 한국, 싱가포르는 민주주의라기보다는 관대한 독재자에 의해 이루되어진 결과(박정희는 이광유보다 더 관대한 독재자임), 식민지배자들로부터 황인종보다 더 혹독한 대접을 받아 짐승 같은 노예생활을 한 흑인들의 아프리카(이들 중에도 넬슨 만델라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있음), 불운한 성지인 예루살렘(이슬람과 유대인)을 보면 여전히 자신들의 자원을 빼앗아 번성을 구가하는 서방을 보면서 이들은 여전히 살인과 전염병으로 골치를 앓고 있음을 볼 때에 서구세력은 이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했는지 그리고 했다면 제대로 했는지 지극히 의심스러운 일이다.
. 이러한 모든 현상을 통해서 볼 때에 자유의 정도, 정의의 존재, 부정부패의 정도, 여성존중, 부패한 통치자에 대한 심판 가능성 등 모든 것을 고려해야 건전한 민주주의로 거듭날 수가 있는 일이다.
12. 맺음 말
. ‘인간은 과거에 했던 대로 미래에도 행동한다.’라는 BC5C 경의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주장이 있다.
. 상호 간에 정해진 일정한 교전규칙 하에서 동정심, 용서, 관용 등 타인데 대한 배려가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치던 과거에 비하여 확대되었을까? 이것을 시민과 국가, 국가와 국가 간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을 해본다면,
- 시민과 국가 간에서 기회의 불균등, 인종 및 외모의 불리 등이 선진국에서도 상존하는데 비민주국가에서는 더 불확실 할 것이다. 더구나 이념이나 권위에 반대하면 더 박해를 받게 된다.
- 국가와 국가 간에서는 오히려 천만의 말씀으로 전쟁을 반대하거나 방지를 하지 않고 UN도 기아, 질병억제에는 활동을 하지만 전쟁억제 및 국가 간의 관계개선에 기여한 바가 별로 없다. EU는 수입규제를 통하여 빈국의 경제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 그러나 수천 년 간 싸움을 해온 유렵의 국가들이 하나로 통합이 되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므로 한 줄기 빛이 되었으면 하는데 과연 그것이 이루어질까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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