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양반-역사적 실체를 찾아서]
[양반-역사적 실체를 찾아서]
- 미야지마 히로시 지음/노영구 옮김
1980년대 말일게다. 일본업체 "도시바"와의 회의가 있어서 동경을 갔다가 회의가 끝난후 술자리에서 그 업체의 중역인 호시아이(星合)는 한국의 "양반"에 대해서 질문을 했다. 일본식 발음이었기에 "얀반"이라고 해서 무슨 말인가 했더니 우리 조선시대를 살았던 양반의 폐혜에 대해서 신기하다는 듯이 한 편 비웃듯이 말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이양반 저양반하고 살아왔는데 그가 했던 그 질문에 좀 당황을 하여 "한국사에는 양반과 민중의 명확한 두 줄기의 흐름이 있어 양반이라는 개념에 몰입을 해서는 한국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약간은 궁색한 답변을 하고 말았다.
최근에 일본인이 쓴 "양반"이라는 책을 접하고 혹시 그가 당시에 이 책을 보고 나에게 그런 질문을 했는가 했더니 출판연도(1995년 5월)로 보아 그 이전의 일이었기에 그것은 아닐 것이고 단지 저자가 이 책에서 기술했듯이 이말이 일본에도 널리 알려진 어휘라는 것을 보았을 때 그저 단순한 아니면 나름대로 한국사를 공부를 하고 그 질문을 했던 것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하여튼 우리의 양반이라는 역사적 실체를 일본인이 파헤쳤다는 것에 대하여 그에게는 독특한 작업이지만 우리로서는 생각해볼 일을 외국인 특히 일본인으로서 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쓴 조선의 양반에 대한 사실과 그것이 현재의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에 대한 본 저술의 맥락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삼강오륜을 달달 외우고 유교식으로 조상의 제례를 지내는 것을 보면 그는 유교문화가 한국사회에 깊이 침투하여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고 북한도 그에 유사하다고 한다. 주자학의 본산인 중국보다도 더 주자학(이하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의 유교적 전통은 역사적 형성물로 지금도 한국사회에 남아 있고 한국사회를 지탱하고 있기에 그 실체에 대한 유교적 전통의 고찰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양반의 개념이 법적인 절차를 통하여 제정된 계층이 아니고 사회관습을 통하여 형성된 것이라고 양반을 파악하고 있다. 양반은 한양을 중심으로 하여 권력에 따라 흥망성쇠를 했던 재경양반(경반)과 15~17세기를 통하여 사회적 현상으로 비록 과거에 합격은 하지 않았더라도 유학에 조예가 깊어 지방에 널리 형성된 재지양반(향반)으로구분되는데 이 양반을 일반적으로 정의하기가 매우 곤란하다고 저자는 주장을 하며 재지양반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찌 되었든 양반은 조선의 지배엘리트였으며 성리학을 충실히 실천했던 담당자들이었다. 양반을 지향한다는 것은 곧 신분의 상승을 의미한다. 이 책은 15~17세기에 형성된 이러한 양반지향화의 사회적 운동이 왜 조선사회에서 일어났는지 그리고 조선사회에 어떠한 변화를 주었는지를 궁금해 하며 재지양반의 대표적인 안동권씨 등을 중심으로 그 궁금증을 풀어나가는 것이다.
재지양반의 경제적 기반은 무엇이었을까?
이들 양반계층에는 분재기(分財記)라는 재산상속문서가 있다. 재산에는 이 시대에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비가 있어 이의 소유는 이들의 경제적인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노비의 신분을 판정하는 기준에는 종모법(어머니가 종이면 자식도 종), 일천즉천(부모의 어느 쪽이든 종이면 자식도 종)이 있었으며 노비의 종류에는 외방노비(주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사는 노비), 매득노비(주인이 사고파는 노비), 사패노비(임금이 하사하는 노비)가 있으며 노비는 상속이 되고 매매되며 하사되며 소유조차 불명확한 노비도 있고 이들은 신분판정기준에 의하여 자기증식을 하는 존재였기에 16세기 경에는 전 국민의 3~5할이 노비였으며 이영훈 교수는 이러한 노비제도가 우리가 성군으로 우러러 모시는 세종 때에 제정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음은 농지의 소유는 이러한 양반계층의 상속에 의하여 양반 계층의 전유물이었으며 특히 읍단위에서 주읍까지만 중앙관리가 파견이 되었으며 속읍은 주로 지방재력가들에 의하여 위임관리가 되었고 이들이 재지양반계층의 모체가 되어 농지에 대한 선점권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 시대는 개발의 시대였다. 농서가 편찬이 되어 단위면적 당 소출이 증가되어 농지소유주인 양반 층의 부는 더 해갔으며 이러한 부와 노동력을 이용하여 경상도 지역에서는 개간을 하고 전라도 지역에서는 간척을 하여 농지의 소유를 늘려갔던 것이다. 이는 17세기의 한 세기를 거쳐 임진왜란의 피해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다.
양반의 일상생활은 "쇄미록(오희문의 기록)"을 통하여 보듯이 주로 제례를 중히 여기고 권력에 줄을 대려는 손님을 접객하는 것이다. 미암일기(유희춘의 기록)를 보면 10년 간 3,841회의 접객과의 선물을 주고 받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양반도 가족을 부양하고 조상을 모시고 노비를 관리하는 분주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양반과 노비의 관계를 보면 노비는 양반의 수족이고 매매의 대상이며 그 산하에서 노비도 자기소유토지가 있었으며 그것을 상속하고 가족도 형성을 하고 있는 관계였으며 노비로서의 삶을 회피하고자 도망을 가기도 하였고 이들의 반복되는 도피는 노비제의 붕괴원인이 되기도 한다. 앞에서 읍이라는 행정단위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조선시대에는 향안, 향소, 향악이 있어 재지양반이 지방통치의 일익을 담당하며 이들은 혼인, 학연의 관계망을 통하여 거대한 혼맥과 학맥을 형성하고 읍을 넘어서 동족집락(同族集絡)으로 재지양반층 사이를 연결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노비라는 노동력 및 경지개발을 통한 토지소유로 경제력을 상승시키고 중앙정치로 진출을 하며 재지양반층을 형성하였지만 이러한 양반계층의 보수화와 동족결합의 강화는 양반계층 성장의 종언을 가져온다. 이러한 정체현상은 성리학과는 무관하게 상속제도의 변화(남녀균분->남자균분->장남우대)를 가져오고 족보형식의 변화를 초래하게 되며 이는 경제력의 저하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양반계층의 변화는 조선사회에 "양반지향의 사회"를 성립시킨다. 즉 이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성리학적인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보수화 되는 사이에 이들보다 낮은 향리층의 도전을 받는다. 이 모든 현상이 조상을 현창(顯彰)하는 사회적 활동의 일환이었다. 향리층도 상복착용기간을 100일에서 3년으로 연장하고 자신들을 유학(幼學:학문을 목표롤 하는 사람)이라 지칭하기를 시도하며 1773년에는 양반이 서얼에게도 양안, 입록을 허가한 것에 반발하여 양반과의 차별철폐 및 향리가문도 족보입록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일반 민중의 양반지향을 자극한다. 17세기에 전 인구의 노비가 43.1%인 것에 비추어 17~19세기를 거쳐 상인과 노비수가 감소하고 양반수가 증가한다. 19세기에 양반의 90%가 노비를 소유한 것으로 보아 "전국민의 양반화"가 실현이 되었고 양반 외의 계층도 유학을 칭하고 족보를 편찬하고 노비를 소유하는 경향이 일반화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소농층을 형성시킨다. 즉 노비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지대를 받는 소작층의 증가는 신분제도의 변화를 초래하는 배경이 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양반이라는 사회현상을 통한 한국사회의 전통과 근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 한국의 유교적 전통문화는 15~16세기부터 형성되어 18세기 이후에 사회전반적으로 보급된 것이다(오랜 기간 동안 형성된 것이 아니다).
2. 한일강제합병 이후에도 사회활동(독립운동 등)이 이들 재지양반층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3. 1920년대부터 팽배한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도 재지양반층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4. 동족집락의 해체현상은 산업화가 이루어지던 1960년대에 와서 시작이 되었다(아직도 그 현상이 강하게 남아 있다).
5.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의 고도화와 도시화를 경험한 한국사회가 21세기에는 어떻게 변용될 것인지 그리고 어떠한 사회를 한국인들이 만들어갈지 주목이 된다.
정작 지금 우리에게 양반이란 무엇인가?
사전적으로 보면 1. 신분으로서의 양반, 2. 동반(문관)과 서반(무관), 3. 예의바른 선량한 사람, 4. 부인이 제3자에게 자신의 남편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인구의 43.1%가 노비였던 우리에게 과연 양반은 무엇이었을까?
2016.04.19/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