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망국의 mechanism]
[망국의 mechanism]
절친한 친구 중의 하나는 왜 우리는 전쟁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나라를 잃었으며 또 우리의 손으로 나라를 찾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을 우리들 스스로에게 던진다.
정말 우리 민족은 왜 조선말기에 싸움도 한 번 못해보고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겼을까?
그런데 이 질문은 우리 손으로 나라를 찾지 못했을까라는 질문과 동일선 상에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역사 강좌에 가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일상이지만 지난 해에 역사교과서 논쟁을 보고 과연 내가 우리의 역사를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하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새누리당 중앙당에서 접했던 자유경제원 전희경 사무총장의 역사교과서 좌편향에 대한 강의를 떠올리며 오늘 자유경제원에서 주관하는 역사 강좌를 신청하여 참석을 했다.
오늘의 주제는 "동북아 국제질서와 조선"으로 부제는 -조선의 해외파병과 중국 인식 문제- 였고 서강대학교 사학과 계승범 교수가 수고를 했다.
다행히 나는 오늘 강좌에서 나의 친구가 던졌던 망국의 역사에 대한 질문에 답을 얻었다. 오늘 강의에서 조선이 왜 그리 속수무책으로 나라를 일본제국주의자에게 넘겨줄 수 뿐이 없었는지 그 안타까운 망국의 메카니즘을 파악하게 된 것이다.
강좌는 크게 다섯 가지의 소주제로 구성이 되었고 그 소주제는 주로 15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조선이 위치했던 동북아의 국제질서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의 한반도는(엄격히 말하자면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중국의 중원을 차지하려는 세력 간의 헤게모니 쟁투에서 이들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어떠한 형태로든 반드시 손을 봐야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고구려와 발해라는 한반도 내의 국가에 의한 역사적 트라우마가 중국의 중원을 쟁취하려는 세력에 각인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서삼경을 읽고 외우는 한반도가 정리되고 나면 10년 내에 중원이 평정이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15세기 조선의 외교노선은 명나라의 북쪽 세력을 괴멸하기 위한 파병요구에 대하여 조선은 거절, 부응, 생색내기로 대응하다가 16세기에는 무조건 파병을 했으며 급기야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가 조선으로 참전을 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두 나라는 군사적 강대국과 무력한 약소국의 관계로, 중화문명에 대한 문화의 상국과 하국으로 변화되었으며 군신의 외교관계는 "군부 대 신자"의 서열이 매겨진 것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17세기의 조선은 광해와 조정의 대소신료 간에 외교노선의 논쟁을 벌인다.
기울어져가는 명과 조선의 관계, 청나라의 발호를 간파한 광해와 성리학 근본주의자 즉 사색당파는 할지언정 중국을 사대했던 조정의 관료집단과의 대립과 갈등이 그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이는 인조반정으로 이어지고 병자호란은 삼전도의 굴욕을 불러오며 조선은 정명전에 동참하라는 청의 요구에 의하여 외교 및 통치의 패닉을 경험하게 된다.
삼전도에서 인조가 머리를 찧는 굴욕으로 항복한 조선이 선택할 길은 무엇인가?
조선을 통치했던 지배엘리트들의 자구책은 무엇인가?
조선의 패닉은 매우 오래 지속된다.
이후 조선은 새로운 청나라의 질서 하에서 북경과의 최소한의 외교채널만을 열고 행동은 흉내만 내고 마음은 닫아놓는 쇄국의 길로 접어든다.
이것이 그 당시에 조선의 지배엘리트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길이었다고 지금 우리는 판단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동북아의 구도 속에서 청질서 속의 조선은 국가의 안녕을 유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의 외교체제는 행동보다 말로 하는 습성을 고착화시켰다.
즉, 효종과 숙종의 북벌정책도 어차피 현실에서 실현가능하지 못하므로 결국은 말의 성찬으로 끝난 정책이고 우리가 뙤놈, 양놈, 왜놈, 로스께 하는 비속어로 강대국을 비난하는 것도 모두 이런 역사적 배경 위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의 외교정책은 대원군의 쇄국정책까지 이어진 것인데 아쉽게도 이는 동북아를 넘어서서 세계사의 흐름을 먼저 탄 일본이 다시 대륙으로 진출을 시도하며 1895년 이홍장과 이또히로부미 간에 체결된 시모노세끼 조약까지 지속된다.
17, 18, 19세기까지 이어진 조선의 쇄국적 고립주의가 청나라 질서가 무너진 1895년 시모노세끼 조약까지 지속됨에 그 이후에 조선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이러한 새로운 국제질서를 조선의 지식인이 자각을 했을 때는 이미 속수무책의 나락으로 조선은 굴러떨어지고 만 것이다.
이미 조선은 외교적 수세에 몰려있었고
군사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준비가 전혀 안되어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로 서구열강은 물론 일본과 열심히 싸워볼만한 준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전투는 고사하고 입도 뻥끗 못하며 조선은 일본과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되고 한일합방이 1910년에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에서 당시의 국제질서나 지금의 그것이나 강대국들 틈새에 우리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학습한 비극스런 망국의 메카니즘이 지금도 작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철저히 반성을 해봐야 할 것이다.
작금의 싸드 배치 논쟁이라든가, 북한이 떠벌이는 막말이라는 측면이라든가, 말 많은 좌빨 및 종북주의자들이 미국을 그렇게 비난하면서도 자기 자식은 모두 애타게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일이라든가 하는 행태가 그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오는 사대주의적인 그리고 폐쇄성 쇄국주의의 DNA의 표출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계승범 교수는 강대국과 접경을 해서 자신만의 문화와 언어와 문자와 정체성을 지키고 사는 나라도 우리와 베트남 등 손에 꼽을 정도라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2016.03.17/나무에 오르니 앞이 잘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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